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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양 근대
정치사상사
민주주의에 반하는 자유주의

F. P. G. 기조

F. P. G. Guizot
요약 테이블
출생 1787년
사망 1874년
대표작 《1810년의 예술과 살롱의 상황에 대해(De l’état des beaux-arts et du Salon de 1810)》
F. P. G. 기조( F. P. G. Guizot)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이다.

ⓒ Jehan Georges Vibert/wikipedia | Public Domain

망각에서 부각으로

19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기조(F. P. G. Guizot, 1787~1874)는 우리에게 무척이나 낯선 이름이다. 동시대의 프랑스 정치사를 엿보면서 7월 왕정과 관련하여 들을 수 있는 이름은 아마도 티에르(L.-A. Thiers)일 것이다. 티에르는 7월 왕정 이후 제2공화국, 제2제정, 파리코뮌, 제3공화국의 성립까지 19세기 프랑스 정치사에서 사라지지 않고 정치력을 발휘한 인물이다. 티에르는 마르크스에 의해서도 대표적인 부르주아 정치인으로 지목되었고, 19세기 정치사에서 역시 대표적인 자유주의 정치가였다. 반면, 기조의 사상은 당대는 물론 최근의 프랑스 사회에서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기조에게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20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약화되면서 정치적 자유주의가 부흥한다. 이때 사회경제사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정치사와 문화사는 19세기 자유주의의 정치철학과 역사학을 새롭게 조명했다. 단순히 정치 제도나 정치가들의 행태를 분석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정치철학적 담론의 흐름을 추적하는 지성사적 방법을 통해 19세기의 ‘정치적인 것’을 발견하려는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새롭게 부각된 정치사상가 중 한 명이 바로 기조다.각주1)

‘정치적인 것’을 사고하는 것으로서 정치사상과 역사(학)의 시각에서 본다면 당연히 티에르보다 기조를 더 주목해야 한다. 당시의 프랑스 사회는 프랑스 혁명 이후 새로운 정치 제제를 요구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주의를 정치 체제이자 사회 제도로서 확립하려 한 기조의 행보는 프랑스 자유주의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특히 이 시기에 확립된 자유주의가 이후 프랑스 사회의 특성을 규정하게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기조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기조를 중심으로 프랑스 자유주의의 독특한 흐름을 형성한 집단인 독트리네르(Doctrinaires)의 이념은 나폴레옹 몰락 이후 왕정복고 시기(1815~1830)에 철학적·정치적 기반을 조성하고 이후 루이 필리프의 7월 왕정(1830~1848) 속에서 실현되었다. 하지만 기조는 오랫동안 잊힌 사상가였다. 반 세대가량 후에 등장한 토크빌이 민주주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면서 자유주의적 처방을 부여하려 했다면, 기조는 철저하게 민주주의를 부정하면서 자유주의 사상을 확대하려 했기 때문에 민주주의 시대인 오늘날 그가 잊힌 것이다. 비록 1848년 혁명은 토크빌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제3공화국(1875~1940) 중반의 복지 국가적 길을 걷게 되는 프랑스는 기조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 기조를 망각으로부터 건져 올린 것은 20세기 말에 와서 전개된 ‘민주주의의 위기’나 ‘대의제(représentation)의 위기’라는 상황이었다. 실업자, 외국인 등의 문제가 무엇보다 부각되고 있는 현재 프랑스 사회에서 정치는 더 이상 일상의 삶을 충분히 대의(représenter)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기존의 정치적·사회적 메커니즘으로부터 ‘배제(exclusion)’의 문제가 발생하고 그것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는 인식이다.각주2) 따라서 대의제 개념을 정교하게 다듬는 것이 요구되고 있으며, 이는 국가의 새로운 역할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기조의 사상, 특히 기조 특유의 대의제와 국가 개념은 기존의 개념을 비판하는 동시에 새로운 모색을 위한 계기를 마련해준다.

기조의 부각은 최근 정치사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정치 문화(la culture politique)’라는 개념이 새롭게 정립되면서 더욱 두드러진다. 여기서 정치 문화란 단순히 기존 발전론의 시각에서 정치 발전을 위해 요구되는 시민 의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의 공통적인 사고, 행위 양식”으로서 “사회 집단의 구성원들에 의해 내재화된 가치 평가의 규준, 표상 등”을 지칭한다.각주3) 사회 속에는 다양한 이미지, 상징, 사고, 전통, 의식 등이 존재하고 그것들이 결합하고 대립하는 가운데 다양한 문화가 형성된다. 정치 문화는 이러한 문화 가운데 집단행동, 권력의 정당한 형태, 사회적인 것들의 구조화 방식을 결정하는 일종의 가치 체계이자 표상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경향을 지닌 정치 문화 속에서 프랑스는 개인의 자유보다는 국가에 의해 보호되는 자유를 강조하는 독특한 자유주의의 흐름을 발전시켜왔다. 이는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국민에 의한 국가 권력, 국민의 일반의지를 실현하는 국가 권력이라는 관념을 확립해온 역사적 기억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중심에 기조의 사상이 놓여 있다. 어쩌면 가장 대립적으로 보일 수 있는 루소와 기조가 공존할 수 있는 것은 프랑스의 독특한 정치 문화 때문일 것이다.

생애와 배경

기조는 1787년 10월 4일 프랑스 남부의 님에서 태어났다.각주4) 당시 프랑스에서는 가톨릭이 우세했지만 기조의 집안은 목사인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프로테스탄트였다.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프랑스 혁명 당시 지롱드당의 정치가로 활동하다가 공포 정치 시기에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종교적·정치적 배경은 기조의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혁명이 진정되면서 기조는 어머니를 따라 제네바에 가서 교육받았다. 기조가 나중에 회고하듯이 제네바는 그에게 ‘지적 요람’이었다. 프로테스탄트의 도시인 제네바에서 그는 라틴어, 그리스어 등의 다양한 언어를 배우고 철학 수업을 받으면서 지적 훈련을 했다.

