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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뀌어 1969년 3월 2일 중국과 소련의 국경 지역인 헤이룽쟝 성(黑龍江省, 흑룡강성)의 전바오다오(珍寶島, 진보도)각주1) 에서 양국 간에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이틀 간에 걸친 전투로 쌍방이 모두 큰 인명 피해를 입었다. 6월에는 신쟝 성(新疆省, 신강성) 바르크 산 서부 지역에서, 7월에는 다시 헤이룽쟝 성 아무르 강의 바차다오(八岔島, 팔차도) 등지에서 무력 충돌이 잇달아 중국 측은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경계를 강화해야 했다. 비록 양국 간의 충돌은 9월 11일 월맹의 지도자인 호치민(胡志明, 호지명)의 사망으로 하노이를 방문하고 귀국하던 소련 총리 코시긴이 베이징에 들러 저우언라이와 회담을 가짐으로써 일단락되었으나, 이제 중국과 소련의 대립은 이념적 차원에서 벗어나 무력을 동원한 ‘중 · 소 냉전’으로 발전했다. 이를 계기로 중국의 대외 노선은 소련을 추종하고 미국과 대립하는 것에서 벗어나 미국과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1969년 4월 1일부터 4월 25일까지 베이징에서 중국 공산당 제9차 전국대표대회(‘9전대회’)가 열렸다. 이것은 1956년의 제8차 대회(‘8전대회’)로부터 13년 만에, 그리고 58년의 ‘8전대회’ 제2차 회의 이래 11년 만에 열리는 회의였다. 전국에서 1,512명의 대표가 참가했지만, 각 지역의 당 조직이 붕괴된 상태여서 중앙에서 일방적으로 지명한 인물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대회 첫날 마오쩌둥의 의례적인 치사에 이어 린뱌오의 정치보고가 있었다. 린뱌오는 문화대혁명의 준비 과정과 경과, 그리고 투쟁과 비판 · 개혁의 추진 과정 등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뒤 “전국 인민은 단결과 승리를 위해 마오쩌둥 사상과 마오쩌둥의 계속 혁명론을 기본으로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자”고 호소했다. 하지만 뒤에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이때 이미 정치 보고의 내용을 둘러싸고 린뱌오, 천보다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 간에 대립이 있었다고 한다.
린뱌오 사후에 치러진 1973년의 ‘10전대회’에서 저우언라이는 “마오 주석의 주재 하에 기초된 정치 보고에 대해 린뱌오는 은근히 천보다를 지지해 공공연히 반대하고 나섰는데, 그것이 파탄되자 할 수 없이 중앙의 정치 노선을 마지못해 받아들여 대회에서 중앙의 정치 보고를 낭독하였다”는 것이다.각주2) 그러나 이 정치 보고와 함께 4월 14일에 채택된 〈중국 공산당 규약〉에는 “린뱌오 동지는 마오쩌둥 동지의 친밀한 전우이며, 후계자이다”라는 구절이 삽입되는 그야말로 이례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정치 현실을 돌이켜볼 때, 권력을 가진 자가 아직 권좌에서 막강한 힘을 휘두르고 있을 때 후계자로 지명되는 것은 오히려 위험할 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린뱌오의 2인자 등극은 조금 이른 감이 있을 뿐 아니라 미구에 닥칠 그의 몰락을 예시하는 하나의 불길한 징조일 수도 있었다.
아울러 회의 기간 중 중앙위원 170명과 후보중앙위원 109명 등 모두 279명이 선출되었는데, 이들은 문화대혁명의 성공에 대한 논공행상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기왕의 인물들은 겨우 53명에 불과했고, 나머지 77퍼센트에 달하는 신인들이 새롭게 중앙무대에 진출했다. 또 전체 지도부 가운데 군 출신이 차지하는 비율이 57퍼센트에 이르렀고, 린뱌오 계열로 지목되는 자들이 전체의 21퍼센트를 차지했다. 그밖에도 쟝칭 등이 이끄는 문혁파가 전체의 약 29퍼센트 정도를 점했다. 아울러 이 대회에서는 소련과의 갈등을 반영해 소련을 미국과 똑같은 적으로 간주하는 ‘사회제국주의’론이 정착되었다.
