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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움직임은 이미 1958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대약진 운동의 수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를 위해 같은 해 여름부터 12월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회의가 열렸고 많은 문제점들이 지적되었다. 그럼에도 대약진 운동의 기본 방침은 견지되었으며, 일부 문제가 드러난 부분에 대한 ‘정돈’ 공작을 시행하는 것으로 논의가 중둥무이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59년 4월 전국인민대표회의 제2기 제1회 대회에서 마오쩌둥은 국가 주석직에서 물러나고 당 주석직만 유지했다.
마오를 대신해 류사오치가 새롭게 주석의 자리에 올랐다. 1959년 7월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한 중국 공산당은 쟝시 성 루산(廬山, 여산)에서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었다. 여기에서 국방부장 펑더화이(彭德懷, 팽덕회)는 ‘대약진’과 ‘인민공사’에서의 ‘프티부르주아적 열광주의’의 오류들을 비판했다. 비공식석상에서 펑더화이는 대약진 운동의 문제점 몇 가지를 열거하고 마오쩌둥의 고향인 후난 성이 다른 지역에 비해 더 많은 국가 지원을 받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아울러 1958년에 보고된 수확량의 수치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프티부르주아의 광기는 우리에게 쉽사리 좌경적인 과오를 범하게 했다. 원래 몇 년 또는 수십 년이 걸려야 달성될 수 있는 요구를 1년이나 수개월에 해낼 수 있도록 목표를 변경하였다. 이 때문에 현실과 동떨어지고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 그들은 정치를 으뜸으로 삼기만 하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고 노동 자각을 높이고 생산품의 양과 질을 보증하여 대중의 적극성과 창의성을 발휘하게 하며, 이로써 우리의 경제건설을 진보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정치를 으뜸으로 삼는다 해도 경제법칙을 대표할 수는 없을 것이며, 더욱이 경제 공작의 구체적 조치로 변할 수는 없다.
이 자리에서 펑더화이는 대약진 운동의 세 가지 모순점을 열거했다. 첫째, 대약진 운동은 중국의 장기 경제 발전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것은 장기 경제 발전이라는 것이 단순한 군중 동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기술 발전에 기반을 두고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둘째, 대약진 운동은 소련의 발전 모델을 배격함으로써 중 · 소 관계를 악화시켰다. 셋째, 군인들이 대약진 운동에 동원됨으로써 사기가 저하되고 군의 전투력이 크게 감소되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이 오랜 혁명 동지의 충언을 자신의 노선에 대한 도전일 뿐 아니라 대약진 운동에 대한 부르주아 계급의 동요를 반영한 것으로 받아들여 그가 우파 기회주의자들의 모임을 결성하고 원칙 없는 분파주의적 행동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마침 펑더화이는 회의 직전에 소련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마오는 그때 펑더화이가 흐루시초프로부터 인민공사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를 받은 게 분명하다고 믿었던 듯하다.
결국 인민공사의 무리한 추진 등 당대의 좌 편향적인 오류를 시정했어야 할 회의가 오히려 우익 기회주의자들과의 투쟁의 장으로 변해버려 펑더화이와 그를 지지하는 자들은 반당 집단으로 몰려 실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반 우파 투쟁’으로 비판적인 지식인들이 입을 다물고 있던 상황인지라, 이제는 그 누구도 마오쩌둥에게 반기를 들고 비판적인 견해를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후임 국방부장으로 임명된 린뱌오는 재빨리 ‘마오쩌둥 사상’에 입각한 군의 사상 공작, 정치 공작을 강화하고 군을 장악했다. 그리고 대약진 운동은 계속 추진되었다. 마오쩌둥은 회의에서 자신의 동료들에게 자신의 심경을 여과 없이 감정을 실어 토로했다.
쿵쯔나 레닌, 마르크스도 모두 실수를 저질렀는데 자신이 그랬다고 해서 놀랄 이유가 무엇이냐고 그는 말했다. 만일 모두가 부정적인 면만 강조하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그때는 자신이 “농촌으로 가서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농민을 이끌 것이다. 만일 인민해방군에 있는 너희들이 나를 따르지 않는다면,각주1) 나는 나가서 홍군을 찾고 또 다른 해방군을 조직할 것이다.” 인민공사에 대해서 마오쩌둥은 “이제까지 하나도 붕괴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가운데 절반이 붕괴한다 해도 대비책이 있고, 만일 70퍼센트가 무너진다고해도 30퍼센트는 남는다. 무너질 수밖에 없다면 무너지게 내버려 두라”고 말했다.조너선 D. 스펜스, 『현대중국을 찾아서 2』, 168쪽.