1805년에 기조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파리의 법대에 진학했다. 그러나 기조는 법학보다 아랍어 등의 외국어와 철학, 역사, 소설 등에 심취했으며, 파리의 살롱들을 출입하면서 지식인과 정치가, 언론인과 친분을 쌓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프리메이슨단에 가입하고, 나폴레옹의 제정 시기 살롱에서 공론을 주도하던 샤토브리앙(F.-A.-R. de Chateaubriand), 스탈(Staël) 부인, 뱅자맹 콩스탕 등과 접촉했다.

기조가 최초로 얻은 직업은 《공론가(Publiciste)》라는 잡지에 글을 쓰는 일이었다. 이후 그는 본격적인 저술과 번역, 잡지 창간 등 ‘공론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최초의 저서인 《1810년의 예술과 살롱의 상황에 대해(De l’état des beaux-arts et du Salon de 1810)》를 쓰고, 기번(Edward Gibbon)의 《로마제국 흥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를 번역하기도 했다. 이러한 적극적인 활동에 힘입어 1812년에는 제국 대학의 ‘근대사’ 교수가 되었다.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등장한 왕정복고 시기에 기조는 국왕과 국민의 새로운 계약을 내용으로 하는 《헌장(Charte)》을 작성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그는 심혈을 기울인 《헌장》이 지켜지도록 극우 왕당파(ultras)에 대항해 자유주의자로서 정치적 능력을 발휘했다. 또한 내무 장관의 자문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복고된 왕정이 구체제의 절대군주제가 아니라 《헌장》을 준수하는 영국식 입헌 군주제로 정착되도록 노력했다. 1817년에는 루아예-콜라르(P. P. Royer-Collard), 쿠쟁(Victor Cousin), 레뮈자(Ch. de Rémusat), 비랑(Maine de Biran) 등과 함께 프랑스 자유주의자 집단인 독트리네르를 결성했다. 독트리네르는 1820년 베리 공작(duc de Berry)의 암살 이후 극우화되는 왕정에 대항해 입헌 군주제와 자유주의적 원칙을 고수할 것을 주장했다.

1820년 기조는 소르본 대학에서 근대사 강의를 재개하면서 정치에서 물러나 연구 활동과 저술에 몰입했다. 《프랑스 정부와 현 내각(Du gouvernement de la France et du ministère actuel)》(1820), 《음모들과 정치적 정의(Des conspirations et de la justice politique)》(1821), 《프랑스 현 상황에서 정부와 야당의 수단들(Des moyens de gouvernement et d’opposition dans l’état actuel de la France)》(1821), 《정치적 사형에 대하여(De la peine de mort en matière politique)》(1822) 등이 이 시기의 저작이다.

유럽에서 대의제 정부의 기원을 추적한 그의 강의록이 《프랑스 역사에 대한 에세이(Essais sur l’histoire de France)》(1823)와 《영국 혁명사(Histoire de la Révolution d’Angleterre)》(1826~1927)로 출간되기도 했다. 한편 그는 1817년에 《철학, 정치학, 문학지(Archives philosophiques, politiques et littéraires)》, 1824년에 《지구(Globe)》, 1827년에 《프랑스 잡지(Revue française)》를 창간해 정치적·이론적 작업을 수행했다. 1828년 기조는 유럽 문명사에 대해 강의했는데, 이때 그의 수강생 중에는 토크빌이 있었다.

기조는 1830년 다시 극우 왕정에 대항하는 자유주의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 의회는 1830년 7월 혁명과 함께 해산되었으나, 이때 성립된 7월 왕정은 기조에게 자신의 정치사상을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7월 왕정에서 기조는 내무부 장관, 교육부 장관, 외무부 장관, 수상을 역임하면서 독트리네르의 자유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흔히 ‘전형적인 금권 정치’ 혹은 ‘납세자 정권’이라고 평가되는 7월 왕정이 1848년 혁명으로 몰락하면서 이 시기를 주도했던 기조 역시 정치적으로 또한 사상적으로 몰락했다. 기조는 런던으로 망명했다가 루이 나폴레옹의 등장과 함께 다시 파리로 돌아오지만 정치적 장에서 밀려나 있었다.

기조의 생애는 언론인으로서, 학자로서, 정치가로서 프랑스 정치에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삶이었다. 그의 저작들은 역사적 혹은 정치적으로 의미가 있지만, 정치적 상황에 적절하게 개입하는 팸플릿의 성격도 갖고 있었다. 자유주의자로서 기조는 전통적으로 여론을 주도해온 살롱에 출입하면서 자신의 의사를 개진하는 한편 새로운 공론의 장으로 떠오른 잡지에 글을 실으면서 ‘이성적인’ 여론의 형성을 주도했다. 이처럼 현실과의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 ‘비판적인’ 동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기조의 삶은 프랑스 지식인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프랑스 학술원(Académie française) 회원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1858년에서 1867년 사이에 8권으로 된 《나의 시대 역사에 도움이 되는 회고록(Mémoire pour servir à l’histoire de mon temps)》과 기독교에 관한 몇 권의 책을 저술했다. 제2제정 말기 자유 제정(Empire libéral)(1869년 권위주의적 제정이 자유주의적 조치를 수용하는 방식으로 자유주의자들과 타협한 정치 형태)으로의 전환 속에서 그는 다시 한번 재기를 노리지만 그것은 오히려 정치적인 악수(惡手)였다. 1870년 제정의 몰락과 함께 자유 제정에 찬성했던 이들이 정치적으로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1874년 기조는 딸 앙리에트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죽기 전까지 그는 ‘어린이에게 들려주는’ 《프랑스 역사》라는 5권으로 구성된 책을 썼다.

