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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양 근대
정치사상사
자유주의자인가, 사회주의자인가?

J. S.

J. S. Mill
요약 테이블
출생 1806년
사망 1873년
대표작 《논리학 체계(System of Logic)》, 《정치경제 원리(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자유론(On Liberty)》
J. S. 밀(J. S. Mill)

영국의 사회학, 철학자이자 정치경제학자로서, 논리학, 윤리학, 정치학, 사회평론 등에 걸쳐서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 London Stereoscopic Company/wikipedia | Public Domain

왜 밀인가?

밀(J. S. Mill, 1806~1873)은 영국의 철학자, 경제학자이면서 무엇보다도 정치사상에서 빠트릴 수 없는 인물이다. 사상은 당대의 정치·사회·경제적인 맥락에서 생성되기 마련이다. 밀의 사상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먼저 시대적인 배경과 이 배경에서 전개된 그의 생애와 지적 편력 과정을 다룬 연후에 그의 사상을 논하고자 한다.

밀의 주저로 《논리학 체계》, 《정치경제학 원리》, 《자유론》 등을 들 수 있다. 궁극적인 목적이 밀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있는 만큼 4장에서 ① 공리주의, ② 민주주의적 자유주의와 정부제도, ③ 정치경제학과 사회주의, ④ 관용, 자유 그리고 진보, ⑤ 논리학이라는 순서로 그의 사상을 다루고자 한다. 사상의 전반적인 윤곽과 논쟁점을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지주, 부르주아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대립

1688년의 명예혁명으로 기초가 다져진 영국의 의회 정치는 18세기 전반에는 의원 내각제가 성립되어 기구적으로도 정비되었다. 18세기 후반에는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활기차고 강력하게 진전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1792~1815)으로 인해 영국의 사회와 정치는 반동 체제하에 침체되었으며, 그 여파로 의회 개혁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화 운동은 압살되지 않을 수 없었다.

1805년 10월 영국의 넬슨(Horatio Nelson) 제독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를 물리쳤다. 아울러 1807년에는 대영제국 내 노예의 수입을 금지하는 법령이 통과되었다. 산업화와 종획 운동(enclosure movement)(울타리를 쳐서 사유지와 공유지를 구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농민이 농촌을 떠나게 되었다)은 기존의 경제 질서를 혼란에 빠트렸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대영 봉쇄 정책을 시행하는 와중에 영국의 도시와 농촌에서 소요가 일어나게 되었다.각주1)

게다가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물가 상승과 임금 체불 때문에 1811년에는 노동자들의 기계 파괴 운동(Luddite movement)이 일어났으며, 급기야 1813년에는 이 운동의 지도자 17명이 처형되었다.각주2) 1815년에는 전승국들이 빈 회의를 개최하는 중에 엘바 섬에 유배되었던 나폴레옹이 파리로 입성했다. 그러나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이 승리함으로써 1792년에 시작된 나폴레옹 전쟁은 종식되었다.

그러나 1815년에 성립된 메테르니히 체제라는 국제적인 반동 체제는 영국에 토리당의 장기 집권과 강력한 반동 체제를 야기했다. 또한 전쟁이 종식된 후에 전쟁 부채의 부담과 통화 질서의 문란, 식품 가격의 상승, 경기 침체 등으로 영국인들의 삶이 대체로 어려워졌으며, 특히 하층 영국인의 삶은 비참해졌다. 그리하여 1819년에는 6만 명의 인파가 맨체스터에서 집회를 열어 의회의 매년 개최, 보통 선거를 요구하며 정치적인 참여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주장했다. 진압 과정에서 몇 사람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맨체스터의 학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각주3)

산업화가 진행되게 됨으로써 산업가들은 의회에 지주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정치권력의 분담을 요구했다. 상업과 산업에 의한 부도 토지에 의한 부에 못지않게 국가에 기여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구 때문에 의회도 사회 개혁을 도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1832년에는 ‘제1차 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선거권이 확대되었다. 이로써 토지귀족은 상인 계층과 산업가 등의 부르주아 계급을 권력에 흡수시켜서라도 과두제를 지속시키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으며, 귀족제가 황혼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각주4) 프랑스와 비교했을 때 영국의 특유한 구체제가 붕괴되어간 것이다.각주5)

그러나 노동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전국노동자계급동맹은 지주와 부르주아 사이에 권력이 과두화되도록 수수방관하지는 않았다. 1832년의 선거법 개정에 대한 환멸과 경제 불황으로 인한 고통을 느껴온 노동자들은 1837년에는 〈인민헌장(People’s Charter)〉을 채택해 성인 남성의 보통 선거권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화를 요구했다.각주6) 1848년에는 차티스트들이 런던에서 대집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또한 곡물법반대연맹은 곡물법의 폐지가 노동자뿐만 아니라 제조업자, 나아가서는 농민에게도 유리하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중상주의의 마지막 잔재를 청산할 것을 주장했다.각주7) 1846년에 마침내 곡물법이 폐지되어 애덤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가 마침내 승리하게 되었다. 이처럼 1830년대와 1840년대는 자유방임의 시대이면서 사회적인 불만이 분출하는 시기였다.각주8)

그런데 1833년에서 1854년 사이에 영국 정부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자유방임 정책에서 벗어나서 국민의 노동 환경, 건강 그리고 교육에 점차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이것은 맬서스의 인구론과 리카도의 ‘임금의 철칙’이 의미하는 바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어쨌든 정부로 하여금 이러한 일에 앞장을 서게 한 집단은 복음주의자와 공리주의자였다. 전자는 사회의 부도덕성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으며, 산업 사회가 가져다준 삶의 질에 대해 회의를 품었으며, 이전의 삶에 대해 향수를 느끼면서 낭만주의적으로 접근했다. 이에 비해 이성적으로 사회 개혁을 위한 체계적인 이론을 수립한 이는 후자였다.각주9) 동기는 달랐지만 1830년대와 1840년대에 두 집단은 사회를 개혁하는 운동에 협조했다.각주10)

사회 개혁을 위한 공리주의자의 노력으로 인해 1850년 무렵에는 영국에서 두 가지 중요한 선례가 확립되었다. ① 정부는 개개의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경제적인 문제에 간여할 수 있다는 것과 ② 중앙 정부는 행정의 효율을 기하기 위해 지방 정부를 감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선례가 자유방임이 풍미하던 당시에 형성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 일어난 것은 당시에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가진 여론이 사회 개혁의 필요성과 지방 정부의 비효율성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국제 교역에서 자유방임주의의 기치가 드높여지던 바로 그 시점(1839년에 아편 전쟁이 발발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에 국내 문제에서는 국가가 개입하는 계기가 열리게 된 것이다.각주11)

이렇게 보면 그 후에 사회 입법이 증가했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다르게 전개되었다. 1851년에 런던에서는 세계 대박람회가 열려, 세계의 공장으로서의 영국의 산업력과 영국의 위상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영국은 1800년을 전후로 약 50년 동안 세계 최초로 산업 혁명을 달성하고 최강의 공업국이 된 것을 과시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빅토리아 시대 중기에 접어들면서 노동자의 생활도 점차 개선되었다. 산업화에 따른 계층 간 갈등으로 인해 격렬해질 것 같았던 정치적인 선동도 줄어들고 산업 사회에서 계층 간의 불평등도 다소 완화되었다.

그래서 19세기 전반에 비해 번영과 ‘상대적인’ 평화를 구가하게 되었다.각주12) 이 시기에 ‘정직이 최선의 정책’이라는 격언이 받아들여졌으며, 근면과 의무가 강조되었다.각주13) 자조(自助)라는 도덕률은 스마일스(Samuel Smiles)의 저서 《자조론(Self-Help)》에 그친 것이 아니라,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들의 생활의 신조였으며 실상이었다.각주14)

1851년과 1873년 사이는 전반적으로 대부분의 영국인들이 국내에서의 개인주의, 자유 무역 그리고 인류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인 시대였다.각주15) 그러나 그 근저에는 모순이 있었다. 자유방임은 결국 수요 공급의 법칙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 법칙에 따라 자유방임에 맡기는 것이 최대의 선을 가져다주며 사회를 이롭게 한다고 여겨졌다. 따라서 정부의 역할은 사기를 막고 계약이 이행되도록 감시하는 것, 즉 게임의 규칙이 준수되는지를 감시하는 것이었고 정부가 게임 그 자체에 개입하지는 않았다. 기업이나 국가의 진정한 진보는 개인의 독창성과 자조의 결과라고 여겨졌다. 이러한 사고는 스마일스의 《자조론》뿐만 아니라 밀의 《자유론(On Liberty)》에도 스며들어 있었다.