그러나 이러한 몸부림으로도 현실을 호도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대약진 운동의 무리한 추구로 국민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으며, 식량 부족으로 전국에서 2,000만 명이 넘는 아사자가 나왔다. 이러한 인적 피해뿐 아니라 자원을 무차별하게 파헤치고 용광로를 돌리게 위해 삼림을 남벌하는 바람에 자연 환경 역시 크게 파괴되었다. 이제 상황은 천하의 마오쩌둥도 어찌 해볼 도리 없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 사이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걷고 있었다. 일찍이 1959년 8월 중국과 인도 사이에 국경 분쟁이 일어났을 때 9월에 발표된 소련의 타스 통신 보도는 양국 간의 국경 분쟁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고 양국 모두에게 이러한 ‘오류’를 시정하는 노력을 기울일 것을 촉구하였다. 중국은 소련이 자신들을 부르주아 국가와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는 데 대해 분노했다. 여기에 더해 중국은 소련이 이 성명을 발표 당일 아침이 되어서야 자신들에게 통보했고, 이에 잠시 발표를 유보해달라고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성명 발표를 강행한 데 대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 성명 발표로 중국과 소련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섰다는 것은 양국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다. 같은 해 9월 30일 흐루시초프가 미국을 방문해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회담을 갖고 귀국하는 길에 베이징에 들렀다. 그러나 흐루시초프는 마오쩌둥의 심기를 다시 한번 뒤흔들었다.
도착 당일 환영 만찬에서 흐루시초프는 중국과 인도의 국경 분쟁을 암시하는 듯한 태도로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성을 무력으로 시험해보려는” 자들의 호전성을 격하게 비난했다. 마오쩌둥과의 회담에서는 타이완의 독립을 인정하라는 투의 제안을 하기도 했다. 결국 10월 3일 흐루시초프가 중국을 떠날 때에는 관례라고 할 ‘공동 성명’조차 발표되지 않았다. 1960년 여름 양국 간의 갈등을 현실화하기 위한 수순을 밟아나가듯 소련은 중국 내에서 일하고 있던 1,390명의 전문가와 고문들 전원을 철수시키겠다는 뜻을 밝혔고, 실제로 9월에 이것을 실행에 옮겼다. 343개에 이르는 전문가 파견 계약과 계약 보증서 등이 일방적으로 파기되었고, 합계 277개 항목에 이르는 과학기술 협력 계획이 취소되었다. 그 뒤로도 플랜트와 각종 설비의 핵심적인 부분에 대한 제공을 대폭 삭감해 중국 측에 막대한 손해를 입혔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에 더해 중 · 소 간의 대립으로 중국 경제는 막다른 골목에 내몰렸다. 마오쩌둥이 2선으로 물러난 뒤 사태 수습을 책임진 것은 국가 주석인 류사오치와 당 총서기인 덩샤오핑(鄧小平, 등소평), 그리고 베이징 시장인 펑전(彭眞, 팽진) 등 공산당 내 실권파 세력이었다. 류사오치는 표면적으로는 마오쩌둥에 협력하면서 실제로는 대약진 운동을 재조직하는 조정 정책에 착수했다. 당면 과제는 식량 위기였으므로 도시 인구의 강제 소개(疏開)라는 과감한 정책이 단행되어 1961에서 63년 동안 2,000만 명 정도의 도시 인구가 줄어들었다. 농업 투자가 대폭 증가되었으며, 화학 비료나 농약, 화학 섬유의 공급을 위해 서구 여러 나라들로부터 대형 화학 플랜트를 구입했다. 소비 물자의 확보를 위해 농업 생산재를 제외한 공업 분야의 기본 건설 투자는 대폭 삭감되었다.
그러나 소련과의 갈등으로 미국을 포함한 세계 양대국과의 대립이라는 엄중한 현실에 맞서기 위해 원자폭탄과 대륙간 탄도탄의 개발에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었다. 인민공사는 대규모 생산대대에서 초급합작사의 자연 촌락 규모인 생산대로 축소되었다(‘3급 소유제’). 농민 개인의 자유 의사가 존중되었고, 공동 식당은 폐쇄되었으며, 농민들의 생산 의욕을 고취하기 위해 3자1포(三自一包) 정책이 장려되었다. 여기서 ‘3자1포’는 세 가지 ‘자(自)’, 곧 농민에게 경지의 5퍼센트 한도 내에서 자유롭게 경영할 수 있는 땅인 ‘자류지(自留地)’를 인정하고, 농촌에 ‘자유시장(自由市場)’을 허용하며, 일종의 독립 채산제라 할 ‘남고 모자라는 것을 스스로 책임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자부영휴(自負盈虧)’를 시행하는 것과 한 가지 ‘포(包)’, 곧 생산의 호당 책임제 정책인 ‘포산도호(包産到戶)’를 가리킨다.