1850년대 F. P. G. 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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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주권론’과 대의제

1789년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 이후 입헌 군주제에 대한 시도, 산악당(Montagnard)에 의한 공포 정치(1793), 테르미도르(1795)와 그에 이은 나폴레옹의 전제정 그리고 다시 왕정복고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모두에게 강박 관념처럼 자리 잡은 문제는 ‘혁명을 끝내는’ 것이었다. 7월 왕정에서 독트리네르와 기조 역시 ‘혁명을 끝내야 한다’는 의지 속에서 새로운 프랑스를 만들고자 했다. 테르미도르 이후 프랑스 자유주의자들은 공포 정치를 가져온 원인이 인민 주권 혹은 국민 주권 개념에 있다고 판단했다. 혁명 시기 동안 인민 주권은 하나이며 분할될 수 없다는 루소의 원칙,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보댕의 주권 개념이 근거가 되었는데, 이는 특히 산악당 공포 정치의 동력이었다. 즉 입법부, 나아가 그 중심에 있었던 공안위원회를 인민 자체와 동일시함으로써 인민의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했던 것이다.각주5)

산악당을 비판한 지롱드당(콩도르세와 브리소(J.-P. Brissot)가 대표적이다)은 입법부의 권력을 제한하고 감시할 제4권력으로 ‘감시와 공론 권력(le pouvoir de surveillance et d’opinion)’을 제안했다. 혁명 기간 동안 가장 큰 대립의 축은 봉기의 정치라는 형태로 등장했던 직접민주주의와 그러한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제도적 혹은 절차적 방식으로 한계 지으려 했던 움직임 사이에 존재했다. 하지만 두 흐름 모두 동일하게 인민 주권 혹은 국민 주권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논리를 전개했고, 주권의 단일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따라서 인민 주권을 실현하는 입법부를 견제하는 또 다른 주권 기구를 만들 수는 없었다.

테르미도르 이후 자유주의자들의 강박 관념은 거리의 민주주의를 공적인 제도의 틀에 묶어냄으로써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들 중 시에예스와 콩스탕은 공포 정치를 낳은 단일하고 절대적인 권력을 제한하고자 했다. 시에예스는 공포 정치 이전 지롱드당의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입법부 권력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일종의 ‘헌법 배심원제(jury constitutionnaire)’를 제안했고, 콩스탕은 개인의 권리를 강조함으로써 주권의 한계를 명시하려 했다.각주6) 하지만 이러한 자유주의자들의 노력 속에서 주권 자체에 대한 문제는 제기되지 않았다.

기조는 주권론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를 시도했다. 이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기조의 평가에서 두드러진다. 기조는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처럼 1789년의 원칙을 프랑스 문명의 지속적인 근간으로서 수용한다. 하지만 1793년의 공포 정치와 인민 주권은 혁명 원칙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고 비판했다.각주7)

기조는 왕정복고 시기에 등장한 보날드(L.-G.-A. Bonald)의 신성 주권론 역시 거부했다. 그가 인민 주권과 신성 주권 모두를 거부하면서 제시했던 것은 이성의 주권이었다. ‘혁명을 끝내는’ 것은 바로 1789년의 원칙을 정화해 그것이 가져온 자유와 평등을 새로운 프랑스의 원칙으로 확립하는 것이며, 중앙집권과 단일성의 원칙에 근거한 근대 프랑스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루아예-콜라르가 강조한 것처럼 “혁명은 개인들을 남겼기”에 이제 새로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질서와 자유를 화해시키면서 개인들을 결집하고 통합하는 것이었다.각주8) 즉 1688년 명예혁명으로 영국에 입헌 군주제가 도입되었던 것처럼, 1830년 7월 혁명을 통해 프랑스에 입헌 군주제를 실현하는 것이었다.각주9)

1789년의 원칙을 정화하기 위한 기조의 첫 번째 노력은 이 원칙의 기반인 인민 주권론을 제거하고 자신의 ‘이성의 주권론(la souveraineté de la raison)’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루소의 인민 주권론과 보날드의 신성 주권론은 주권의 실체로서 동시에 그것의 소유자로서 인민(실제는 인민이라는 이름을 가진 특정한 정치적 집단)혹은 군주를 상정함으로써 공포정치나 절대왕정, 즉 전제정(despotisme)을 낳았다. 인류의 역사는 신이든 다른 무엇이든 일종의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자신의 주인으로 섬겨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각주10) 기조는 이성의 주권은 누구도 소유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권력이 놓이는 장소는 일종의 ‘빈 공간’이 되는 것이다.각주11)

주권은 그 누구도 소유할 수 없으며 선험적으로 주어지지도 않는다. 정의와 법, 이성에 대한 ‘의식’은 종종 ‘희미한 형태’로만 존재하지만, 어떠한 폭정에 대해서도 대항해왔을 정도로 강력하다. 여기에서 기조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실제로 진정한 인간의 법, 정의, 이성은 인간의 외부 즉 신에게만 존재한다는 점이다. 단지 인간은 그것을 수용할 뿐이다. 정의와 이성은 사회 속에 흩어져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을 확립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이로부터 기조의 대의제 정부론이 유추되었다. 대의제 정부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해 기조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그것은 사회 속에 흩어져 있는 모든 정당한 권력의 요소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즉 공적인 이성, 공적인 도덕을 집중시키고 실현해 실재의 권력으로 확립하는 것이다.”각주12)

기조에게 대의제 정부는 사회 구성원의 의지를 헤아리고 수집하는 산술적 기제가 아니다. 대의제의 과정은 결코 “개인의 의지(les volontés individuelles)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며”각주13) 그것은 진리, 이성이 권력으로 형성되는 과정이다. 즉 “사회로부터 그 사회가 지니고 있는 모든 이성, 정의, 진리를 추출해 정부에 적용하는 것이다”.각주14) 대의제의 과정은 사회에 산재하는 권력의 정당한 요소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현실적인 권력으로 조직화하는 작업이다. 이성은 이 과정을 통해 주권자로서 확립된다.

대표되어야 할 요소가 개인의 의지가 아닌 이성이라 함은 사회 구성원의 의지의 표상으로서의 보통 선거에 대한 반정립이었다. 즉 기조는 “의지(volonté)의 대의 체계에서 (선거권에 대한) 어떠한 제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각주15) 왜냐하면 “모든 인간에게 의지는 존재하고” 보통 선거 체제는 모든 인간에게 “평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성은 결코 모든 개인에게 동일하게 배분되지 않으며 평등하게 드러나지도 않는다. 따라서 선거권은 이성을 갖춘 ‘능력 있는 시민(citoyen capacitaire)’에게만 부여된다.