이렇게 번영, 안정 그리고 만족에 도취되어 있으면서 종교적인 성향이 강했던 영국인에게 다윈(Charles Darwin)의 《종의 기원》은 기독교와 기존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위협으로 여겨졌다.각주16) 게다가 사회진화론자들은 아편 전쟁이 황인종보다 백인이 우월한 인종이라는 것을 증명했으며,각주17) 적자생존에 실패한 노동 계층은 도태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1867년에 이르러 평온하던 시대도 끝장이 나게 되었다. 결국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는 도시의 지방세 납부자도 투표할 수 있도록 선거법을 개정해야 했다. 이를 ‘제2차 선거법 개정’이라고 부른다. 2차 개정으로 인해 예상 밖으로 민주화가 달성되어,각주18) 도시 숙련공의 대부분이 투표할 수 있게 되었다. 즉 노동자 대표도 의회에 진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개혁에 의해 밀은 말년에 개량주의를 신뢰하게 되었다. 특기할 것은 밀이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할 것을 1867년에 주장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1869년에는 집을 소유한 미혼 여성에게 시(city)의 선거 투표권이 부여되었다.각주19) 이것은 1832년의 제1차 선거법 개정안에 의해 지주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 사이에 확립된 과두 지배의 원칙이 35년 만에 무너지고 노동 계층도 정치에 참여하게 되는 민주화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각주20)

1894년에 자유당의 재무 장관인 하코트(William Harcourt) 경은 상속세에 누진세율을 적용하자고 제안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시지윅(Henry Sidgwick)과 같은 경제학자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시지윅은 밀이 주장한, 부의 생산과 부의 분배를 구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밀은 부의 생산에 대해서는 그대로 내버려두어야 한다고 하면서 분배에는 통제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지윅은 국가가 어떤 형태로 개입해 개인의 자조를 도울 수도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었다.각주21)

요컨대, 자본주의와 의회민주주의가 최초로 확립된 19세기의 영국은 공업화와 민주화의 시대였으며 두 가지의 갈등에 직면하게 되었다. 투표권의 확대를 위한 투쟁과 노동조합을 합법화하고 임금과 노동 조건을 개선하려는 투쟁이 그것이다.각주22) 밀은 이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는가? 이것이 우리가 파악해야 하는 문제다.

처방을 위한 지적인 탐색

밀은 철학자 제임스 밀(James Mill)의 6남매 중에서 장남으로 런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직접 밀의 영재 교육을 맡았다. 그래서 밀은 3세에 그리스어, 8세에 라틴어를 익힐 수 있었다. 플레이스(Francis Place), 벤담, 그리고 리카도가 이 교육을 돕기도 했다. 밀은 14세 때 남부 프랑스에 있는 벤담의 형제인 새뮤얼 벤담의 가정에서 6개월간 머물면서 화학과 동물학을 수강하고 개인적으로 고등 수학을 배웠다. 그 결과 밀은 16세에 이미 40세의 지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철학적인 급진주의자들(philosophical radicals)’의 지적 지도자가 되었다.

철학적인 급진주의는 19세기 초까지 존속되어온 체제를 급격히 변화시키는 것을 정당화했으며 토지에 기반을 둔 귀족제, 경제적인 독점 그리고 기존의 교회에 반대하는 개혁 운동과 연관되어 있었다. 즉 전통적인 귀족 사회를 변모시켜 근대적이고, 세속적이고, 민주적이며, 시장 정향적이며, 자유주의적인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이에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는 공리주의였다. 공리주의는 개인주의와 개인주의적 심리학에 기초를 두며, 전통과 자연법 이론에 반대했으며, 게다가 암묵적으로 종교에 비판적이었다.각주23)

벤담, 제임스 밀 그리고 J. S. 밀이 대표적인 정치적 급진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16세의 나이에 밀은 ‘공리주의 협회(Utilitarian Society)’를 만들었으며 이 모임에서 《웨스트민스터 리뷰》의 발간을 주도했다.각주24) 그는 17세부터 52세까지 동인도회사에서 근무해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동인도회사를 자신의 정책의 실험장으로 삼았다.

밀은 1820년대와 1830년대에 이르러 벤담과 아버지의 급진주의에 회의를 갖게 되면서 그들이 기대하는 바대로 그들의 철학을 그대로 계승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시대에서 탁월한 지적인 지도자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가 50세가 되었을 때 쓴 《논리학 체계(System of Logic)》와 《정치경제 원리(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는 국가로부터의 자유가 어느 정도 확보됐던 영국에서는 사회에서 동료 시민들, 특히 그들이 다수를 형성하였을 때에 가할 수 있는 전제로부터의 자유를 고무시켰으며, 그의 대작으로 인정을 받았다. 또한 《대의정부론(Considerations on Representative Government)》은 그 후 20년 동안 민주주의의 전망과 위험을 논하는 데 반드시 거론되었다. 〈공리주의(Utilitarianism)〉라는 짧은 논문은 당대에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 후에 끊임없이 논의되고 재해석되었다.

그가 당대에 건전한 행동만 한 것은 아니다. 밀은 16세에 런던의 노동 계층의 거주지에 산아 제한에 대한 책자를 살포해 투옥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논문 《여성의 예속(The Subjection of Women)》에 대해 경악을 감추지 못한 독자들도 많았다. 밀은 아일랜드가 영국에서 독립하기를 바랐으며 부재지주에게서 강제적으로 토지를 매입해 아일랜드의 농업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밀은 1848년의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는 확고한 지지를 표명했다. 게다가 그는 종교 문제에 관한 한 아무리 좋게 보아도 불가지론자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시대의 조류에 맞지 않는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적인 생활에서 지적으로 탁월한 인물로 인정을 받았다.

그의 경력에서 하원 의원에 당선된 것을 빠트릴 수가 없다. 밀은 1865년에 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의원이 되려는 개인적인 의도가 없다는 것, 선거 비용을 일체 쓰지 않겠다는 것, 당선이 되더라도 선거구민의 이익을 옹호하지 않겠다는 것, 당선되면 여성의 참정권을 위해 일하겠다는 것을 공언했다. 이러한 공약을 내걸었는데도 자신이 당선되자 밀은 놀랐다고 한다. 밀은 하원 의원으로 당선된 후 여성과 노동자의 참정권, 지방 자치제, 사형 제도의 폐지, 자유 무역을 위해 3년간 활동했다. 급진주의 철학자들이 사회 개혁을 위해 노력한 바와 같이 밀은 연구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라 연구한 바를 현실에서 실현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그의 많은 저작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자서전(Autobiography)》은 그의 경력과 견해를 설득력 있게 묘사하고 있다. 자서전은 읽을 만한 책이기도 하지만, 속기도 쉬운 책이다. 내적인 순서가 조리에 닿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는 자신이 받은 교육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자서전》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지성만을 중시하고 감성의 함양을 게을리 하는 교육을 받은 결과 자신이 20세에 신경 쇠약에 걸리게 되었다는 것, 테일러(Harriet Taylor)와의 오랫동안의 우정 끝에 결혼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두 사람은 밀이 25세, 테일러가 23세였던 1830년에 만났다. 그녀는 사업가이며 자유주의자였던 존 테일러의 아내였다. 밀과 그녀는 그 후 20년간 교제하다가 그녀의 남편이 사망한 후 1851년에 결혼했다. 1858년에 그녀가 사망한 후에도 그는 매년 반년 동안은 그녀의 무덤이 있는 프랑스의 아비뇽에서 아내의 딸과 살았다. 1873년 열병으로 갑자기 운명한 그는 아비뇽에 아내와 나란히 묻히게 되었다. 1873년에는 경제 공황이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세계 경제에서 영국은 독점적인 지위를 잃게 되었고, 국내에서는 노동 운동이 새롭게 전개되었다.

J. S. 밀 과 그의 아내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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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세에 정신적인 위기를 맞으면서 새로운 사상적인 모색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가 이성을 강조하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교육은 지나치게 분석적이어서, 그의 지능이 급속도로 계발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감성은 성숙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인류에 대한 추상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열정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그는 아버지와 벤담의 급진주의가 안고 있는 결점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그들은 18세기의 인물로서 구질서의 결점을 분석했지만, 보다 나은 세상을 감정적인 온화함으로 채워지게 할 수는 없었다.

밀은 낭만주의자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들에게 결핍된 시적인 감수성과 민첩한 상상력을 테일러에게서 찾았다. 그러므로 그녀와 밀의 관계는 심장과 두뇌, 감성과 지성의 결합을 상징했다. 사실 그녀는 빅토리아 시대의 윤리가 짓누르는 압박감에 대해 강렬한 적개심을 드러내었으며, 밀의 《자유론》의 색채는 그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자유론》 논지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밀의 주장은 명확하지 않다.각주25)

밀은 그녀를 《자서전》에서 완전무결한 여성으로서 찬미하고 있으나, 밀의 서술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녀가 밀에게 정서적인 면뿐만 아니라, 여성론이나 사회주의론 등과 같은 지적인 면에서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밀은 그녀보다는 다른 이로부터 영향을 받은 바가 많다. 밀은 콜리지(S. T. Coleridge)의 낭만적인 보수주의가 벤담의 합리주의적 급진주의와는 대치되는 것으로 보고, 이를 중요시하게 되었다. 그가 콜리지로부터 배운 것은 역사상 여러 가지 제도가 각 시대에 있어서 의미를 가지는 데에는 지적인 엘리트의 역할이 크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공상적인 사회주의자 생 시몽(Saint-Simon)의 제자들과 교류를 하면서 배운 것은 역사관이었다. 그들은 정치적·지적인 권위가 확립된 ‘조직적 시대’는 그 권위가 쇠미해지고 동요하게 되는 ‘비판적 시대’로 바뀐다고 주장했다.