1961년 1월에 열린 중국 공산당 제8기 9중전회에서는 ‘삼면홍기’의 정당성을 재확인하고 이것이 중국의 실제 정황에 적응하고 있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아울러 국민 경제 발전의 총 방침으로 ‘농업을 기초로 하고 공업을 길잡이로 삼는다’는 슬로건이 채택되었는데, 이것은 대약진 운동이 내걸었던 기치 가운데 하나인 두 발로 걷는다(讓兩條腿走路)는 정책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 실권파가 대약진 운동의 과도함과 급진성에 대해 불만을 품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들은 앞서의 펑더화이와 같이 마오쩌둥의 권위에 드러내놓고 도전하고 대결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류사오치 등이 아무리 신중하게 언어를 구사했더라도 이들이 마오쩌둥이 지향하는 사회주의 혁명에서 벗어나는 것을 피할 길이 없었다.
이 회의에서 그 전해인 1960년 9월 저우언라이가 국가경제위원회의 보고에서 발표했던 ‘조정, 공고, 충실, 제고(調整, 鞏固, 充實, 提高)’라는 ‘8자 방침’이 정식으로 통과되었다. 이것은 사실상 대약진 운동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덩샤오핑이 유명한 “생산만 증대된다면 우리는 개인 기업으로 환원할 수도 있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라는 발언을 한 것 역시 이즈음이었다. 이렇듯 실용적인 정책을 채용했다는 사실 자체가 펑더화이가 옳고 마오쩌둥의 노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부각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바로 같은 기간인 1961년 1월 베이징에서 〈하이루이의 파면(海瑞罷官)〉이라는 제목의 연극이 공연되었고, 그 해 여름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 연극은 본래 명대사(明代史) 연구가로 당시 베이징 시 부시장이었던 우한(吳晗, 오함)이 그 전해에 쓴 극본을 무대에 올린 것으로, 당시는 별 문제 없이 넘어갔지만 불과 5년 뒤인 1966년 중국 전역에 몰아닥친 ‘문화대혁명’의 광풍의 서막을 알린 결정적인 빌미가 되었다. 전국인민대표회의 제2기 제1회 대회가 열렸던 1959년 4월 마오쩌둥은 당 중앙회의를 소집하고 당 간부들이 대약진 운동의 성과를 허위로 과장 보고하는 것을 비판했다. 그 자리에서 마오는 명대의 청백리인 하이루이가 죽음을 무릅쓰고 황제에게 간언한 것은 황제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황제에 대한 충성심의 발로였다각주2) 고 주장하면서 지금은 그와 같이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하는 충직한 관리가 없다고 한탄했다.
마오쩌둥은 해방 전에 명 왕조의 일화를 원용해 쟝졔스와 국민당 정부를 비판한 적이 있던 우한을 기억해냈다. 마오의 부탁을 받고 우한은 같은 해 6월 16일 《인민일보》에 「하이루이가 황제를 욕하다(海瑞罵皇帝)」라는 글을 실어 마오 주석과 당을 위해 충언하자고 제안했다. 그 해 8월에 열린 ‘루산 회의’에서 펑더화이가 작심하고 대약진 운동을 비판했을 때 마오쩌둥은 “우파 하이루이와 좌파 하이루이를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여 펑더화이의 의견서가 옳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에 우한은 9월에 「하이루이를 논함(論海瑞)」이라는 글을 《인민일보》에 발표했는데, 여기서는 ‘루산 회의’에서 실각한 펑더화이를 은연중에 “무모하게 불사에 집착하고” “편견이 많고 비판을 수용할 줄 모르는” 황제에 맞서 “처벌의 위험에도 겁먹지 않고” 용기 있게 행동한 하이루이에 빗대었다. 바로 그 연장선상에서 우한이 「하이루이의 파면」이라는 극본을 쓰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그런 사실은 묻히고 단순히 ‘하이루이를 배우자’는 마오쩌둥의 말 한 마디에 하이루이에 대한 열풍이 불었고, 하이루이에 대한 연극 또한 크게 유행했다. 〈하이루이의 파면〉 역시 그 와중에 우한이 유명한 경극 배우 마롄량(馬連良, 마련량)으로부터 하이루이의 정신을 현대 경극으로 개편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만든 것이었다. 연극은 크게 성공했다. 공연이 끝나자 마오쩌둥은 마롄량을 직접 불러 연기가 훌륭했다고 칭찬하고 하이루이는 훌륭한 충신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하이루이의 파면〉은 공연 당시에는 별다른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상 이것은 당시 마오쩌둥의 급진성에 염증을 낸 일부 지식인들이 표출했던 불만의 일단을 보여주는 한 예라 할 수 있다.
