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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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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20년 12월 20일 |
관련 사건 | 경신참변(간도참변) |
주요활동 | 경술국치 후 부인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해 독립군기지 개척 참여, 1920년 광복군사령부 대원으로 활동하다 간도참변(경신참변)시 사망 |
포상훈격 |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 |
관련 인물/단체 | 광복군총영 |
출생 시기는 자료의 한계로 알기 어렵다. 출생지 또한 알기 어려우나 사망 후 부인 이씨(李氏)가 계속해 독립운동을 이어가자, 이를 『독립신문』이 애국담으로 기사화 했다. 그 기사에 부인의 고향을 의주군(義州郡) 가산면(加山面) 방산동(方山洞)으로 기재한 것으로 보아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추정된다. 이명은 김창일(金昌日)이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독립운동을 결심하고 부인과 함께 서간도(西間島)로 망명하였다. 1910년대 서간도는 국내 독립운동단체인 신민회(新民會) 회원들의 주도하에 국외독립운동기지개척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던 시기였다. 그들과 힘을 합해 독립운동기지개척 사업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1920년 초 관전현(寬甸縣) 향로구(香爐溝)에 광복군(光復軍)이 성립되자 가입하였다.
광복군은 평안북도독판부(平安北道督辦府) ・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 ・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중 일부가 통합해 성립된 통합독립운동 단체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지지하였으며 참리부 ・ 사령부 ・ 군영(軍營)을 설치하고, 오직 군사적 목적만을 수행할 특수부대인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을 조직하였다. 이 같은 편제를 가진 광복군의 사령부 부원이 되었다.
북간도지역의 독립군들이 일본군을 삼둔자(三屯子) ・ 봉오동(鳳梧洞) 등에서 대대적으로 물리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같은 상황이 이어지자 일제는 1920년 10월 2만 여명의 대병력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켰다. 일본군은 이듬해 4월까지 한인사회와 독립군기지를 초토화시키는 경신참변(庚申慘變, 간도참변)을 일으켰다.
광복군의 근거지가 있는 관전현 방면으로 들어 온 일본군 병력은 뤼순(旅順)에 주둔하고 있던 관동군(關東軍)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향로구의 광복군 본부를 지키고 있다가 1920년 12월 22일, 일본군 약 300명의 공격을 받고 최와 박씨 성을 가진 두 명의 동지와 전사하였다. 남편 사망 후 부인 이씨는 독립군 진영에 머무르며, 군복을 만들고 음식 만드는 일을 자처해, 무장활동을 수행하는 독립군들을 뒷바라지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집필자 :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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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在上海 日本總領事館 警察部 第二課, 『朝鮮民族運動年鑑』, 1932(국사편찬위원회 편,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별책 2, 2009)
- ・ 『신한민보』, 1921. 3. 10
- ・ 『독립신문』, 1924. 5. 31
- ・ 민족운동연구소 편,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여론사, 1956
- ・ 김승학, 『한국독립사』, 독립동지회, 1956
출처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인명사전으로>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하여 그동안 축적된 연구기반 위에서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사전적으로 종합, 정리하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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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김창일 –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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