밀의 논문 〈시대의 정신(Spirit of the Age)〉은 이를 반영하고 있다. 밀은 그들에게서 사유 재산 제도는 초역사적인 영구적인 제도가 아니라는 것도 배웠다. 밀은 또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를 읽고 역사적인 필연성을 가진 민주주의에 의해 개인이 대중에 매몰되며 개성이나 다양성이 상실될 위험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그는 1837년 이후로 《논리학 체계》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실증주의자, 콩트의 《실증철학강의(Cours de Philosophie Positive)》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밀은 콩트의 ‘역사적인 방법’과 ‘역의 연역법’을 사회과학 방법론의 중요한 요소로서 수용했다. 그러나 개인을 초월하는 유기체로 사회를 보는 콩트의 사회관에 반대해 수년에 걸친 교류가 단절되었다.

칼라일(Thomas Carlyle)은 벤담에 대한 밀의 반항으로 인해 밀을 생 시몽의 제자라고 오인하기도 했다.각주26) 밀은 낭만적인 보수주의자와 공상적인 사회주의자의 영향을 받아 정부에 대한 이론은 역사에 대한 이론과 진보에 대한 철학을 필요로 하며, 보다 큰 사회적인 맥락을 배제하고 제도적인 문제를 논한다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으며, 사회주의의 가능성에 대해 심사숙고하기 시작했다. 밀의 생애는 자신의 스승과 스승을 비판하는 자들 사이를 오고 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밀은 많은 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자유, 평등, 진보 그리고 진리의 추구

시대적인 배경과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시대의 사상적인 조류와 그의 사상의 일부를 고찰했다. 그렇다면 그의 사상은 벤담의 사상과 크게 보아 어떠한 점에서 차이가 나는가? 이에 대해 일단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전술한 것처럼 밀은 콜리지와 생 시몽 파의 역사관과 지적 엘리트의 지배 주장, 토크빌이 지적한 민주주의에서의 내재적인 결함에 대한 지적 등에 영향을 받아 벤담의 계몽적 합리주의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특히 〈벤담철학고(Remarks on Bentham’s Philosophy)〉와 〈벤담론(Bentham)〉은 그가 벤담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밀은 두 논문에서 벤담 사상의 일관성, 특히 법률론의 혁신성을 높이 평가하지만 한계성과 결함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첫째, 벤담의 ‘기하학적 또는 추상적인 방법’, 즉 소수의 원리에서 결론을 직선적으로 연역하는 방법은 복잡한 사회 현상의 분석에는 적합하지 않다면서 비판하고 있다.

둘째, 벤담의 인간관과 도덕론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공리주의를 지지하지만 인간성의 전 측면을 고려하는 공리주의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벤담의 인간관은 법학적인 관점에 너무 치우쳐 있어서 양심이나 자존심과 같은 것을 경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즉, 인간은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완성을 하나의 목표로 추구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벤담이 조금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밀은 이러한 비판에 입각해 후년에 〈공리주의〉에서 공리주의의 전면적인 수정을 기도했다.

셋째, 벤담의 정치 이론에 대해 커다란 의문을 제기했다. 벤담이 ‘사악한 이익’에 대해 공격하고, 대의 민주 정치에 대해 구상한 바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단순한 수적인 우위가 민주 정치에 내재하는 ‘다수자의 전제’, 즉 개성의 상실과 획일화의 위험을 안고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밀은 사상의 자유와 개성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또한 밀은 벤담이 역사와 국민성을 충분히 평가하지 않았다는 것을 비판하면서 국민성의 철학 위에 법률 및 제도의 철학이 수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비판은 벤담의 방법론과 인간관에 대한 비판이며 그의 적극적인 정치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유념하면서 그의 사상에서 핵심이 되는 부분을 살펴보고 논쟁점이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한다.

공리주의

전술한 것처럼 1830년대와 1840년대에 복음주의자와 공리주의자가 사회 개혁 운동의 주축을 이루었다. 공리주의자 중에서 특히 벤담은 어떠한 제도라도 공리주의적으로 검토하고자 했다. 벤담은 어떤 제도가 전통적이든, 종교적으로 인정을 받았든 개의치 않았다. 게다가 그는 자연적 의무라든가 자연권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벤담은 유용성(usefulness)의 여부만이 제도의 존폐를 결정짓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벤담이 보기에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을 증진시키는 제도나 정책이 유용한 것이다. 그는 국가의 행복이라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국가는 개인의 집합이라는 의미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벤담은 개인주의자였다.각주27)

그렇다면 어떻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달성할 것인가? 예를 들어, 소매치기는 소매치기를 함으로써 자신의 이익이 증진된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소매치기하는 것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증진시키지는 않는다. 사회가 소매치기 처벌법을 만들어서 소매치기는 반드시 일 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주면, 소매치기는 그 일을 단념하고 다른 직업을 택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자신의 이익을 증진시키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이 된다. 이렇게 보면, 공동선을 지향하도록 사회가 법을 만들어 유도해야만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타인의 이익도 증진시키게 된다. 그러므로 벤담은 자연적으로 일치되기 어려운 ‘이익을 인위적으로 일치(artificial identity of interests)’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각주28)

벤담은 처벌의 형태를 정하는 데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했다. 복수를 하거나 회개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를 저지하는 것이 처벌의 목적이며, 이 목적만이 정당하다. 그러므로 더 이상 소매치기를 하지 않게 하는 정도의 형량을 내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처벌이다.각주29) 이와 같이 처벌의 목적에 맞게 형량을 내리는 것이 소매치기와 사회 전체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벤담은 주장했다. 벤담은 이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이성에 따라 사회를 개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주장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벤담과 같은 철학적 급진주의자는 영국의 보통법(관습법, common law)이 전통적이며, 자가당착적이며, 자의적이라는 이유에서 격렬하게 비판했다. 그래서 벤담은 보통법을 옹호한 블랙스톤(William Blackstone)을 비판했다. 게다가 공리주의적인 법률학자로서 벤담은 자연법이나 자연권과 같은 용어를 쓰지 않았다. 이 용어가 애매하며, 자의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을 자연권론자들이 부당하게 옹호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신의 대안, 공리주의적인 법률은 합리성에 근거를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 명쾌하다고 생각했다.각주30)

벤담은 저서 《헌법전(Constitutional Code)》에서 정치 이론의 원리가 되는 세 가지의 원리를 요약하고 있다. 제1원리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원리’이며, 제2원리는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자신에 관한 관심은 타인의 모든 관심보다도 우위에 있다는 ‘자기 우선의 원리’다. 제3원리는 양자를 일치시키는 ‘이익의 일치를 부여하는 원리’다. 그래서 벤담의 정치 이론에서 기본적인 과제는 대의민주주의를 철저히 함으로써 현실의 인간성에서 기인하는 ‘자기 우선의 원칙’과 정치의 목적으로서의 ‘최대 행복의 원리’와의 조화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벤담은 관료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익을 인위적으로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정부의 개입이 필요했다. 벤담의 주위에는 한 무리의 지식인이 있었는데, 채드윅(Edwin Chadwick) 경과 밀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들은 사회의 제반 문제, 예를 들어 노동, 노예, 위생 그리고 교회의 조직에 관한 문제를 지적하고 의회나 해당 부서로 하여금 특별 위원회를 만들어 이를 조사하게끔 압력을 가했다. 이에 따라 위원회는 청문회를 개최하고 이를 시정하기 위한 법령의 초안을 만들었다. 법령에 의해 정부의 새로운 부서가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그 부서는 획일적으로 행정을 통제하고 지방 정부가 법대로 시행하는지를 감사하는 권위를 가졌다.각주31) 따지고 보면 벤담과 밀은 18세기 계몽주의의 후계자였으며, 복잡다단한 세상을 이성의 지배하에 두려고 했다.

세상사를 이성의 지배하에 두려는 생각은 쉽지 않았다. 1830년에 그레이(2nd Earl of Grey)를 수상으로 하는 휘그당 내각이 성립되어 1832년에 ‘제1차 선거법 개정법안’이 통과되었다. 이 법은 이후 영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지대하게 기여했다. 이 무렵까지의 복잡한 정치 과정에서 철학적 급진주의자들의 정치 활동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 법안은 철학적 급진주의자들이 주장한 보통 선거제와 비밀 투표제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법안에 전면적으로 반대한 토리당에 대항해 휘그당 내각을 지지하게 되었다. 특히 플레이스는 전국정치동맹(National Political Union)을 지도해 원외 활동을 교묘하게 조직했으며, 밀은 급진파의 신문과 잡지를 동원하는 등, 반대 세력에 압력을 가했다. 이 법안의 통과는 철학적 급진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쾌거라고 할 수 있었다.