한정된 개인의 이성적 능력만을 인정하는 이성의 주권론을 중심에 둔 기조의 자유주의는 결코 개인의 자유의 문제나 자율의 문제를 추적하지 않았다. 독트리네르가 상정하는 이성은 개인은 접근할 수 없는 초월적인 이성이었다. 공식적으로 독트리네르의 철학적 기반을 제공한 것은 쿠쟁이다.각주16) 쿠쟁은 이성에 대한 절대적이고 비인간적인 개념을 확립했다. 결코 코기토는 이성에 도달할 수 없으며, 단지 특수한 의견이나 감성만을 발산할 수 있을 뿐이다. 기조 역시 “인간 사회의 진정한 법칙은 인간 자체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은 그것을 수용하고 그것에 복종할 뿐이다. 그것은 인간의 외부에, 그리고 상위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각주17)

따라서 대의제 정부는 인간 사회의 법칙에 대한 불완전한 인식을 가진 개인들 사이의 의견과 감성 속에서 그것들을 찾아내고 종합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나아가 그 결과물을 불완전한 개인들에게 알리고 계몽함으로써 인간 사회의 법칙을 실현하는 임무를 갖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인간 사회의 법칙의 인식이 한 개인이나 특정 집단에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실제 역사적으로 그것은 인민 주권 혹은 신성 주권의 이름으로 행해지곤 했다)전제정으로 귀결된다고 판단했다. “진정한 주권론은 모든 형태의 절대 권력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이며, 그것은 바로 대의제 정부의 원칙”이다.각주18)

기조는 파스칼(Blaise Pascal)의 말을 인용하면서 대의제 정부와 사회의 관계를 설정했다. “단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다수는 혼돈이고, 다수이지 않은 단일성은 폭정이다.”각주19) 여기에서 다수는 사회를 의미하고 단일성은 진리 즉 사회를 통치하는 정의와 이성의 총체였다. 대의제 정부의 목적은 “다수에 단일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수용하게 함으로써” 이러한 “폭정과 혼돈을 막는 것이다”.각주20)

어떠한 인간이나 집단도 이성과 진리를 총체적으로 또한 절대적으로 소유하거나 인식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기조에게 대의제 정부는 하나의 수단이자 일련의 과정으로서 존재하는 것이었다. 즉 대의제 정부 자체는 통치 집단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으로서, 정치적 기제로서 간주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소유할 수 있는 주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주권론은 ‘단일하고 분할될 수 없다’는 보댕 이래 루소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을 지배했던 전통적인 주권 개념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였던 것이다.

공개성의 원칙과 언론의 자유

이성의 주권론과 그에 따른 대의제 정부론은 현실 정치 제도에 직접적으로 언론의 자유, 권력 분립, 토론의 공개성(publicité)의 원칙 등으로 나타난다.각주21) 특히 공개성의 원칙은 이성의 주권을 실현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으로 제시된다.각주22) 기조에게 대의의 과정은 사회 속에 산재되어 있는 이성과 진리를 파악하는 하나의 ‘인지적 과정’으로 인식되므로, 공개성의 원칙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인지적 과정을 실현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된다. 공개성은 정부와 공론 사이의 의사소통의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매김된다. 지리적으로 인구학적으로 확대된 근대 사회에서 “시민들은 언론에 의해서만 의사소통할 수 있으며, 권위는 언론을 통해서만 시민들로부터 의사를 수렴할 수 있고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게 된다”.각주23) 권력과 사회 사이의 의사소통은 공개성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즉 공개성이 공론장을 형성한다.

공론의 중요성이라는 면에서 기조 등의 독트리네르는 ‘언론의 자유’를 중시한다. 하지만 언론의 자유는 단순히 개인적 자유나 자연적인 능력의 차원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 상태의 요소”로서 “통치의 수단”이자 “사회적 필요성의 표현”으로서 이해된다.각주24) 대의제 정부가 사회의 이성을 발견해내는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면 사회 의식의 현실적 상태를 읽어내기 위한 언론의 역할은 더욱더 강조된다. 자유로운 언론의 활동을 통해 공론이 활성화되고 공적인 시민 의식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각주25) 언론의 자유의 필요성과 그에 따른 공적인 시민 의식의 활성화를 강조함으로써 기조는 국민의 삶이 물리적인 삶 즉 부와 물질적 향유에 한정되지 않아야 함을 강조한다. 대의제 정부가 찾아야 할 이성은 공적인 시민 의식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대의의 과정이 이성을 파악하는 인지적 과정으로 이해되고 이 과정에서 공론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기조에게 선거의 의미는 기존의 방식과 달라진다. 즉 선거는 대의의 과정이 아니라 인지적 과정의 하나일 뿐이게 된다. 따라서 선거는 권리(droit)가 아니라 기술적인 의미만을 지니는 것으로 간주되어 선거권의 확대 요구를 회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헌법상으로 보통 선거를 확립한 대혁명 시기에는 선거가 시민의 권리이자 유일한 대의의 과정으로 인식된 데 비해 기조는 선거와 대의의 과정을 분리하면서 선거권을 단순한 대의 과정을 위해 채용되는 하나의 기술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7월 왕정 시기에 선거권을 부여받는 시민이 극히 한정되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때 선거권을 가진 시민은 ‘능력 있는 시민(citoyen capacitaire)’으로 불렸다. 이것은 대혁명 시기에 철저하게 납세 능력에 따라 ‘능동적 시민(citoyen actif)’과 ‘수동적 시민(citoyen passif)’을 구분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기조는 ‘능력(capacité)’을 “이성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자격(faculté)”이라고 정의했다.각주26) 이미 언급했듯이 이성이나 진리는 개인이나 집단이 소유할 수 없으며, 개인은 다만 그것을 부분적으로 알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기조가 말하는 능력은 이성의 질서와 인간 행위의 질서가 만나는 지점이 된다.각주27)

능력을 가진 사람은 특정한 권리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봉사자로서의 기능을 갖는 것일 뿐이다. “선거의 목적은 가장 능력 있고 가장 신임할 수 있는 사람을 국가에 보내는 것이다.”각주28) 즉 선거는 권리가 아니라 기능으로 간주된 것이다.각주29)