〈하이루이의 파면〉이 공연된 직후인 1961년 3월에는 일찍이 항일전쟁 중 충칭에서 발행되었던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신화일보(新華日報)》의 주필을 지냈고 1953~59년까지는 《인민일보》의 편집장을 맡았던 언론인 출신으로 당시 공산당 베이징시위원회 서기였던 덩퉈(鄧拓, 등탁)가 마난춘(馬南邨, 마남촌)이라는 필명으로 석간인 《베이징만보(北京晩報)》에 1961년 8월부터 다음해 12월까지 「연산야화(燕山夜話)」라는 제목의 칼럼을 150회나 연재했다.각주3) 이것은 이솝 우화와 같은 필법으로 당시 ‘대약진’ 정책의 실패로 농민들이 겪고 있던 고통과 경직된 정치 이념으로 인민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 등을 풍자한 것이었다.
그리고 1961년부터는 베이징시 당 위원회의 기관지인 《전선(前線)》에 우난싱(吳南星, 오남성)이라는 필명으로 「삼가촌찰기(三家村札記)」라는 칼럼이 연재되었다. 우난싱이라는 이름은 베이징시 부시장 우한의 성과 베이징시 당 선전부장 덩퉈(필명은 마난춘), 그리고 베이징시 당위 통일선전부장 랴오모사[廖沫沙, 요말사; 필명은 판싱(繁星), 번성]의 필명에서 한 글자씩 취한 것으로, 그들은 정치, 문화, 과학, 교육 등 사회의 여러 상황을 비판하고 풍자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베이징시당 제1서기였던 펑전이 베이징 시내에 있는 창관러우(暢觀樓, 창관루)에 58년 이후 중앙당이 현급 이상의 기관에 발송한 문헌들을 모아놓고 심사를 진행했는데, 이것은 명백하게도 ‘대약진’과 ‘삼면홍기’를 비판함으로써 당 중앙의 정책상의 오류를 청산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벌인 일이었다(창관러우 사건).
1962년 1월 마오쩌둥은 당의 고급간부 7,000명을 소집해 확대 중앙공작회의(일명 ‘7천인 대회’)를 소집하고 이 자리에서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회의석상에서 마오는 “중앙이 범한 잘못은 직접적으로 나의 책임이고 간접적으로도 나에게 얼마간의 책임이 있다. 그것은 내가 중앙의 주석이기 때문이다”라는 자아비판을 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당권에 대한 도전은 거부했다.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도 자아비판을 했지만, 국방부장 겸 인민해방군 총사령관인 린뱌오는 “마오 주석의 사상은 정확했다”고 선언하며,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은 마오 주석의 지시대로 일을 운용하지 않고, 그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거나 오히려 방해했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당내 위상이 하락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같은 해 8월 베이다이허에서 열린 중앙공작회의에서 덩쯔후이(鄧子恢, 등자회) 등은 사회주의 정치 체제라는 당의 근본 문제에 대해 논의를 제기했다. 그들이 제기한 안건은 ‘대약진 정책’의 실패가 사회주의라는 정치 체제로 말미암은 것인지, 사회주의 체제를 계속 견지할 것인지 등등, 과거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것으로 당 원로들부터 마르크스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행위라는 질책을 받았다.