이처럼 급진파들이 하원 내에서 작은 파벌을 만들어 하던 활동이 한때는 성공의 기미가 보였으나, 차티스트 운동(Chartist Movement), 곡물법 반대 선동과 다른 정치적인 상황으로 인해 그들은 이런 활동에 환멸을 느끼게 되고 작은 파벌조차도 분열되고 말았다. 급진파들의 희망은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원내의 철학적 급진파의 해체가 차티스트 운동의 시작과 같은 시기에 일어났다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그들이 노동 문제에 대해서는 대책이 없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차티스트 운동이 내걸었던 〈인민헌장〉에 나타난 6개조는 보통 선거, 비밀 투표, 세비 지급, 매년 개선(改選), 평등 선거구, 의원의 재산 자격 폐지였다. 이는 벤담의 의회 개혁 강령과 일치하는 것이지만 노동자 자신의 정치 운동으로서의 차티스트 운동은 철학적 급진주의자의 ‘중산 계급에 의한 노동자 계급을 위한 통치’와는 차원이 달랐다. 철학적 급진주의자의 중요성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강령을 높이 내걸고 귀족과 지주의 과두 정치를 과감하게 공격해 2대 정당, 즉 지주의 정당으로서의 보수당 그리고 부르주아 정당으로서의 자유당의 편성을 촉진시킨 것이다. 그러나 치명적인 결함은 노동 문제에 대한 대책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었다.

공리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급진주의자들의 사회 개혁은 이와 같이 뜻대로 된 것만은 아니었다. 이에 현실적인 좌절감을 느꼈겠지만, 밀은 공리주의의 내재적인 논리를 다시 검토하게 되었다.

밀이 ‘공리성(utility)을 도덕적 행위의 기초로서 받아들이는 신조에 따르면, 행위는 행복을 증진시키는 정도에 비례해 올바르며, 행복의 반대를 가져오는 정도에 비례해 그릇된 것이다. 행복이라는 것은 쾌락을 그리고 고통의 부재를 의미하며, 불행이라는 것은 고통을 그리고 쾌락의 상실을 의미한다’고 《공리주의》 2장에서 기술하고 있다. 이는 벤담의 정의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벤담의 공리주의를 대폭 수정하고 있다.

첫째, 만족한 돼지가 되는 것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되는 것이 훨씬 낫다는 주장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밀은 모든 쾌락을 양적으로 환산할 수 있다는 벤담의 쾌락주의를 수정하고 있다. 밀은 양보다도 질을 중시해 ‘인간의 존엄에 대한 감각’에 적합한 고상한 쾌락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둘째, 밀은 행복은 일상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무엇인가에 전념하는 사이에 부산물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이기심이나 정신적인 교양이 부족한 것은 인생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고 지적하면서, 특히 행복의 원천으로서 인간이 가지는 사회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즉 밀은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행복을 일치시키는 힘으로서 법률에 의한 정치적 제재를 중시한 벤담과 시각이 달랐다. 밀은 양심의 내부적인 제재로서의 인간이 가지는 인류애를 중시했다.

셋째, 밀은 공리주의가 행위의 결과만을 문제 삼는다는 비판에 답하면서, 행위의 결과뿐만 아니라 동기까지도 주목해 행위의 전인격적인 평가를 중시했다.

밀의 이런 공리주의의 수정에 모순이 없는 것은 아니다. 품위 있는 인간이 선택한 쾌락이 보다 많은 가치를 가진다고 주장했을 때, 그렇다면 품위 있는 인간은 어떠한 인간이냐는 질문에 보다 많은 가치를 가지는 쾌락을 선택하는 인간이 품위 있는 인간이라는 답을 내리게 된다. 이러한 순환론에 빠지고 마는 것이 질적 공리주의가 안고 있는 결함이다. 그렇지만 밀이 주장하는 질적 공리주의는 그가 자신이 겪은 정신적인 위기 이후로 체험하고 사색한 결과로서 윤리학상의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가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자.

인간은 그 본성으로 보아 쾌락을 추구하며 고통을 기피하는 행동을 하는 존재라는 심리적인 명제와 이것이 도덕적으로 가치 있는 유일한 목적이라는 윤리적인 명제를 벤담은 《도덕과 입법의 원칙에 대한 입문(Introduction to the Principles of Moral and Legislation)》에서 제시했다. 그런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원칙에는 그 자체의 논리적인 허점이 있다. 두 가지 정책에 따라 그 정책의 수혜자가 아래와 같이 쾌락을 배분받았다고 가정해보자.

  정책 A 정책 B
시민 갑8단위의 쾌락6단위의 쾌락
시민 을7단위의 쾌락6단위의 쾌락
시민 병0단위의 쾌락5단위의 쾌락
총량15단위의 쾌락17단위의 쾌락

위와 같은 배분에서 전체의 총량, 즉 최대의 행복으로 보면 정책 B를 택해야 한다. 그러나 정책 A를 택하면 보다 행복해지는 사람은 갑과 을이 되어서 보다 행복해지는 사람이 더 많아진다. 행복의 양이 관건이 되는 최대 행복이라는 원칙에서 보면, 정책 B를 택해야 한다. 반면에 행복해지는 사람의 수가 관건이라고 보는 최대 다수라는 원칙으로 보면, 정책 A를 택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느 것을 택해야 하는가? 최대 다수라는 원칙에 따를 것인가? 최대 행복이라는 원칙에 따를 것인가? 애매해진다. 이와 같이 공리주의 원칙에는 내적인 모순이 있다.

그런데 공리주의의 원칙을 적용하지 않고 본다면 우리는 직관적으로 정책 B를 택하기 마련이다. 총량이 더 많을 뿐만 아니라, 평등하게 배분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갑과 을은 정책 A를 택하겠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자신들에게 보다 이롭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병의 입장이 고려되지 않게 되며, 사회 전체로 보아 무시되는 것은 평등이나 사회 정의 등이다.

공리를 물질적인 측면에서만 고려한다면 갑이나 을과 같은 사람이 있게 되고, 국가가 정책 A를 택하게 되어도 잘못된 것이 없다고 강변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 공리주의가 ‘돼지의 철학(philosophy of swine)’에 불과하다고 공격을 받는 것이다. 다수의 물질적인 쾌락 때문에 소수가 희생을 당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며, 그 반대로 다수가 희생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사회 전체의 공리 증진 때문에 소수가 되든 다수가 되든 희생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셈이다. 희생된다는 것은 단순히 공리의 희생만이 아니라 자유의 희생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공리주의와 자유주의는 양립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즉 개인주의와 양립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사회는 개인의 합이며, 전체의 공리(功利), 즉 공리(公利)는 개인 공리의 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공리주의의 가정은 무너지게 된다.

게다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공리주의가 직관주의보다도 못하다는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이상의 선택에서 본 것처럼 공리주의 원칙을 적용하지 않고도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정책 B를 택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직관적인 판단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제창된 공리주의가 직관에 의한 판단보다 못한 경우가 있다는 것은 공리주의의 치명적인 허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반문과 공격에 대해 벤담이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벤담은 ‘모든 사람은 한 사람으로만 계산되며, 아무도 한 사람 이상으로 계산될 수 없다’고 밝혔다. 그가 이렇게 생각한 것은 사회는 개인으로 이루어진 가공체이며, 사회의 이익은 사회 구성원의 이익의 합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나타나는 ‘자기 우선의 원리’가 평등이나 사회 정의라는 가치를 무시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사실적인 명제로서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벤담의 원칙에는 다른 측면에서도 의문이 있을 수 있다. 난파당한 배에서 구명선을 남에게 양보해 자신을 희생시키는 인간도 있을 수 있다. 위의 예로 이야기하자면 갑과 을이 병의 입장을 고려해 스스로 정책 B를 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를 두고, 인간이 개인의 물질적인 이익을 넘어서, 혹은 고상한 동기에서 행동하며, 행동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한편, 그 행위가 겉보기에는 공리주의적이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그 밑바탕에는 자신의 행복을 더욱 증진시키겠다는 동기가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즉 갑과 을이 정책 A보다 정책 B를 택하게 되는 경우에 겉보기에는 자신의 공리를 증진시키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으나, 실은 남에게 관대하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자신이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사실적인 명제로서의 공리주의에서 이런 주장은 행복의 원칙의 동어 반복일 뿐이다. 즉 행복은 인간 행위의 동기가 되지만, 인간이 하는 행동을 보고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위의 예로 설명하면, 갑과 을이 정책 A를 택해도 행복이 증진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정책 B를 택해도 행복이 증진되었다고 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사실적인 명제로서의 공리주의는 허약한 기반에 서게 된다.