공개성의 원칙과 언론의 자유를 강조함으로써 공적인 시민 의식의 활성화를 요구한 기조는 선거를 정치적 참여나 시민적 평등의 문제가 아니라 철저하게 기능의 측면에서 사고했다. 또한 그 기능에도 최소한의 의미만을 부여했다. 기조는 형식적인 투표가 단지 “사회적 생활의 무기명의 문자”일 뿐이라며 그 의미를 축소한다.각주30) 투표라는 행위는 어떤 책임감도 부여받지 않는 개별적인 행위일 뿐이다. 기조에게 보통 선거는 미래에 이루어져야 할 당위적인 사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보통 선거는 문명 발달 수준이 낮거나 정치적 경험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소규모의 정치체에서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각주31) 따라서 근대 사회에서는 보통 선거는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언론의 자유의 확대와 공개성의 원칙에 따라 형성된 공론장에서의 정치적 의사소통을 통한 대의의 과정이 보다 본질적인 것이 된다.

사회적 조직자로서의 국가

1843년 3월 2일 의회에서 기조는 다음과 같이 연설한다. “여러분의 권리를 이용하십시오. 깨우치십시오. 부자가 되십시오. 프랑스의 정신적 조건을 개선하십시오. 바로 이것들이 진정한 개혁입니다. 바로 이것들이 우리의 힘찬 운동과 국민의 진보에 만족을 주는 것들입니다.”각주32) 이처럼 ‘부자가 되라’고 연설하면서 재산에 의거한 선거권의 제한을 주장한 그는 지속적으로 부르주아 계급의 권력을 옹호한 인물로 간주되었다. 그가 강조한 계몽과 정신적 조건의 개선의 필요성은 잊혔다. 그러나 부르주아를 위한 부의 축적과 함께 인민의 계몽은 그의 정치사상의 한 축을 형성한다. “자유롭기를 원하는 나라는 계몽되어야” 했다.각주33) 초등 교육과 국가에 의한 공교육의 필요성 등은 사회 질서 확립이라는 기조의 정치적 원칙 속에서 강조되었다.

대의제 정부를 통해 구성된 국가는 사회의 형태를 규정짓고 제도화하는 조직자로서의 역할을 맡는다. 프랑스 혁명은 중세의 봉건적 굴레를 제거하면서 사회 속에 개인들을 만들어냈지만, 그것은 동시에 사회의 해체 과정이기도 했다. 기조를 비롯한 독트리네르는 이제 국가가 개인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하고 나아가 그들의 자유를 실현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기조는 근대 사회의 커다란 문제로 떠오른 것이 바로 ‘정신의 정부(gouvernement des esprits)’임을 강조했다. “공적 교육을 진정으로 국민적인 것으로 만들고 국가의 중심인 정부가 그것을 지도하게 하는 것”이 교육 개혁의 핵심적인 사안으로 제시되었다.각주34)

공적 교육을 통한 국민정신과 습속의 교화는 위에서 지적한 대의제 정부의 실현을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즉 일종의 공론의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것이다. 대의제 정부는 “정부와 시민들 사이 그리고 사회의 다양한 계급 사이에 형성된 정신적 평등과 습속의 공동체”에 근거해야 한다.각주35) 기조는 언론의 자유를 옹호하고 그것을 통한 공론의 활성화를 주장하면서도, 그것이 정부의 지도하에 이루어져야 함을 분명히 했다. 기조에게 정부는 일종의 “정신적 보호자로서의 정부(gouvernement moral et protecteur)”였다.각주36) 따라서 기조는 내무부 장관으로 재직할 당시 언론의 자유에 대한 법률을 입안하면서, 사회적 무질서를 가져오거나 새로운 혁명을 선동할 수 있는 글의 발표를 금지할 것을 지시했다.각주37) 잘못된 사상들의 흐름에 의해 공론이 오염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신적 보호자로서의 국가는 사회 구성원의 의식 발달의 방향을 설정하고 지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필요성에 근거해 기조가 시도했던 작업이 지적으로 상위인 계층과 학자층의 국가에로의 결집이었다. 기조는 지식인 집단을 결집하고 그들의 국가 권력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그는 ‘정신과학과 정치학 아카데미’를 복원해 광범위한 자유주의적 지식인 집단을 형성하고 국가 권력의 보호 속에서 육성하려 했다.각주38)

이 과학 아카데미는 이 시기 활발한 사회 조사를 통해 사회의 변동을 관찰하면서 사회를 해석해내는 작업을 수행했다.각주39) 또한 지방의 아카데미를 활성화하고 민중 도서관 보급, 문서보관소 육성 등을 통해 인민의 계몽을 위한 작업을 진행했다. 지식인, 학자 집단의 형성과 지도를 통해 그들이 갖는 정신적 힘을 국가 권력에 연결하고, 또한 그들을 통한 사회적 영향력의 확대 즉 공론의 지도라는 역할을 수행하고자 한 것이다.

기조는 혁명 이래 국가에 의한 교육 개혁 프로그램이 “국가를 위해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공공의 습속을 개선하도록” 갖추어지지도 않았음을 비판했다.각주40) 무엇보다도 교육 개혁은 “정치 제도의 총체와의 관계 속에서 교육 제도의 위상을 설정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역설했다.각주41) 그래서 기조는 나폴레옹 시기의 중앙집권화된 중등 교육 체계를 수용했다. 이는 나폴레옹의 교육 체계가 “사회의 필요에 부응하는 원칙 속에서 교육을 실현하려 한 것”이며, “안정성, 공공질서, 미래의 안녕을 보장”할 수 있도록 이루어져 있다는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사회는 유동적인 다양한 의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국가는 그 다양한 의견을 통제하고 지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각주42)