1964년 흐루시초프가 실각하고 브레즈네프가 등장했지만 중 · 소 간의 긴장관계는 해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브레즈네프 체제의 소련이 마오쩌둥의 하야를 요구하면서 중국의 반발이 커졌다. 게다가 1968년 8월 소련이 바르샤바조약기구 군대를 동원해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 진입한 뒤[이른바 ‘프라하의 봄’] 사회주의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일국의 주권이 제한될 수 있다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선언하자 중국은 강한 위기감을 느꼈다. 이제 중국은 소련을 사회주의 제국주의라고 비난했고 이러한 분위기에서 1969년 3월에서 8월 사이에 양국 국경에서 몇 차례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대도시 시민들이 참호를 파고 핵 방공호를 만들 정도로 중국에서는 핵전쟁의 위기감에 시달렸다.신성곤, 윤혜영,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 2004. 426쪽.
그리하여 소련 사회제국주의의 침략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임전 체제의 강화를 호소하며, ‘전쟁에 대비하고, 재해에 대비하며, 인민을 위해서’라는 슬로건과 함께 ‘혁명에 힘을 가해 생산을 촉진한다’는 슬로건이 제기되기도 했다.
대회가 끝난 뒤 4월 28일에 곧바로 열린 제9기 1중총회에서는 당 중앙에 대한 개편이 이루어졌다. 당 주석에는 마오쩌둥, 부주석에는 린뱌오가 선출되고,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는 마오와 린뱌오, 그리고 천보다, 저우언라이, 캉성 등 5명이 선출되었으며, 중앙정치국원에는 상무위원 5명을 포함한 21명이 선출되었다. 반면에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펑전, 펑더화이 등의 이름은 당 중앙에서 정식으로 사라졌다. ‘9전대회’는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의 한 고비를 넘어서는 과도기적 성격이 강한 대회였다. 여기서는 경제와 사회 문제 등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고, 권력의 재편 등 주로 정치적인 문제에 집중했다. 그리고 회의의 노선 역시 임시 권력 기구인 ‘혁명위원회’에 근거해 이른바 ‘삼결합’을 넘어서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9전대회’는 ‘당 대회’와 ‘전국인인대표대회’가 미분화한 시기에 열린 초보적인 당 대회였다고 할 수 있다.
문화대혁명이 수습 국면에 접어들고 경제 건설을 촉진하기 위한 정책들이 수립되면서, 미국과 중국 간에도 미묘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양군 간의 대사급 회담의 재개가 모색되고 미국의 중국에 대한 경계 태세가 완화되었으며, 미국 기업체의 해외 방계 회사에 대한 대 중국 무역 제한이 철폐되었다. 급기야 1970년 2월의 외교 교서에서 닉슨 대통령은 “이데올로기나 이해의 격차는 과소평가할 수 없으나 베이징과의 실제적인 관계 개선책을 취하는 것이 미국과 세계의 이익”이라고 진술했다. 이제 역사의 흐름은 또 다른 물길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흐름에 역류하고 여전히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실권파를 제거하기 위해 마오쩌둥이 이용했던 것은 ‘홍위병’ 세력과 또 하나 ‘인민해방군’이었다.