당시 중국을 둘러싼 국내외의 상황은 심각했다. 식량 위기로 인해 각지에서 치안의 문란과 말단 행정의 혼란이 일어났고, 농촌에서는 마오쩌둥이 사회주의의 타락으로 보고 있는 각 호별 단독 경영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4월에는 소련과의 접경지인 위구르 자치구의 소수 민족 6만 명이 소련의 카자흐 지방으로 도망치고, 5월에는 이리 지역의 위구르 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마오쩌둥은 이들의 배후에 소련이 있다고 의심하였다. 내몽골 자치구에서도 반란이 일어났으며, 10월에는 인도와의 국경 분쟁으로 군사 충돌이 일어났다. 나중에 오보로 밝혀지긴 했지만 어수선한 정국을 틈타 타이완의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해협을 건너 중국을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는 첩보도 입수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62년 9월 중국 공산당 제8기 10중전회가 개최되었다. 경제 정책 면에서는 9중전회에서 채택되었던 ‘농업을 기초로 하고 공업을 길잡이로 삼는다’는 슬로건을 공식적으로 승인함으로써 경제 조정기의 정치 · 경제의 기본 노선을 확립하고, 인민공사의 정돈과 온건 노선을 용인하는 등 회의의 기본 기조는 바로 전해에 열렸던 9중전회에서 확인했던 사항들을 재확인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정치면에서는 단호한 입장을 취했는데, 이 회의에서 발표된 「공보」는 이후 펼쳐질 문화대혁명의 일종의 복선이라 할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시기 전체를 통해 ‘복잡다단하고 곡절과 기복이 그치지 않는’ 계급 투쟁이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마오는 “계급 투쟁을 잊지 말라”고 호소하면서, 이 역사적 기간을 수십 년 혹은 더 장기간으로 예상하여 이 기간의 계급 투쟁이 ‘국외의 제국주의의 압력과 국내의 부르주아의 영향’을 받아 ‘어김없이 당내에 반영되어왔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것은 앞으로 다가올 좀더 가열찬 노선 투쟁을 예상케 하는 것이었다. 그 한 예로 본 회의에서 공안부장인 캉성(康生, 강생)이 제기한 리졘퉁(李建彤, 리건동)의 소설 『류즈단(劉志丹, 유지단)』에 대한 비판을 들 수 있다. 류즈단은 장정 중에 가오강(高崗, 고강)과 함께 산 · 간 · 닝 변구(陝甘寧邊區, 섬감녕변구)에서 혁명 기지를 구축하다 전사한 인물로, 당시 그의 영웅적 일대기가 소설화되어 일부가 《공인일보(工人日報)》에 연재되고 있었다. 캉성은 이 소설이 1954년 반당분자로 숙청된 가오강의 판결을 번복하고 그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씌어진 것이라 비판했다. 캉성의 비판을 접한 마오쩌둥은 이에 동조해 소설 『류즈단』 비판을 부추겼고, 이로 인해 소설이 연재되었던 《공인일보》의 관계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어 잔혹한 처벌을 받았다.
10중전회가 끝나고 당권파인 마오쩌둥과 린뱌오, 캉성 등이 실권파인 류사오치, 덩샤오핑, 천윈 등과 갈등을 빚어 정국이 긴장 상황에 놓이자, 마오쩌둥의 부인인 쟝칭(江靑, 강청)이 앞서 말한 연극 〈하이루이의 파면〉을 정치 문제화하여 상대를 제압하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연극을 직접 보고 ‘하이루이를 배우자’는 구호까지 제기했던 장본인이었던지라 불과 1년 남짓 시간이 흐른 시점에 자신의 견해를 180도 뒤집는다는 것은 실제로 난감한 일이었다.
해가 바뀌어 1963년 5월이 되자 마오쩌둥은 좀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갔다. 5월 9일 마오는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세 가지 위대한 혁명 투쟁’으로서 ‘계급 투쟁, 생산 투쟁, 과학 실험’의 3대 혁명운동의 중요성을 제기하였다. 5월 20일에는 이른바 전(前)10조라 불리는 「당면한 농촌 공작에 있어 약간의 문제에 관한 중공 중앙의 결정 초안」을 지도하여 사회주의 교육 운동에 있어서의 당의 정책 방침을 지시하였다. 여기서 마오는 “선진적 계급을 대표하는 올바른 사상은 일단 대중에게 파악되면 사회를 개조하고 세계를 개조하는 물질적 역량으로 전변한다”고 발언했다.
이것은 1962년에서 63년에 걸쳐 공산당이 경제 축소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농촌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간부들이 지위를 남용하는 등의 폐단이 나타나자 중국 사회에 사회주의의 기본적 가치들을 재도입하기 위해 새롭게 종합적인 사업을 시작하자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4청 운동(四淸運動)각주4) 이 시행되었는데, 이것은 ‘회계 절차’와 ‘곡물창고의 재고’, ‘재산 축적’, 그리고 ‘공사에서 수행한 노동 시간과 종류에 따른 작업 보상 점수의 할당’을 점검하는 운동을 말한다.