이러한 집단적 의식을 형성하기 위해 기조는 일종의 ‘교육자 집단(corps enseignant)’을 형성할 것을 제안하고 이를 통해 국가가 공교육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비록 교육자 집단에 독립성을 부여하고 자율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국가의 정치적 목적에 종국적으로 봉사할 수 있는 수단이 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계몽의 확대(répandre les Lumières)’는 일찍이 대혁명 시기에 콩도르세가 제시한 과제였다.각주43) 콩도르세는 입법부의 전횡을 막기 위해 공론의 권력이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계몽의 확대는 공론이 발달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계몽을 통한 문화와 지식의 확대가 진보, 행복, 자유의 조건이라고 파악했다. 18세기의 계몽주의 이래 19세기의 자유주의자에게 계몽은 지속적인 관심사였다. 하지만 기조는 18세기의 디드로 같은 백과전서파와 자신을 구별했다. 기조는 백과전서파가 겨냥한 공중(le public)은 유사한 하나였으나, 현실적으로 “공중, 인민, 사회라는 이름에는 수많은 다수의 공중, 다수의 인민, 다수의 사회가 숨겨져” 있음을 강조했다.각주44)

이들을 위해서는 하나의 백과전서가 아니라 다양한 지적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기조가 파스칼을 인용한 데서도 드러나듯 교육 개혁에 있어서는 사회의 다양성 속에서 권력에 의한 통일성을 추구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따라서 각각의 계급에 적합한 교육 프로그램이 제시되었다. 즉 초등 교육의 경우 모든 계급이 접근할 수 있도록 의무화하는 반면 중등·고등 교육의 경우에는 대상을 제한했다. 교육은 모든 개인을 평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능력의 불평등에 따라 사회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기능을 했다.각주45) 다시 파스칼의 말을 인용하자면, 권력은 사회의 다양성에 단일성을 부여함으로써 사회적 혼돈을 막고자 하는 것이었다.

반(反)개인주의적 자유주의?

철학적인 의미에서 개인의 이성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는, 즉 반개인주의적인 이러한 기조의 사고를 ‘자유주의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를 포함한 독트리네르가 고심한 문제는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그리고 그 조직자로서 국가는 어떠해야 하는가였다. 따라서 그들을 자유주의자로 평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정치적인 의미에서 자유주의적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최근 프랑스 자유주의의 전통을 복원하고자 했던 정치학자 르포르(Claude Lefort)는 프랑스 정치적 자유주의의 특수성을 그것이 전제정에 대립하여 존재해왔으며, 전제군주와의 결합 가능성을 내포하는 경제적 자유주의와도 구별되어 존재해왔다는 사실에서 찾는다.각주46)

기조가 활동했던 왕정복고 시기와 7월 왕정 시기 자유주의자들에게 최대 쟁점은 정치 체제의 문제였고, 입헌 군주제를 확립하는 문제였다.각주47) 기조의 논의도 근대의 정치 발달이 사회에 대한 권력의 영향력뿐 아니라 권력에 대한 사회의 영향력을 증대시킨다는 것을 전제한다.각주48) 따라서 기조가 확립하고자 한 대의제 정부는 권력과 사회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한다는 문제 설정 속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조는 근대 정치철학의 문제 설정과 달리, 개인에서 국가 권력의 출발점을 찾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존재 이유를 사회 구조 자체로부터 찾으려 했고 또한 그 권력이 사회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사회의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파악했다. 권력의 영역과 개인의 자유의 영역 사이의 관계가 결코 영합게임(zero sum game)이 아니라 정합게임(positive sum game)이라는 인식이다.

권력의 전횡에 의해 사회가 피폐해지거나 사회의 힘에 의해 권력이 의미를 상실하는 두 가지 극단적인 형태를 피하는 것이 기조가 추구한 대의제 정부의 출발점이었다. 나아가 개인의 자유는 권력에 의해 확보될 수 있고, 또한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체의 자유를 간과하고 있음에도 기조를 ‘정치적·입헌주의적으로 자유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또한 자유와 권력 사이에 대립항을 설정한 자유주의에 통치 능력을 부여하려 했다는 의미에서 그의 자유주의를 ‘정부의 자유주의(libéralisme de gouvernement)’라고 정의할 수 있다.각주49) 하지만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의 자유주의는 주체의 자유주의가 아닌 ‘국가에 의한 자유주의’각주50) 이며, 권력을 단순한 사회의 봉사자가 아니라 개입과 적극적인 행위의 수단으로서 파악한 ‘이단적인 자유주의’인 것이다.각주51)

‘대의제’ 민주주의

개인의 자율적인 이성적 행위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극히 한정된 시민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하는 기조의 논리는 민주주의가 필연적인 진리처럼 확대되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반민주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1848년 혁명으로 정치계에서 물러나 브뤼셀에서 망명하면서 쓴 글에서 기조는 민주주의가 모든 혼돈의 원인임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논리를 지속적으로 견지했다.각주52) 기조는 자신이 보고자 했던 것은 “프랑스 사회의 기초” 즉 “시민 사회”였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 시민 사회는 “상태의 다양성과 불평등이 법의 단일성과 권리의 평등 속에서 지속적으로 유지, 재생산되고 또한 공존하는” 것을 특징으로 했다.각주53) 진정한 입헌 정부의 노력은 이러한 사회의 요소에 안정성을 부여하고, 사회 질서의 보수적 요소를 결합해 행동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의제 정부의 역할이 있었다.