이제 ‘홍위병’ 세력은 그 역사적 소임을 다한 뒤 제거되었고, 남은 것은 린뱌오가 지배하는 인민해방군이었다. 린뱌오의 위세는 9전대회에서 최고점에 달했다. 이 대회에서 린뱌오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두 가지 맥락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것은 첫째, 체코의 프라하와 베트남전쟁, 그리고 우수리 강의 여러 섬을 둘러싼 소련과의 국경 분쟁과 같은 ‘국제적 긴장’, 그리고 둘째 군의 정치에 대한 계속적인 영향력의 행사이다.각주3) 그러한 역학 관계 속에서 얻어낸 자신의 지위를 발판으로 린뱌오는 조금 더 큰 야심을 품기 시작했던 듯하다. 9전대회와 같은 기간인 1969년 10월 린뱌오는 당시 군 부참모장 겸 중앙정치국 위원인 우파셴(吳法憲, 오법헌)을 시켜 자신의 아들 린리궈(林立果, 임립과)를 공군사령부 판공실 부주임 겸 작전부 부부장이라는 요직에 앉혀 공군을 지휘할 수 있는 권력을 장악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미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의 생각은 전혀 다른 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통해 류사오치 일파를 제거하는 데 인민해방군의 힘을 빌렸으나, 그로 인해 비대해진 군의 존재가 국가 재정을 포함한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에 도달했다. 그리고 비록 외견상 미국이나 소련과의 관계가 우호적이지 않으나, 저우언라이 등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대립 구도는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아울러 당과 국가의 재건에는 문혁 기간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인사들의 참여가 절실히 요구되었다. 이 모든 현실 인식이 이것과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던 린뱌오와 그 일파에게는 중대한 위협이 되었다. 게다가 문혁의 추진 과정에서 나타난 바 있듯이 린뱌오에게는 일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는 성벽과 함께 권위주의적인 면모가 동시에 체현되어 있었다. 이제 마오쩌둥과 린뱌오 일파의 갈등과 대립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1970년 3월 당 중앙공작회의에서 헌법 개정 문제가 제기되자 린뱌오는 마오쩌둥에게 류사오치의 체포 이후 공석으로 남아 있던 국가 주석직의 부활을 건의했다. 그러나 마오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로 인해 내심 국가 주석에 오르려는 야심을 갖고 있던 린뱌오의 기대가 어그러졌고, 주석의 공백 하에 총리가 정부의 수반이 됨으로써 저우언라이가 린뱌오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다. 이것은 린뱌오를 견제하려는 마오의 전략이었다. 이제 린뱌오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자가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8월 23일 중국 공산당 제9기 2중전회가 1959년에 이어 루산(廬山, 여산)에서 열렸다. 대회 첫날 린뱌오는 뜬금없이 ‘천재론’을 들고 나왔고, 천보다는 다시 한번 국가 주석제의 부활을 제안했다. 회의의 주요 안건은 국가 경제 계획과 전쟁 준비 체제 등이었으나, 린뱌오 일파의 주요 목표는 국가 주석제의 부활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마오의 천재성을 강조하면서 마오가 국가 주석의 자리에 오르기를 주장했는데, 마오가 이를 사양하거나 거부하면 린뱌오가 대신 그 자리에 오르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의도를 간파한 마오쩌둥은 25일 정치국 상무위 확대회의를 소집해 린뱌오 일파의 보고서를 반송하고 천보다의 월권 행위를 비판하면서 그에게 자아비판을 명한 뒤 상무위원에서 해임했다. 그럼에도 마오쩌둥은 여전히 린뱌오에게는 아무런 말이 없었고, 평상적인 업무를 맡겼으나, 오히려 그런 마오의 태도가 린뱌오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린뱌오는 공군의 요직에 앉아 공군을 장악하고 있는 아들 린리궈에게 동지들을 규합하도록 해 그해 가을 ‘연합함대’라는 비밀 조직이 공군 내에 만들어졌다.