따라서 심리적인 원칙으로서 공리주의가 지속력을 가지려면, 인간은 개인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명제로 완화되어야 한다. 밀은 바로 이 점에 착안해 공리주의를 완화시켜서 사회 현상을 분석하는 데에 쓰일 수 있는 가정으로 만들었다.

즉 밀은 양적인 공리주의와 쾌락 측정 방법을 포기하고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질적인 쾌락을 고려했다. 즉 갑과 을은 단순한 물질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병이라는 다른 사람에 대해 배려할 수 있는 사회성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갑과 을은 정책 B를 택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됨으로써 갑과 을은 개체성뿐만 아니라 사회성도 가지게 되며, 사회에서의 평등이나 정의라는 가치를 앙양할 수 있는 존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갑과 을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가지는 존재가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밀은 이제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배부른 돼지보다도 더 낫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평등, 자유, 인권, 정의와 같은 가치를 우선적으로 충족시키는 공리주의로 수정한 것이다. 즉 물질적인 이익만을 강조하는 양적인 공리주의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존중하는 질적인 공리주의로 수정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밀은 개인의 평등과 사회의 공리에 대한 요구에 균형을 잡으려고 한 것이다.각주32)

밀의 생애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그가 벤담의 공리주의를 전적으로 신봉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낭만주의의 어떤 양상에 대해서 적어도 감정적으로는 기울어져 있었다. 그는 인간이 다른 형태의 쾌락을 어떻게 비교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다루었다. 두 가지 쾌락을 즐길 수 있는 인간이 하나를 택하고 다른 것을 버리는 경우에 우리는 택한 것이 버린 것보다 더 낫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어떤 인간은 다른 인간보다 지각이 있기 때문에 다른 유형의 쾌락이 가지는 문화적이며 도덕적인 질을 평가하는 데에 다른 이보다 더 탁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그는 문화적이거나 도덕적인 귀족이 확립되어 우수한 자가 다른 이를 위해 최선의 것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밀은 그렇게 주장하면서도 진보를 숭상했지만, 인간의 완전성에 대해 의심을 가졌던 이들처럼 이 문제를 애매하게 남겨두었다.

어쨌든 개인이 자신의 공리에 대한 판단자가 되면 사회 전체의 안녕은 개개인의 행복의 합에 불과하지 집합체로서의 질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제도는 그 제도가 개개인이 자신의 여건을 개선하려는 욕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주느냐에 따라 평가되어야 하는 ‘도구적인 가공물’에 불과하다.각주33) 이와 같이 공리주의는 밀과 그 후의 시즈윅에 의해 정치철학으로서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더욱 뚜렷하게 띠게 되었다. 개인이 선택과 도덕적인 판단에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게 된 것이다.각주34)

밀과 더불어 20세기의 공리주의자는 공리주의를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공리주의가 윤리학설과 정치 이론에 기여한 바도 많지만, 아직까지 근본적인 문제가 남아 있다. 공리주의라는 윤리학설은 좋은(이로운) 것을 하는 것은 옳다는 논지로 압축될 수 있다. 그런데 이롭다, 해롭다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비윤리적인 용어’다. 그래서 공리주의는 비윤리적인 것에서 윤리적인 것을 이끌어내며, 인간 행위의 도덕성을 그 결과로 판단한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민주주의적 자유주의와 정부 제도

밀이 철학적인 급진주의에서 받은 지적인 영향은 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적인 근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벤담의 《의회 개혁안(Plan of Parliamentary Reform)》과 제임스 밀의 《정부론(Essay on Government)》에서 찾을 수 있다. 정치의 목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이익의 일치를 확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악한 이익’, 즉 다른 사람에게서 분리된 이익이 존재한다는 것이 이익을 일치시키는 데에 방해가 된다. 특히 다수의 행복이 소수의 지배 계급의 사악한 이익에 의해 유린된다면 이는 적극적으로 막을 필요가 있다. 이제까지 있었던 귀족정은 약탈적인 지배자의 가장 좋은 예다.

이를 막는 방법은 ‘대의제도’로 전체 인민의 보편적인 이익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지배자를 민주적으로 견제하고 인민의 보편적인 이익이 널리 보급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이익을 일치시킬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 헌정을 개혁해 선거권을 확대해야 하며 가능하다면 보통 선거권, 즉 민주주의를 확립해야 하는 것이다.각주35) 위에서 설명한 배분에서 갑과 을이 항상 정책 A를 고수하면서 지배력을 행사하게 되면 그들은 사악한 이익을 대변하는 셈이다. 이를 막기 위해 약자인 병에게 발언권을 주어야 한다. 약자에게 발언권을 부여해 보편적인 이익, 즉 정책 B를 택하게 하는 제도가 대의제도인 셈이다.

다시 말하면 밀은 대의제도를 통해 보통 선거가 자주 있게 되고 비밀 투표가 행해지면 민주주의가 보장되며 이로써 이익을 일치시킬 수 있다고, 즉 정책 B로써 이익을 일치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밀이 민주주의를 옹호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즉 밀이 민주주의를 옹호하게 된 것은 자연권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며, 다른 정치 형태보다도 공화정에 근접하기 때문도 아니며, 민주주의가 개인주의와 자유를 보장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래서 밀과 그의 동료들은 급진주의자로서 귀족적인 정당에 대항하는 의회 정당을 생각하게 되었다. 귀족제를 반대한 이유는 귀족제에서는 이익을 일치시킬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회 정당이 민주주의적인 노선에 따라 헌정을 개혁한다는 일차적인 목표를 가지고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민주주의 대 귀족주의라는 것은 그들에게 근본적인 문제였다. 다른 문제는 부수적이거나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귀족과 인민 사이의 갈등이라는 사회의 실체를 반영하기 때문이다.각주36)

그러나 밀은 민주주의가 달성됨으로써 정치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지 않았다. 그래서 비례 대표제와 차등 투표제를 허용해야겠다는 발상을 가지게 되었다. 밀은 부패에 대한 방지책을 강구해야 된다는 데는 찬동하면서도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표들이 효율적인 정책을 제시하고 좋은 법을 만드는 데에 필요한 특별한 지식과 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의아해했다.

그는 정치를 의학에 비유했다. 환자는 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자신이 처방을 내릴 수는 없다. 환자는 의사와 상의한 후에 의사의 처방을 따를 것인지를 결정할 수는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치에서도 민주적인 인민은 주권적 권력을 행사하면서 정치적인 전문가가 제시한 처방을 채택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인민은 감히 문제에 대한 원인 규명, 즉 진단을 하고 처방전을 스스로 제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 일은 특별히 훈련을 받고 자격이 있는, 밀이 ‘교육받은 소수’라고 부르는 참으로 통찰력이 있는 소집단에 맡겨야 하는 것이다.각주37)

그런데 수적으로 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의 주장과 지적으로 최고의 자격을 갖춘 자들의 주장에는 긴장이 있기 마련이다. 밀은 이 긴장을 《대의정부론》에서 명쾌하게 분석하고 있다. 밀은 좋은 정부를 만드는 데에 거의 확실한 고안물로서 보통 선거와 다수결 원칙으로 선출된 민주적인 의회의 효용에 대해 점점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단순히 다수라고 해서 그들이 잘못되지 않고 옳은 경우가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중산층의 대부분은 우둔하며 돈벌이에 매달려 있다. 노동 계급은 무지하며, 정보도 별로 가지지 못하고 있다.

요컨대, 대표자를 뽑은 인민이나 대표자가 지적으로 평범하다. 게다가 그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가 한 계급의 이익에만 수응(隨應, response)해 계급 입법을 하지 않을까라는 우려를 표명했다. 즉 그들 자신의 잘못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정직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이렇게 보면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라고 해도 국가를 통치하고 입법하기에는 부적절하다. 따라서 밀은 투표권의 확장 등을 주장해 민주화를 이끌면서도 민주주의에 제동을 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수적인 다수에 대한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밀은 인민이 정부를 통제하는 것은 본질적이라는 점은 확신하고 있었다. 정부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다수가 대표되어야 하며, 이와 더불어 입법과 행정을 위해 소수의 지식과 지성도 필요하다. 그래서 밀은 정부에 소수와 다수, 모두를 끌어들일 것을 주장했다. 정부는 민주적이면서도 경험이 있고 숙련된 소수가 방향을 잡아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밀은 양자를 조합할 것을 주장했다.