10중전회의 노선에 따라 마오쩌둥 사상을 학습하고 적용하는 ‘사회주의 교육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때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것이 린뱌오가 이끄는 인민해방군이었다. 린뱌오는 군을 장악한 뒤 철저한 사상 개조 운동을 벌여나갔다. 이를 위해 그는 마오쩌둥이 지난 30여 년 동안 발표한 수많은 논문과 글들 가운데서 경구가 될 만한 것들을 모아 『마오 주석 어록』을 만들어 인민해방군이 학습하고 토론하도록 했다. 1963년 2월 2일부터 27일에는 전군 정치공작회의가 열렸는데, 여기서는 2년 전인 61년부터 시행되어 온 ‘정치 사상이 좋고(好)’, ‘3·8작풍각주5) 이 좋고’, ‘군사 훈련이 좋고’, ‘생활 관리가 좋다’는 이른바 ‘4호 중대 운동(四好中隊運動)’이 높이 평가되었다.
비슷한 시기인 2월 5일 《인민일보》에는 레이펑(雷鋒, 뇌봉)에게 배우라(向雷鋒學習)는 마오쩌둥의 훈시가 실렸다. 빈농 출신인 레이펑은 1960년에 인민해방군에 입대했다가 62년 8월 교통사고로 사망했는데, 그가 죽은 뒤 한 권의 일기장이 발견되었다. 그 내용은 어릴 때 일본군에 의해 부모를 잃고 유리걸식하던 레이펑에게 당과 마오 주석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어 오늘날 행복하게 살고 있으며, 이 모든 게 마오 주석의 덕분으로 이 은혜를 갚기 위해 당과 마오 주석과 인민에게 온 몸을 바쳐 봉사할 것을 맹세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실 인민해방군 선전 작가들이 공동으로 지어낸 허구였으나, 《인민일보》에 소개된 레이펑의 이야기를 본 마오쩌둥이 「레이펑을 학습하자」는 글을 발표하자 전국적으로 레이펑 열기가 타올랐다.
1964년 2월 1일의 《인민일보》에는 “전국은 해방군을 배워야 한다”는 호소를 담은 사설이 실렸다. 5월에는 린뱌오의 지시에 의해 작성된 『마오 주석 어록』이 해방군뿐 아니라 널리 온 나라에 퍼져나갔다. 1962년 초 린뱌오에 의해 제기되었던 마오에 대한 개인 숭배의 속편은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류사오치와 그의 측근 인사들은 이러한 상황을 교묘하게 대처해 나갔다. 그들은 겉으로는 마오의 지시에 적극적으로 따르는 체하면서 실제로는 마오의 지시를 왜곡했다. 우선 마오의 ‘전10조’의 자구를 바꾸어 ‘후10조’(원래 명칭은 〈농촌의 사회주의 교육 운동에 있어 약간의 구체적인 정책에 대한 당 중앙의 결정〉)를 발표했는데, 그 첫머리에서 전10조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선언하고 후10조는 어디까지나 전10조를 보충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전10조의 결정을 시행에 옮기는 데 있어 많은 단서를 달고 있었는데, 그 주요한 흐름은 ‘사회주의 교육 운동’의 전개 속도를 완만하게 유지하자는 데 있었다. 이를테면, 후10조 가운데 제3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중들 사이에서 사회주의 교육을 시행할 때 결점이나 과오가 있는 자에 대해서는 단결-비판-단결의 방법만을 취해야 하며, 대회를 열어서 투쟁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고, 멋대로 딱지를 붙이는 행동은 금한다.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더욱 안 된다. 몇몇 지방에서는 한때 되는 대로 사람을 체포해서 대중 앞에서 마구 모욕을 주고 형벌을 가하고. 법률을 위반하여 규율을 문란하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었다. 이러한 사건은 개별적인 현상이지만 충분히 유의해야 한다.
이것은 ‘사회주의 교육 운동’을 법의 테두리 안에서 온건하게 진행시키자는 것으로, 전10조를 혁명적 계급 투쟁을 전제로 하는 초사법적인 대중 운동으로 확대해 나가려 했던 마오쩌둥의 의도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류사오치 등이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대중 발동을 기본으로 하는 사회주의 교육 운동을 상부로부터 파견된 공작조에 의한 감찰 강화로 바꾸는 것이었다. 이를 직접 실행에 옳긴 것이 류사오치의 부인인 왕광메이(王光美, 왕광미)의 사례이다.