1970년 10월 1일 마오쩌둥의 오랜 친구인 에드거 스노가 중국을 방문해 톈안먼 위에서 마오쩌둥과 함께 모습을 나타냈다. 12월에 다시 방문한 스노에게 마오는 미국과의 화해를 위해 미국 대통령 닉슨의 초청을 중재해달라고 부탁했다. 미국 역시 베트남전으로 곤경에 빠져 돌파구를 찾으려 애쓰던 중이었으므로 이러한 제안에 흥미를 가졌다. 같은 시기에 중국은 10월에는 캐나다와 11월에는 이탈리아와 국교를 수립하는 등 서방 국가와의 적극적인 국가 외교를 개시했다. 그러나 린뱌오는 여전히 서구와의 관계 개선보다는 소련과의 우호 관계 회복이 더 앞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오가 자신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미국과의 접촉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은 동시에 자신이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되었다는 생각에 그가 갖고 있던 불안감은 더욱 증폭되었다. 이제 린뱌오로서도 사태를 수수방관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해가 바뀌어 1971년이 되자 그의 아들 린리궈는 아버지를 대신해 쿠데타 계획을 세웠는데, 중국어로 ‘무장 봉기’를 의미하는 ‘우치이(武起義)’와 발음이 같은 ‘우치이 프로젝트(五七一工程)’라는 암호명으로 행동에 들어가 동조자들을 규합했다. 그러는 사이 4월에는 일본의 나고야에서 개최된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했던 미국 대표팀이 베이징에 초청되어 중국 선수들과 친선경기를 가져 이른바 핑퐁외교를 성사시켰다. 7월에는 미 국무장관 키신저가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해 저우언라이와 비밀회담을 진행했다. 뒤에 밝져진 사실이지만, 당시 린뱌오의 세력을 무화시키려는 마오쩌둥의 책략은 ‘돌을 던지고, 진흙에 모래를 뿌리고, 주춧돌의 밑단을 판다’는 말로 요약된다.
‘돌을 던진다’는 것은 당 고위 간부를 대상으로 한 이념 운동을 말하고, ‘모래를 뿌린다’는 것은 린뱌오의 지지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공산당 중앙상무위원회 산하 중앙군사위원회의 인사 이동을 의미한다. 곧 마오는 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해 “너무 단단한 진흙은 공기와 차단되지만, 모래가 섞이면 공기가 들어갈 수 있다. 군사위원회는 몇 가지 새로운 성분을 가미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주춧돌의 밑단을 판다’는 것에서 주춧돌은 베이징 군구의 무장군대를 의미하는데, 마오는 이 가운데 주요 인사들을 교체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입지를 조여오자 결국 린뱌오는 마오쩌둥을 암살하고 쿠데타를 일으키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그 해 1971년 6월부터 린뱌오는 병을 핑계로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971년 8월 중순부터 9월 12일에 걸쳐 마오쩌둥은 남쪽 지역을 여행하면서 현지 책임자들과 의견을 교환했는데, 이 자리에서 그릇된 노선의 예를 들며 은연중에 린뱌오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 사실이 린뱌오에게 보고되자 린뱌오는 마오쩌둥이 귀경길에 타고 올 비행기를 습격하기로 작전을 세우고 자신은 허베이 성의 베이다이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돌연 예정을 바꾸어 기차로 상경해 쿠데타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동시에 저우언라이는 이상 동향의 징후가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린뱌오를 추적한 결과 그가 가족과 함께 베이다이허에서 비행기를 대기시켜놓고 있으며 전 공군에 비상 출동 태세를 취하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저우언라이는 중앙정부의 지시 없이는 절대 출동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결국 9월 13일 린뱌오는 자신의 가족을 데리고 소련으로 탈출하는 길에 몽골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하지만 린뱌오의 사망 소식은 곧바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 사건과 관련된 최초의 공식 뉴스 보도는 몽골인민공화국 국영통신에서 보낸 다음과 같은 짤막한 내용의 단신이었다. “중국의 제트기 한 대가 몽골 영공을 침입해 추락하였다. 추락 현장에는 거의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불에 탄 시체 9구와 무기 · 문건 · 물자 등이 발견되었다.” 9월 30일에는 소련의 《타스통신》이 “9월 13일 새벽에 몽골 영토 내에서 중국의 제트기 한 대가 추락하여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이것이 전부였고 정작 중국에서는 아무런 발표도 없었다. 다만 그 이후 린뱌오 그룹에 속한 인물들이 사람들의 이목에서 사라지고 관공서 등에 걸려 있던 린뱌오의 사진이 제거되고 그의 저작물들이 회수 폐기되는 등의 이상 징후를 감지한 미국의 《뉴욕타임스》가 10월 7일 린뱌오 사망설을 제기했다.