토크빌의 영향을 받은 밀은 정치적 문제에 있어서 대립되는 견해를 유지시키는 것이 참으로 필요하며, 전문적인 지식을 적용할 수 있는 곳에는 그 지식을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대의정부론》에서 복잡한 문제에 대해 이 같은 해결책을 제시했다. 다수가 소수를 억누르는 것을 막기 위해 비례 대표제를 제안하고 무지한 사람이 식자층을 억누르는 것을 막기 위해 복수 투표, 즉 차등 투표제를 도입해 교육받은 사람이 추가 표를 던질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문맹자, 범죄자와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은 적어도 한 표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표를 가지게끔 한 이유는 모든 사람이 참여해 발언권을 갖도록 장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평등한 발언권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차등 투표제를 도입한 이상 발언권이 평등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이렇게 조정된 선거 제도가 현명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 의회는 법을 초안하고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입법 위원회로 하여금 필요한 것을 준비하도록 지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원은 지적인 엘리트에서 충원되며, 위원회의 목적은 법안을 제안하는 것이지 법을 제정하는 것은 아니다. 위원회가 제안한 법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인민의 통제라는 원칙도 지켜지는 셈이다. 이와 같은 조합은 투표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보통 선거에 전술한 차등 투표가 병행되어야 한다. 여기서 밀이 공개 투표를 제안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것은 이전에 주장한 비밀 투표와 배치된다. 공개 투표는 지적으로 우월한 자가 투표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다수로 하여금 사회적인 압력을 느끼게 하자는 데에 그 의미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전술한 것처럼 그는 소수가 그것도 특히 지적인 소수가 다수에게 억눌리는 것을 막기 위해 비례 대표제를 주장했다.각주38) 또한 그는 공무원이 어느 정도 독립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밀은 일인 일표, 즉 정치적인 민주주의를 지향하면서 이에 따른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소수 엘리트의 발언권을 고양시키려고 노력한 것이다.

밀은 대의제에는 다수의 수와 함께 소수의 지식과 지성이 갖추어질 필요가 있다고 강하게 확신했기 때문에 진정한 민주주의와 거짓된 민주주의를 구별했다. 진정한 민주주의는(그는 이것을 ‘민주주의에 대한 순수한 이념’이라고 불렀다)지적인 엘리트를 대변하며, 다수만큼이나 소수에 의한 정부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는 이 민주주의가 진실로 평등주의적이라고 여겼다.

반면에 거짓된 민주주의는 단순 다수에 의한 전체 인민의 정부다. 이러한 형태의 민주주의는 특권의 정부이지 평등의 정부가 아니다. 지식과 지성이 다수에게 짓눌려서 발언권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밀은 미국을 거짓된 민주주의의 예로 꼽았다. 수적인 다수가 전제적으로 지배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각주39) 밀의 고민은 사회를 다수의 지배에만 맡겨둘 수 없다는 데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소수에게만 의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밀은 이와 같은 민주주의의 결함을 해결해 인류가 진보할 수 있는 기틀을 열고자 한 것이다.

보수주의가 그에게 적이었다면 철학적 급진주의가 가지는 단순성도 마찬가지로 밀에게는 공격의 대상이었다. 밀은 노심초사해 달성하고자 했던 두 가지 사이에 균형을 이루고자 했다. 그 하나가 광범한 참여와 진보적인 정부였으며, 다른 하나가 지적이며 도덕적인 엘리트의 영향력이었다.

《자유론》에서도 다수의 전제에 대한 반대가 면면이 나타난다. 영국에서 오늘날과 같은 보통 선거제는 1926년에 확립되었지만, 당시 영국에서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그런대로 민주주의가 실시되고 있었다. 그리고 국가로부터의 자유라는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된 셈이었다. 밀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문제는 토크빌이 지적한 바 있는 대중의 전제였다.

즉 다수의 여론과 국민 정서가 가하는 전제로부터의 자유가 밀의 관심사였다. 이처럼 다수에 대한 우려가 그의 후기 작품에 면면이 나타나지만 평등주의적인 이상에 대한 그의 믿음은 《여성의 예속》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여기서 밀은 남자가 지적으로 우월하며 가부장적인 권위를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결국 민주주의는 다수뿐만 아니라 지적으로 개명된 지도자를 배려함으로써 조절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셈이다. 20세기 민주주의를 논할 때에 이 주장을 빠트릴 수가 없게 되었다.

어쨌든 밀은 자유가 허용되어야만 인간이 최대한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대의 정부와 개인의 자유를 유지하는 방법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즉 인간의 자유와 진보를 조화시키려는 노력에서 이상의 논의가 제기된 것이다.

정치경제학과 사회주의

밀은 《정치경제 원리》에서 자유와 양립 가능한 공정한 분배를 다루었다. 그 후 밀이 사소하게 의견을 바꾸기는 했지만 그 이론적인 구조는 본질적으로 리카도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문에서 그는 실제적인 문제에 연관시켜 이론적인 원칙을 제시하고, 이를 위해서 사회·윤리적인 문제를 보다 넓게 다루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밝히고 있다.각주40)

사회 계급 구조를 분석하는 데에 스미스, 리카도 그리고 밀이 경제적인 범주, 즉 지주, 노동자 그리고 자본가를 이용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밀은 노동 계층이 인구 과잉에 기여하지 않도록 하고, 지배 계급으로 하여금 제도를 개선하게 함으로써 보다 평등한 분배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정치경제학이라는 학문을 칼라일이 지칭한 것처럼 ‘음울한 학문(dismal science)’이라고 보지 않았다.각주41)

인구 과잉이 되지 않도록 노동 계층에 산아 제한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고전학파의 임금기금설에 근거를 둔다. “이 이론에 의하면 일정한 기간 노동자들에게 지불할 총임금이 일정한 크기로 정해져 있으므로 노동자 일인당 임금은 이 총임금을 총 고용 노동자의 수로 나눈 것과 같아진다.”각주42) 그렇다면 임금 기금이 증가하거나 인구가 감소해야만 임금률이 높아진다. 그래서 밀은 고용 기회를 낮출 수 있는 최저 임금제보다도 노동자의 산아 제한을 주장했다.

한편 밀은 〈정치경제의 정의에 대하여(On the Definition of Political Economy)〉에서 정치경제학은 부의 생산과 분배에 관여하는 것이지 부의 소비에는 관여하지 않으며, 정치경제학이 인간이 부를 소유하려는 욕망을 가진 존재라는 한정된 관점을 취한다는 것을 명확히 서술했다.각주43) 생산은 자연의 법칙에 의해 결정되지만 분배는 시대와 사회에 따라 변하는 사회 제도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정치경제 원리》에서 ‘생산의 법칙’과 ‘분배의 법칙’을 범주적으로 구분한다. 그는 생산의 법칙에는 보편 중력의 법칙처럼 자연의 물리적인 원칙이 적용되며, 반면에 분배의 원칙에는 상속세율을 정하는 것처럼 인공적인 힘이 가해질 수가 있으므로 이는 사회가 가진 법과 관습의 문제라고 보았다.각주44) 이렇게 구분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지대, 이윤, 임금 등에 관한 제도를 개선해 더 평등한 분배를 달성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각주45)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정치경제 원리》가 영국에서 사회주의를 꽃피우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밀이 사회주의자인가 아닌가라는 논란이 생기게 된다.

정치에서 단순다수결 원칙에 대해서 회의를 가졌다고 보면 밀은 어느 정도 보수적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다른 한편 사회주의에 대한 열망 때문에 밀은 보다 과격해졌다. 그는 1820년대에 생 시몽과 오웬을 만났다. 생 시몽은 사회를 기술적이며 사회주의적으로 조직하고자 했다. 그러나 밀은 시몽주의자와 오웬주의자가 품고 있었던 기대에 대해 회의를 가졌다. 그 후 1848년의 프랑스 혁명에서 사회주의자가 패배하는 것을 관찰하게 되고, 그리고 테일러가 준 자극으로 인해 그는 단서를 붙여서 사회주의를 옹호하게 되었다. 그는 미래에는 병폐가 없는 사유 재산 제도를 유지하면서 생산자의 협동조합이 있는 사회가 나타날 것으로 예견했다. 노동자가 자치를 하지 않고, 사용자와 노동자가 분열된 상황에서는 정치적 민주주의가 달성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밀은 〈노동의 주장(The Claims of Labour)〉에서 중앙집권화된 공산주의는 용납할 수 없지만 노동자가 임금을 받는 상태에서 벗어나 경영의 주체가 되는 것이 자신의 이상이라고 밝혔다. 이와 같은 취지에서 그는 사회주의가 도래하기 전까지 사유 재산을 보다 정당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을 제의했다. 그 노력이란 상속세를 도입하고, 지주가 소작인이 노력한 대가를 앗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 등이었다.

그런데 사회주의가 도래할 것을 밀은 어떻게 예견했는가? 그는 《논리학 체계》에서 ‘역의 연역법(逆演繹法, inverse deductive method)’을 설명하고 있다. 역의 연역법은 복잡다단한 사회 현상을 연역하기 어려운 경우에 우선 특정한 현상을 관찰해 귀납적으로 경험적인 법칙을 밝혀내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법칙에서 연역으로 검증하는 방법으로, 구체적인 연역법(concrete deductive method)과는 대치된다.각주46) 그런데 사회 상태는 보다 큰 사회적인 사실이나 현상의 동시적인 상태이며,각주47) 여기서 사회 현상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는 요인은 주어진 ‘사회의 상태(state of society)’의 조건 내에서 작동한다는 점을 그는 관찰했다.

