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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5년 6월 5일, 경기도 화성(水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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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25년 10월 10일 |
관련 사건 | 수원군 장안면 ・ 우정면 만세운동 |
주요활동 | 1919년 4월 수원군 장안면 및 우정면 만세운동 참가 |
포상훈격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
1885년 6월 5일 경기도 수원군(水原郡) 장안면(長安面, 현 화성시 장안면) 수촌리(水村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19년 4월 3일의 수원군 장안면 시위는 차희식(車喜植) ・ 차병혁(車炳爀) 등이 장안면 석포리(石浦里) 이장 차병한(車炳漢) 등과 주도하였다. 이날 오전 10시경 장안면 어은리(漁隱里)의 장안면사무소를 습격했는데, 11시 반 경 장안면 수촌리 구장 백낙환의 사환으로부터 “곤봉 1개씩 가지고 장안면사무소로 모이라”는 말을 전해 듣고 장안면사무소에 도착하여, 쌍봉산으로 이동하던 다른 시위대와 함께 우정면사무소로 몰려가서 ‘독립 만세’를 외치고 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
이 때 시위대의 선두에서 투석하고 몽둥이로 유리문을 부수었고, 의자와 서류를 소각한 다음 한각리(閑角里)를 거쳐 화수리(花樹里)로 향하였다.
오후 5시경 다른 시위대와 화수리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했는데 시위대의 일부는 주재소 뒤에 불을 지르고 돌을 던졌다. 일본인 순사가 총을 쏘면서 도망하자,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 동북쪽으로 약 80간(間, 약 150m) 정도 떨어진 곳까지 추격하여 돌과 몽둥이로 그를 처단하였다. 이후 4월 15일 다른 시위자들과 함께 수원경찰서에 붙잡혔다.
오랜 고초를 겪은 끝에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이 내란죄로 관할 법원을 경성지방법원으로 지정하였고, 그 해 8월 9일 경성복심법원은 공소 불수리 처분을 내렸다.
결국 같은 해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 살인방화 등으로 징역 2년 6월(구류일수 중 400일 산입)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집필자 : 주동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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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결정서」, 고등법원, 1920. 3. 22
- ・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20. 8. 9
- ・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20. 12. 9
-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9・20・21, 1994, 1995
- ・ 이정은, 「화성군 장안면 ・ 우정면 3・1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9집, 1995
출처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인명사전으로>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하여 그동안 축적된 연구기반 위에서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사전적으로 종합, 정리하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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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김종학 –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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