결국 중국 정부로서도 더 이상 이 사건을 덮어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공표는 신중하게 이루어졌다. 그런 와중에도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1971년 10월 25일 유엔 제26차 회의에서 중국의 유엔 가입이 허용되었고, 타이완은 축출되었다. 11월에는 마오쩌둥이 ‘2월 역류’에 대한 명예회복을 선언했고, 1972년 1월 10일에는 문화대혁명 때 숙청되었던 전 외교부장 천이(陳毅, 진의)의 추도식에 마오쩌둥이 참석했다.
그리고 2월 닉슨이 중국을 공식 방문해 마오쩌둥과 회담을 가졌고, 2월 28일에는 상하이에서 〈중 · 미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로써 중국은 소련과 미국 가운데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독자적인 노선을 걸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결국 린뱌오의 이념 정책이 몰락하고 저우언라이의 실리 외교가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을 의미한다. 9월에는 일본과도 수교를 맺고 〈중 · 일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후로 세계 각국이 연이어 중국과 수교를 맺는 한편 타이완과는 단교를 함으로써 공산당과 국민당으로 대표되는 두 개의 중국의 운명이 극적으로 엇갈리게 된다.
이런 흐름 속에서 린뱌오의 사망 소식은 사건 발생 후 10개월이 지난 1972년 7월 28일 외무차관보 왕하이룽(王海容, 왕해용)에 의해 외신 기자들에게 알려졌고, 이후로 파리나 알제리 등의 중국 대사관에서도 그 보도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것은 중국 내에서 린뱌오 비판에 대한 입장이 정리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과연 그해 말부터 린뱌오에 대한 비판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린뱌오의 여러 정책들이 ‘좌익 분파주의적 경향’과 ‘무정부주의적 경향’을 띤다고 비판되었으나, 1973년부터는 돌연 방향을 바꾸어 이제는 린뱌오가 우익으로 ‘쿵쯔’의 제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중국 혁명 건설에 있어 무정부주의, 좌익 분파주의의 극복이 과제였던 시기에는 린뱌오의 ‘좌’익주의가 비판되고, 당과 국가의 조직이 정비되고 그보다 관료주의, 권력주의의 억제가 과제가 된 시기에는 린뱌오의 우익적 경향, 권위주의의 측면이 문제가 되”었던 것일까?각주4)
1971년 이래 문혁의 조정 국면에서 한때 비판의 대상으로 핍박받았던 당의 노간부들에 대한 사면이 이루어졌다. 1972년 4월 24일 저우언라이의 의견이 반영된 《인민일보》 사설에서는 성질이 다른 모순을 엄격하게 구분해야 하며 착오를 범한 동지에 대해서는 ‘단결-비평-단결’의 방침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간부들 대부분이 장기간의 혁명 과정을 통해 단련된 노간부이고 당의 귀한 존재라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8월 1일의 건군 45주년 기념대회에는 그동안 비판을 받고 실각했던 천윈(陳雲, 진운)과 왕전(王震, 왕진) 등 고참 간부들이 초청되어 모습을 드러냈고, 이듬해인 1973년 3월 10일에는 덩샤오핑이 당권을 회복하고 국무원 부총리에 임명되었다. 1966년 10월 류사오치와 함께 홍위병들의 비판대회에 끌려다니다 67년 이후 모습을 볼 수 없었던 덩샤오핑이 불사조처럼 부활한 것이었다. 이것은 덩샤오핑 일개인의 부활에 그치지 않고, 일종의 탈 ‘문혁’의 조류가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당내에 온존해 있는 문혁파의 ‘반조류’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마오쩌둥 역시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생각에 4인방으로 대표되는 문혁 세력들의 입장을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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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출처
이 책은 자매편이라 할『중국사 강의』의 후속편이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부터 1997년 홍콩 반환까지를 다루고 초강대국으로 변모한 중국의 현대사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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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린뱌오의 부상과 몰락 – 중국현대사 강의, 조관희, 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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