그러므로 이 상태가 지배하는 법칙의 작동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면 분석도 불완전해진다. 그렇다면 인간 역사의 향방은 일반적인 법칙에 따르며 모든 사회 상태에 있어서 가장 근접한 원인은 그 사회의 바로 앞에 있었던 사회의 상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과학의 근본적인 문제는 어떠한 사회 상태가 다른 사회 상태로 연속되는 법칙을 찾는 것이다.각주48) 바로 이 점에서 진보로 향하는 역사 발전의 단계를 상정할 수 있다. 그런데 밀은 사회 진보의 지배적인 요소는 인간의 지식과 신념이라고 보았다.각주49)

여기에서 밀이 사회주의의 도래를 기대했다는 논지가 도출된다. 밀이 사회주의에 경도된 것은 사실이지만 기질상으로나 신념상으로 그는 유토피아 사상가는 아니었다. 시장 경제가 드러내는 결점이나 부정의보다는 통제받지 않는 국가의 폭정을 더 싫어했기 때문이다.각주50) 그리고 그가 택한 방법론적인 개인주의가 민주주의와 개인적인 자유에 대해 보루 역할을 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밀을 사회주의자로 치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각주51)

그러나 그를 사회주의자로 볼 수 있는 여지도 있다. 그는 역사의 진보를 염두에 두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다음 단계가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으며, 이에 대한 준비 조처까지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사유 재산 제도를 전면적으로 폐기하자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밀은 사회주의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점진적인 개혁을 목표로 하는 ‘보다 사려 깊고 철학적인 사회주의자’에 가까웠던 것이다. 요컨대, 당시 영국은 빈부의 격차를 겪게 되었으며,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려는 사회주의 운동이 전 유럽에 확산되었다. 밀은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틀 안에서 노동자의 빈곤을 해결하려고 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관용, 자유 그리고 진보

밀은 여러 가지 이유로 민주적인 다수에 대해 기꺼워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신념과 행위에 대한 관습적인 규범에 순응하지 않은 자, 즉 엘리트를 다수가 관용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즉 개체성(individuality)을 가진 자를 다수가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불관용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밀이 인간의 자유를 가장 감동적으로 옹호하고 있는 곳은 《자유론》과 《여성의 예속》이다. 밀이 이 주제를 다룰 무렵의 영국은 국가로부터의 자유라는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한 상태였다.

그러나 사회에서의 다수가 소수에게 가하는 억압이 문제가 되는 시점에 도달했다. 밀은 다수는 수동적이며, 모방적이며, 관습을 노예처럼 따르는 사람들로서 집단적으로 보아 평범한 이들의 모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각주52) 이에 다수의 압제, 즉 사회적인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유론》에서 다음과 같이 관용과 자유를 옹호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는 주장한다.

설사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한 전 인류가 꼭 같은 의견을 갖고 있고 단 한 사람만이 반대의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인류에게 그 단 한 사람을 무턱대고 침묵시킬 정당한 권리가 없는 것은 그 한 사람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전 인류를 무턱대고 침묵게 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은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On Liberty각주53)

밀은 이와 같이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토크빌의 ‘다수의 폭정’이라는 유명한 문구를 인용하며 개체성을 가진 이에게 다수가 자신의 관습적인 취향과 규범을 부과하려는 것에 반대했다.각주54) 즉 국가와 사회는 개인의 개성과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반대를 허용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사회에 가장 해로운 것은 도덕적이며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진리가 이미 알려져 있다고 믿는 것이다. 새로운 사상을 옹호하고 기존의 신념을 비판적으로 평가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진보가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상의 자유 시장(free market of ideas)’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토론의 장에서 각자의 견해를 개진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서 진리에 근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진리에 근접할 수 있으며, 진리가 활기를 띠게 되며, 그리하여 인류 사회에 진보가 이루어지게 된다.

자유와 관용(tolerance)을 허용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생각에 있다. 어떠한 시점에서 어느 누구든지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진리가 있을 수 없어서 현 시점에서의 잠정적인 진리를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유와 관용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각주55) 그리고 개인에게 자유와 관용을 허용하는 목적은 자아실현을 위한 개체성의 확립에 있다.

여기서 사상의 자유 시장은 시장에서 물품이 경쟁을 하듯이 사상이 경쟁을 통해 진리에 근접해 인류를 진보로 이끌게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점에서 혹자는 경쟁만을 강조하는 것은 협동은 배제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스미스도 그러했지만 밀도 《자유론》에서 경쟁과 협동이 본질적으로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라는 것을 명확히 밝혔다. 이렇게 볼 수 있는 다른 이유는 밀이 개체성뿐만 아니라 사회성도 강조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자유가 무제한일 수가 없다. 특히 행동의 자유는 ‘남을 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향유(no-harm principle)’할 수 있다. 반면에 사상과 표현(출판)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여기서 밀은 ‘아주 단순한 원칙 한 가지’를 옹호하고 있다. 즉 사회는 자체를 방어해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꺼워하지 않는 개인에게 타인의 의사를 강제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온정주의는 당연히 옳지 못하며, 도덕적인 입법도 절대로 온당하지 못하다고 보았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밀이 자유를 옹호하는 이유는 인간이 이 자유에 대해 자연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든가, 자유가 그 자체로서 본질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공리주의적인 근거에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자유가 진리에 근접하게 하고 그리하여 인류 사회에 진보를 가져오는 데에 유용하기 때문이다.

공리주의적인 근거에서 자유의 절대적인 입장을 옹호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자유에 대한 자연권(natural right to liberty)’이라는 근거로 밀이 자유를 옹호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근본적으로 도덕과 사회생활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금지하는 것은 방어적인 조처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주장에는 그는 부정적이다.

반면에 삶에 있어서 선을 얻으려고 노력한다면 생활에서 실험을 해야 하고 개인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긍정적이었다. 《여성의 예속》에서 그는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이 법적으로 낮은 지위에 놓여 있는 것을 비난했으나, 자유가 가지는 절대적인 가치를 찬양하는 것으로 끝맺었다. 즉 어느 나라도 번영을 얻기 위해 독립을 포기할 수 없으며, 자유를 향유해본 적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어떠한 대가를 치르게 되더라도 자유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을 위해 자유의 가치를 이 이상으로 논증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보면 밀을 관통하는 이념은 진보라고 볼 수 있다.각주56) 그리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오고 간 것도 인류의 진보를 모색하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밀이 자유를 중요시한 것은 자유 그 자체가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본질적인 가치를 가지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가 공리나 진보를 달성해주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자유가 없는 것이 인간에게 진보를 가져오는 것이 확실하다면 자유가 없는 사회를 밀이 선호하겠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자유에 도구적인 가치만 부여할 경우에 이러한 반문에 직면할 수도 있다. 물론 이 견해에 대한 논란은 지속되고 있다.

논리학

밀은 《논리학 체계》의 4장에서 ‘경험적인 법칙’은 ‘관찰의 한계 내에서 모든 경우에 사실이지만, 그 한계를 벗어나면 그렇다고 확신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연속이 되든 공존하든 제일성(uniformity)’이라고 정의했다.각주57)

밀은 1836년에 〈정치경제의 정의에 대하여〉를 쓰면서, 경제학에서 쓰이는 모든 일반적인 법칙은 경향에 대한 진술이며, 경제학은 연역적인 방법을 이용해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원칙에 도달하는, 본질적으로 추상적인 학문이라고 기술했다. 그러나 《논리학 체계》에서 그는 과학과 사회과학이 일반적인 과학철학으로서 연역법보다는 귀납적인 학파를 선호한다는 것을 명백히 했다. 두 가지 점을 옹호하자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각주58)

첫째, 사회과학은 가능하며 정치학, 경제학 그리고 사회학은 과학적인 연구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둘째, 어느 과학도 세계에 대한 필요한 진리를 발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과학이 이제까지 발견한 것은 사물이 어떠하다는 것이지 사물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두 번째 주장이 노리는 궁극적인 대상은 윤리적인 ‘직관주의(intuitionism)’다. 직관주의자는 도덕적인 진리가 필연적인 진리의 한 분과이며, 직관의 현시로써 진리라는 것이 증명이 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밀은 공리주의가 이러한 직관주의를 공격하면서 공리주의를 옹호한다고 보았다. 밀은 일생 동안 자신이 가진 편견이 세상에 대한 궁극적인 진리라고 인간이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보수적인 정치가 나타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한 나쁜 습관을 한 차원에서 공격하는 것이 《논리학 체계》와 〈공리주의〉이며, 우리에게 명확하게 보이는 것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데에서 나타나는 실제적인 결과를 공격하는 것이 《자유론》과 《여성의 예속》이었다.