왕광메이는 1963년 11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허베이 성의 타오위안(桃園, 도원)에 가서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지역 당 간부들의 부정과 농민들 사이에 퍼져 있는 자본주의의 싹들을 발견해 류사오치에게 보고했다. 류사오치는 죄인들에 대한 대중적 투쟁을 지시하여 타오위안의 간부들 47명 가운데 40명이 공식적으로 비판당하거나 면직 당했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행위들에 대한 마오쩌둥의 태도는 단호했다.
류사오치는 중국 공산당의 비리의 시정은 당 내부의 문제이며, 대중의 눈으로부터 위신을 지키기 위해서 당원 자신이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마오쩌둥은 만약 당이 심각하게 취약해진 모습을 보인다면 공개적인 토론과 비판을 통해 교화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그 과정에는 ‘대중’도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마오쩌둥은 류사오치와 그의 친구들이 ‘사청’이나 비교적 작은 경제적 과오에 집중함으로써 문제의 핵심에서 빗나가고 있는 반면, 자신은 진정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에 대항하기에 알맞은 사회주의 운동을 요구하고 있다고 믿었다.조너선 D. 스펜스, 『현대중국을 찾아서 2』, 182쪽.
마오가 제시했던 모범적인 사례는 공업 면에서는 헤이룽쟝 성에 위치한 다칭(大慶, 대경) 유전의 개발이고, 농업 면에서는 산시 성(山西省, 산서성) 소재의 다자이(大寨, 대채) 생산대대의 모범적인 운영이었다. 마오는 이 두 곳의 사례를 1964년에 이르면 중단 상태에 놓였던 관료주의와 수정주의를 벗어나려는 운동의 ‘선진적인 모델’로 제시했다. 1964년 말 마오쩌둥은 실권파들에 대해 비판을 좀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전국공작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는 이듬해까지 이어져 65년 1월 14일 마오쩌둥이 초안한 「농촌의 사회주의 교육에서 제기된 약간의 당면 문제」(이른바 ‘23개 조’)라는 짤막한 문서를 채택했다. 이것은 앞서 제기한 ‘사회주의 교육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실제로는 미구에 밀어닥칠 ‘문화대혁명’의 신호탄과 같은 성격을 가진 일종의 선언문이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23개 조’의 제2조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교육 운동’의 중점이 당내에서 자본주의의 길을 걷고 있는 실권파를 공격하는 것에 있다고 선언하고, 지방 간부는 더 이상 운동의 대상이 아니고, 이제는 아래로부터의 통제가 상부에 의한 통제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한 것이다.
군부 내에서도 이와 같은 갈등 양상이 나타났다. 1964년 8월 2일 미국은 북 베트남의 통킹만에서 군사 도발을 감행했다. 8월 6일 중국은 미국의 북 베트남 침략이 중국에 대한 침략을 의미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10월 16일 중국은 첫 번째 핵실험에 성공했다. 소련에서 흐루시초프가 실각한 지 이틀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핵실험이 핵무기의 실전 배치로 이어지는 데에는 몇 년이 더 필요했고, 그 사이 핵무기의 확산을 우려한 미국의 선제 공격이 제기될 위험이 있어 오히려 중국은 핵실험 성공 후 이에 대비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그들 앞에 놓인 것은 두 가지 길이었다. 하나는 아시아 · 아프리카 지역의 무장 투쟁을 고무하는 동시에 자력 갱생에 의한 중국 국방력의 증강을 도모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소련과의 연대를 강화해 군의 근대화를 도모하는 것이었다. 마오쩌둥과 린뱌오의 생각은 전자에 기울었다. 1964년 12월 21일부터 다음해인 65년 1월 4일에 걸쳐 열린 제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회 회의에서는 자력갱생의 기본 방침 하에 중국을 현대 농업, 현대 공업, 현대 국방, 현대 과학기술을 구비한 사회주의 강국으로 건설한다는 목표가 제시되었다.