콩도르세와 브리소, 시에예스와 콩스탕 등 대혁명 이후 자유주의자들이 집중했던 문제는 절대군주를 대신하고 등장한 ‘국민(nation)’이 공간적으로 확대된 근대 사회에서 어떻게 전제정으로 타락하지 않고 주권을 실현할 수 있는가였다. 유일하게 가능한 주권의 실현 방식으로 간주된 ‘대의제 정부’는 실제적으로 누가 어떻게 무엇을 대표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합의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공포 정치나 전제정으로 귀결되었다. 1789년의 대혁명이 개인들을 옭아매고 있던 중세적인 중간 집단들을 제거하면서 개인들을 해방시켰다면, 혁명 이후의 작업은 자유롭게 해방된 개인들로부터 새로운 국가 권력을 세우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자유주의자들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권력의 문제를 통제하기 힘든 개인들의 열정과 의지에만 내맡겨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기조는 ‘사회’라는 새로운 실체를 인정하는 동시에, ‘대의’를 개인의 열정과 의지의 단순한 반영이 아닌 사회의 이성을 찾는 작업으로 이해했다. 이로써 국가 행위의 근거를 사회 구조 속에서 찾으려는 사회학적 입장을 채택한 것이다. 즉 대의제 정부의 문제를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의견과 이해들을 어떻게 국가 권력 내에 대의할 것인가의 문제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국가가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나아가 계몽하면서 사회의 조직자로서 행동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전환시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보통 선거권이 확립되고 민주주의가 제도화되기 시작했음에도, 보통 선거는 초기에 실현하고자 했던 이들의 뜻과는 달리 주권적 힘을 지닌 적극적인 권력이라기보다는 ‘조건의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적 사회 상태를 정치적으로 인식하면서 권리를 평등하게 부여하는 규제적 역할을 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보통 선거의 출현은 대의제 정부가 민주주의 속에서 실현되어야 함을 의미하게 된다. 슈미트는 선거에서 선출된 대표자가 국민의 뜻에 따라 봉사한다면 그것이 민주주의적일 수 있지만, 대표자가 독립된 행위자로 행동할 때는 귀족주의적일 수 있다면서 그 양면성을 지적했다.각주54)

하지만 기조는 결코 대의제를 민주주의에 종속시키지 않았다. 기조가 토론의 공개성의 원칙과 언론의 자유를 강조하면서 국가와 사회의 정치적 의사소통을 중시한 것은 사회 속에서 산재된 이성을 찾는 작업을 위해서였다. 기조에게는 열정과 의지의 표현으로서의 정치적 행위가 아닌 토론과 의사소통을 통한 이성의 발견 작업으로서의 대의제가 문제의 핵심이었다. 대의제가 민주주의에 종속될 때 그것은 단순한 의지의 표현의 결집, 즉 국가적 통일성과 정체성을 지닐 수 없는 혼돈의 상태에 불과한 것이었다. 기조에게 민주주의는 “모든 인간 본성의 폭발이며 모든 열정과 모든 힘이 지속적으로 드러나 투쟁하는 상태”로서 이해되었다.각주55) 따라서 민주주의는 대의제 정부에 의해서 통제되어야 할 그 무엇이지 그 역이 아니었던 것이다.

제3공화국에서의 기조의 계기

지금까지 우리는 기조의 정치사상을 그의 이성의 주권론과 그로부터 유추되는 대의제 정부론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기조의 정치사상이 프랑스 정치 문화의 특성을 전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민주주의의 역사적 동학(動學)을 이해한 토크빌에 비해,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끝까지 거부한 기조는 분명 실패한 정치가이며 한계가 뚜렷한 사상가다. 하지만 19세기 말 이후 자유주의에 의한 민주주의의 포섭 과정에서 드러난 프랑스의 역사는 오히려 기조의 계기(moment)였음이 드러났다. 즉 기조의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토크빌의 민주주의를 흡수한 것이 프랑스 제3공화국의 역사였다.

제3공화국에서 “혁명이 종결되었다”고 평가되는 것은 대혁명 이래 끊임없이 대립 투쟁하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이념적으로, 정치적으로 타협하고 제도적으로 실현되었음을 의미한다.각주56) 이제 민주주의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과제가 제기되고, 그 기능을 핵심적으로 담당하게 된 것은 교육이었다. 즉 19세기 말에 완성태를 갖추는 국민 국가에서 국민을 형성하는 작업, 즉 민주주의 시대에 적합한 이성을 가진 시민을 만들어내는 작업은 공화주의적 교육을 통해 이루어졌다. 1883년 페리(Jules Ferry)가 초등 교육을 ‘비종교적인 세속 교육’, ‘무상이면서 동시에 의무 교육’으로 제도화했던 교육 개혁은 프랑스 공화국 완성의 기반을 마련했다. 거리에 존재하는 인민에 근거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이성이 갖추어진 시민의 집단인 국민에 근거한 민주주의, 이는 국민 국가에 적합하면서도 자유주의에 포섭된 민주주의였다.

또한 민주주의 시대에는 대의제 개념 역시 변화를 요구받는다. 19세기 말, 뒤르켕이 중간 매개 집단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비례 대표제에 대한 논의가 등장하고 노동조합과 다양한 정당이 출현하면서 대의제 개념 역시 전환되기 시작했다. 사회적 다원주의에 대한 인식이 요구되고, 그것은 혁명의 보편주의 속에 배치되었다. 대의의 기제는 의회에 한정되지 않는다. 국민 주권은 의회가 아닌 국가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었다. 국민 주권의 실현 기구는 인민의 의지의 결집체인 의회가 아니라 권력 분립의 원칙에 근거한 국가였다.각주57)

공화국에서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과정은 추상적인 국민의 주권을 실현할 새로운 엘리트의 충원 과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엘리트의 충원을 위해 모든 국민에게 교육의 기회는 개방되어 있다.각주58) 행정, 입법, 사법뿐 아니라 다양한 권력과 다양한 제도를 통해 국민 주권은 그 실현 도구를 찾게 된다. 대의의 과정은 결코 문자 그대로 일종의 ‘재현’ 과정이 아니라 주권의 실현 과정과 결합되며, 국가와 사회의 이분법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절대주의 시대의 국왕에서부터 프랑스 혁명 시기 일반의지의 표상으로서 입법부의 절대적 권력 그리고 기조의 이성 주권론 등은 끊임없이 다른 형태들을 통해 드러나는 강한 국가의 모습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의 근거에는 ‘국왕=국가’ 혹은 ‘의회=국가=인민’ 혹은 인민의 자리에 이성을 대치시키는 형태로 국가를 프랑스 사회 조직화의 중심에 세우는 논리가 작동해왔다. 즉 그 중심의 국가를 통해 군주 주권, 인민 주권 그리고 이성의 주권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프랑스 정치 문화의 특색은 현재까지도 드러나고 있다.