이와 같이 밀은 귀납법을 옹호했지만, 사회과학의 적절한 방법으로 연역법을 옹호했다. 이는 선험적인 추론이 사후의 관찰 결과와 부합하는 경우에 사회과학의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콩트를 자주 언급하고 있다. 이로써 그가 실증주의에 찬동했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인 간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당시에 인간의 행위는 일반적인 법칙으로 정형화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었다. 이에 대해 밀은 이것은 도덕적인 행동이 제일성이 있는 법칙에 지배받는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에게는 매우 놀라운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보편적인 명제 혹은 법칙은 인과론적인 설명에 필수 불가결하다. 그렇게 되어야만 사회과학이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법칙은 직접적인 관찰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일반화가 아니다. 이는 이론적인 가설이며 이 가설로써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을 도출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밀이 과학화에 쓰는 방법은 개인주의적이다. 밀은 ‘방법론적인 개인주의(methodological individualism)’의 논지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사회 현상에 대한 법칙은 사회 상태에서 서로 결합된 인간이 가지는 행동과 열정의 법칙에 지나지 않으며,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 상태에서도 역시 인간이다. 행동과 열정은 개인이 가진 인간 본성의 법칙에 지배받는다. 인간이 모여 있다고 해서 다른 특성을 가진, 다른 종류의 실체로 변하지 않는다. 마치 수소와 산소를 합치면……사회에서의 인간은 개인의 본성이 가진 법칙에서 도출되고 이 법칙으로 분해될 수 있는 특성을 가진다.
A System of Logic각주59)

그는 이와 같은 방법에 의해 모든 학문은 지식에 대한 공통적인 철학에 의해 통합될 수 있으며 사회과학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절충인가, 진지함인가?

밀은 경제 질서로서의 자본주의가 야기하는 불공정한 분배와 정치 질서로서의 민주주의가 가할 수 있는 다수의 전제라는 문제를 해결해 공정한 분배와 자유를 결합하고자 했다.각주60) 개인과 사회 사이에 적절한 관계를 정립하는 데에는 사회적인 억압만이 아니라, 빈곤도 자유의 적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밀은 이 문제를 해결해 인류를 진보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주장의 논리적인 정당화가 필요하며, 사회 제도의 개선과 의식 수준의 향상과 이를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했다. 의식 수준의 향상과 교육을 강조한 것은 인간의 불완전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엘리트라는 소수와 대중이라는 다수 사이의 본질적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이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일관된 원리에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밀의 사상은 나쁘게 말하면 이것저것을 얽어놓은 잡탕 같으며, 좋게 말하면 절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게서 인간으로서의 진지한 면을 읽을 수 있다. 그가 인간을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진보하게 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데에 평생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밀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자유를 소중히 여기면서 이를 바탕으로 가치의 중심을 구명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삶이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개인이 자기 발전을 위한 노력을 추구함으로써 인간은 행복해지는 것이다. 정치·경제의 제도는 이를 위한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개인의 자유와 정의를 주장하고, 이익의 옹호와 정치적 참여를 통한 인간의 개선을 옹호하고, 심리학과 인간의 품성의 발전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인간의 진보에 대해 근본적인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유주의의 기본 원리를 명확하게 해, 민주주의적인 자유주의 내지는 진보적인 자유주의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하겠다.

더 읽을 자료

밀, 존 스튜어트, 《자유론》, 서병훈 옮김(책세상, 2005)
밀이라면 《자유론》을 연상할 만큼 《자유론》은 유명할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번역되었다. 밀의 시대만 해도 영국민들은 국가로부터의 자유라는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한 상태였다. 그러나 동료 시민들, 특히 다수의 압력이나 횡포로부터 개인이 자유로워지는 것은 당대의 과제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자유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 역설했지만, 자유가 진보를 위한 도구적인 가치만 가지는지에 대한 의문은 남아 있다. 그렇지만 인터넷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점점 획일화되어가는 현대의 사회에서 밀이 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되새겨볼 만하다고 하겠다. 개체성의 상실을 우려해야 할 필요는 아직까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근식, 《존 스튜어트 밀의 진보적 자유주의》(기파랑, 2006)
이 책은 밀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간행되었다. 학자들은 밀을 두고 자유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하고, 심지어는 사회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밀을 진보적 자유주의라는 측면에서 파악하고 있다.

저자는 밀의 전 작품에서 나타나는 일관된 주장을 추려냄으로써 그 근거를 마련했다. 이를 위해 저자는 밀에게서 찾을 수 있는 진보주의, 공리주의, 자유주의 그리고 사회주의가 주장하는 바를 적시하고 있다. 자유의 옹호와 빈곤의 탈피에 같은 비중을 둠으로써 밀이 택하게 된 절충주의와 개량주의는 오늘날의 한국인들이 배워야 할 점이기도 하다. 지성인으로서는 밀의 분별 있는 양식을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것은 일깨워주고 있다.

조순 외, 《존 스튜어트 밀 연구》(민음사, 1992)
이 책은 경제사상연구회에서 밀의 사상을 자유주의, 사회 진보와 복지, 사회 개혁, 정부의 경제적인 역할, 화폐와 통화 정책, 조세, 농업경제, 사회주의 등 여러 가치 측면에서 연구한 결과물이다. 단순히 밀의 사상을 당대의 의미로 파악하자는 데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밀의 사상이 가지는 현대적인 의미를 음미하고, 나아가 한국의 사정과 결부시켜서 논하고 있다.

한국이라는 국민 국가의 건설과 발전 과정에서 지성인의 역할, 밀의 개혁 사상에 담겨진 도덕주의가 가지는 의미, 규범적인 목표를 설정한 이후에 이에 접근하는 사회과학적인 방법, 이에 따른 단계별로의 체제의 전환 등을 논하고 있다. 경제학자들의 저서이기 때문에 한국 경제의 향방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하겠다.

토머스, W., 《존 스튜어트 밀 : 생애와 사상》, 허남결 옮김(서광사, 1997)
역사학자 토머스(William Thomas)가 밀의 생애와 학문을 날카로운 필치로 요약, 소개하고 있는 옥스퍼드 대학의 시리즈 중의 하나다. 저자는 제1장에서 밀의 성장과 교육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 제2장에서 밀이 겪었던 정신적 위기와 그 후에 나타나는 지적인 차이를 드러냄으로써 밀에 대해 균형 잡힌 평가를 하기 위해서였다. 제3장에서는 《논리학 체계》를 중심으로 사회과학에 임하는 밀의 방법론을 다루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그의 정치경제학이 어떠한 면모를 띠는지를 제4장에서 고찰하고 있다. 끝으로 제5장에서 자유주의의 교사로서의 밀을 평가하고 있다. 철학자가 아니라 역사가가 쓴 밀에 대한 입문서로 권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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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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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Hamburger, Joseph, “Mill, John Stuart”, S. M. Lipset (ed.), The Encyclopedia of Democracy, vol. III(Washington, D. C. : Congressional Quarterly Inc.. 1995)
  • ・ Mill, J. S., The Subjection of Women, Susan M. Okin (ed.)(Cambridge : Hackett Publishing Co., 1988)
  • ・ Mill, J. S.,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with Some of their Applications to Social Philosophy, Sir William Ashley·New Jersey (eds.)(Fairfield : Augustus M. Kelley Publishers, 1909)
  • ・ Mill, J. S., On Liberty, Currin Shields (ed.)(Indiana : Bobbs-Merrill, 1956)
  • ・ Mill, J. S., A System of Logic(London : Spottiswoode, Ballantyne & Colchester, 1970)
  • ・ Mill, J. S., Utilitarianism and On Liberty(New York·Garden City : Dolphin Books, 1961)
  • ・ Okin, S. M., “Editor’s Introduction”, John Stuart Mill, The Subjection of Women(Cambridge : Hackett Publishing Co., 1988)
  • ・ Ryan, Alan, “Mill, John Stuart”, David Miller (ed.), The Blackwell Encyclopaedia of Political Thought(Oxford : Basil Blackwell, 1987), 339~342쪽
  • ・ West, H. R., An Introduction to Mill’s Utilitarian Ethics(Cambridge : CUP, 2004)
  • ・ Willcox, W. B.·Walter, L. A., The Age of Aristocracy ; 1688~1830(Lexington : D. C. Heath and Co., 1983)

이종은 집필자 소개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거쳐 같은 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켄트 주립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민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재직하고 있다. ⟪정치철학⟫을..펼쳐보기

출처

서양 근대 정치사상사
서양 근대 정치사상사 | 저자강정인 외 | cp명책세상 도서 소개

'계간 사상' 1999년 봄호부터 2003년 봄호까지 '서양 근대사상의 이해'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글 16편을 수정 보완한 것으로, 서양 정치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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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J. S. 밀서양 근대 정치사상사, 강정인 외,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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