1965년 2월 7일 미국은 북 베트남에 대해 북폭을 개시함으로써 베트남에서의 전쟁이 확대되었다. 중국 내의 위기감이 고조됨에 따라 이에 대한 대응 방안을 놓고 국방부장 린뱌오와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뤄루이칭(羅瑞慶, 나서경) 사이에 날카로운 신경전이 벌어졌다. 먼저 입장을 밝힌 것은 뤄루이칭이었다. 뤄는 그 해 5월에 발표한 「반파시스트 전쟁의 역사적 경험」이라는 글에서 기본적으로는 마오쩌둥과 린뱌오를 옹호하는 입장을 앞에 내세우되, 미국의 군사적 우위를 현실적으로 인정하면서 중국 정규군의 장비와 기술, 훈련의 향상을 우선적으로 고려해 소련과의 관계 개선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린뱌오는 9월 3일 발표한 「인민전쟁의 승리 만세」라는 글에서 미국의 활동 영역이 전 세계에 걸쳐 너무 넓게 뻗어 있어 보급선이 길어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어떤 선진국보다 약체라고 분석하고, 이에 아시아 · 아프리카 · 중남미 민중의 반미 투쟁에 기대를 걸고, 민병을 주력으로 한 자력 갱생의 국방을 강조해 미국을 제압하자고 주장했다. 린뱌오의 주장은 “일견 적극적으로 보이나 결과적으로는 중국을 가능한 한 베트남전쟁에 휘말려들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으며, 뤄루이칭의 생각은 “일견 방위적으로 보이나 현실적으로는 소련과의 연대 하에 베트남전쟁에 깊숙이 개입하게 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각주6)
결국 베트남전쟁은 린뱌오가 예상한 대로 흘러갔다. 미국은 대량의 지상군을 베트남전선에 투입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중국에 대한 직접적인 침략의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1965년 5월 인민해방군은 10여 년 동안 시행해온 소련식 계급 제도를 폐지하고 모든 계급장과 훈장을 없애는 극단적인 평등주의 방안을 도입해 모든 군이 붉은 5각성의 모표와 붉은 금장을 붙이게 했다. 더 이상 제복으로는 장교와 사병의 구분이 없어졌고, 군대 내의 일상적인 업무도 공동으로 분담하게 되었다.
쟝칭을 위시한 일파의 우한에 대한 공격은 집요했다. 이미 1962년 9월 중국 공산당 제8기 10중전회가 끝난 뒤 쟝칭이 이 연극을 마오쩌둥의 반대파를 제거하는 빌미로 삼자고 제안한 이래 그들은 끊임없이 마오쩌둥에게 이 연극을 정치 문제화할 것을 요구했다. 마오쩌둥의 마음이 결정적으로 돌아선 것은 정치국원인 캉성(康生, 강생)마저 이 극을 ‘루산회의’와 결부시켜 설명했기 때문이었다. 1965년 1월 쟝칭은 상하이 시 당 위원회 서기인 장춘챠오(張春橋, 장춘교)를 불러 마오의 실권을 만회하기 위해 반대파를 제거할 것을 극비리에 모의했다. 쟝칭과 창춘챠오는 당시로서는 무명 인사에 불과했던 야오원위안(姚文元, 요문원)을 불러 연극 〈하이루이의 파면〉을 ‘루산회의’와 결부시켜 비판의 근거로 삼아 베이징 시 당 위원회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같은 해 6월부터 7월에 걸쳐 베이징에서는 현대 경극대회가 열려 ‘경극 현대화 운동’이 제기되었다.
여기서 쟝칭은 〈경극 혁명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종래의 경극 주인공들은 모두 왕후장상이나 재자가인이 아니면 요괴들이라고 공격했다. 그러나 정작 회의를 주도한 것은 실권파들로 이들은 쟝칭의 급진적인 개혁 노선을 봉쇄하기 위해 거꾸로 회의를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갔다. 9월에서 10월 사이에는 당 중앙 공작회의가 열렸는데, 이 회의에서 60년대 전반을 통해 잠재되었던 당내의 대립과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때 마오쩌둥은 소수파였다. 마오는 이 회의에서 우한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며 그를 비판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펑전 등은 겉으로는 마오의 의견에 따르는 듯했으나 결국 그의 지시를 묵살했고, 마오의 발언은 신문 지상에도 보도되지 않았다. 마오는 회의석상에서 “베이징에서는 나의 의견이 실현될 수 없다고 느껴진다”로 발언했다. 마오쩌둥은 심각한 위기 의식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 해 11월 마오쩌둥은 돌연 베이징을 떠나 공식석상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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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 책은 자매편이라 할『중국사 강의』의 후속편이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부터 1997년 홍콩 반환까지를 다루고 초강대국으로 변모한 중국의 현대사를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