20세기 말 기조의 계기

20세기 말 유럽은 복지 국가의 위기 속에서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의 블레어 정부와 독일의 슈뢰더 정부가 추구한 방안은 이른바 ‘제3의 길’로 불린다. 기든스(Anthony Giddens)가 이론화한 ‘제3의 길’의 특징 중 하나는 복지 정책에서 기존의 국가 부문의 역할을 축소하고 제3부문이라고 불리는 사회의 역할을 확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사한 복지 국가의 위기 속에서 1980년대 이후 프랑스 사회당 정권(미테랑 대통령 시기 사회당 내각과 시라크 대통령 시기 조스팽 내각)이 취했던 개혁 방향은 오히려 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즉 복지 정책에서 국가 부문의 역할을 확대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국가에 의한 35시간 노동제 도입, 실업률의 하락을 위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고용을 창출하려는 ‘젊은 고용’ 정책 등은 영국, 독일과 반대로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에 의해 복지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려 한다.각주59) 유럽 통합이라는 동일한 목적을 향해 가고 있지만, 초국적 자본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공격에 맞서 세 국가가 취하고 있는 개혁의 방향은 명백하게 대조된다.

이러한 프랑스 사회당의 정책은 프랑스 사회주의의 특수성에 기인한다.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와 달리 프랑스 사회주의는 그 태생부터 프랑스에서 강하게 작동되고 있는 국가주의적 요소 내지는 ‘일반 이익의 실현체로서의 국가’라는 개념에 기반해 형성된다. 독일 사회민주당이나 영국 노동당의 역사가 출발에서부터 계급적 이해의 실현과 그로부터 유추되는 보편 계급이라는 이념을 기반으로 형성된 데 비해, 프랑스 사회당은 당-국가 개념이 동일하게 일반 이익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갖게 된다는 혁명의 보편주의적 전제에서 출발한다.각주60) 국가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사회주의자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정치 문화 전반에서 공유되며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

프랑스 대혁명 시기 절대왕정을 대신하는 새로운 국가는 일반 이익의 실현체로서 표상되었고 그것은 절대군주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로 부각되었다. 일반 이익의 실현체로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국가는 이후의 다양한 혁명과 반혁명의 진통 속에서도 부인되지 않고 지속되었다. 이에 따르면 국가는 국민 주권의 실현의 장소로서, 국가는 국민 주권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존재한다. 개인의 자유는 국가를 통해 실현되는 것이지 국가 밖에서 국가 권력을 제거하면서 실현될 수 없게 된다. 바로 이러한 정치 문화의 뿌리가 기조의 사상에 있는 것이다.

더 읽을 자료

김수행·정병기·홍태영, 《제3의 길과 신자유주의》 제1개정판(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이 책은 1980년대 이후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그에 대응하는 유럽 3개국(영국, 독일, 프랑스)좌파 정당의 변모를 분석한다. 특히 제3부 프랑스 편은 기조의 사상과 관련하여 읽는다면 더욱 흥미롭다. 프랑스의 정치 문화라는 측면에서 기조를 비롯한 많은 프랑스 정치사상가와 정치가의 ‘일반의지의 표상으로서의 국가’라는 인식, 공화국에 대한 이해 등을 추적해볼 수 있다.

슈미트, 칼, 《정치적인 것의 개념》, 김효전 옮김(법문사, 1992)
슈미트, 칼, 《독재론》, 김효전 옮김(법원사, 1996)

정치적으로 극우파였고 나치에 봉사했던 저자 슈미트에 대해서는 일정한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독재론》은 근대 주권 사상이 근대 국가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밝히고 있다. 특히 프랑스 혁명과의 관련 속에서 분석한 부분들은 슈미트의 지적인 탁월함을 보여준다. 《정치적인 것의 개념》 역시 자유주의의 이론적·철학적 한계를 적절하게 지적해주고 있다는 의미에서 기조의 사상에 비추어 볼 때 의미 있는 독서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하버마스, 위르겐, 《공론장의 구조변동》, 한승완 옮김(나남, 2001)
18세기 이래 부르주아 공론장 형성과 변동의 역사를 자신의 비판 이론의 시각에서 잘 정리해놓고 있다. 공론장과 관련하여 프랑스의 역사가 적절하게 잘 배치되어 있고, 이러한 의미 속에서 기조의 사상적 위상을 잘 포착할 수 있게 해준다. 한국 사회에서는 언제부터인가 공론장이라는 단어가 유행어처럼 혹은 민주주의의 만병통치약처럼 들려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역사적 의미와 한계, 그리고 그것을 사고하는 이들의 사고 체계 속에서의 위상을 잘 짚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홉스봄, 에릭, 《혁명의 시대》·《자본의 시대》·《제국의 시대》·《극단의 시대》(한길사, 1984~1998)
19~20세기 역사에 대한 탁월한 저서들이다. 사회과학 혹은 정치사상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소홀하기 쉬운 역사에 대한 종합적인 시각을 제공해준다. 홉스봄은 역사를 단순히 사상을 알기 위한 배경 지식의 수준에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문제가 제기되고 해결되는 과정에 천착해 서구 근대사를 분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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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이 글은 2004년 《계간 사상》 봄호에 실린 〈기조 : 민주주의에 반(反)하는 자유주의〉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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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Rosanvallon, Pierre, Le sacre du citoyen, Histoire du suffrage universel en France(Paris: Gallimard, 1992)
  • ・ Rosanvallon, Pierre, “Les Doctrinnaires sont-ils des libéraux?”, Actes du Colloque, Guizot, Les Doctrinaires et la presse, 1820~1830, Le Val Richer, 23~24(septembre 1993)
  • ・ Rosanvallon, Pierre, Le peuple introuvable. Histoire de la représentation démocratique en France (Paris : Gallimard,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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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태영 집필자 소개

서울대 정치학과에서 학사, 석사를 마치고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워에서 ⟨(프랑스) 제3공화국의 자유주의적 기초⟩라는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방대 국제관계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펼쳐보기

출처

서양 근대 정치사상사
서양 근대 정치사상사 | 저자강정인 외 | cp명책세상 도서 소개

'계간 사상' 1999년 봄호부터 2003년 봄호까지 '서양 근대사상의 이해'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글 16편을 수정 보완한 것으로, 서양 정치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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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F. P. G. 기조서양 근대 정치사상사, 강정인 외,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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