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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의 서막과 홍위병의 등장
1965년 11월 10일 야오원위안(姚文元, 요문원)이 우한(吳晗, 오함)의 〈하이루이의 파면〉을 비판하는 글을 《문회보(文匯報)》에 실었다. 물론 야오원위안이 비판한 1차 대상은 우한 개인이 아니었다. 우한은 베이징 시 부시장이자, 베이징 시 당 위원회와 중국 중앙당 선전부 내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지식인이었고, 덩퉈, 랴오모사(廖沫沙, 요말사)와 더불어 ‘삼가촌(三家村)’ 그룹을 이끌 만큼 베이징 언론계에서 확고한 기반을 갖고 있었다. 그의 배후에는 베이징 시장이자 베이징 시 당위원장인 펑전과 당 선전부장인 루딩이, 그리고 국가 주석 류사오치가 있었다.
야오원위안의 비판의 예봉이 향한 것은 바로 이들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반 마오쩌둥 집단이었다. 베이징을 떠나기 전 마오쩌둥은 바로 이들이 자신의 정책 실패를 비판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비밀 보고를 받고 분노했던 것이다. 마오는 이들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으로 당시 군부를 장악하고 있던 린뱌오와 상하이 시 당 위원회밖에 없다고 판단해 상하이로 향했던 것이다. 마오의 충복인 국방부장 린뱌오는 야오원위안의 글을 《해방군보(解放軍報)》에 전재했다. 이제 마오쩌둥을 지지하는 일파와 반대파 간의 일전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해가 바뀌어 1966년 2월 양측은 거의 동시에 회합을 가졌다. 당 원로이자 베이징 시장이며 정치국 상무위원인 펑전은 ‘문화혁명 5인 소조’라는 모임을 구성해 「현재 학술적 문제에 관한 대강」, 또는 흔히 ‘2월 대강’이라 부르는 글을 발표해 〈하이루이의 파면〉에 대한 논란이 정치 문제가 아니라 순수한 학술 문제라는 점을 부각시키며, 이에 대한 비판은 지나친 것이라 주장했다. 쟝칭과 인민해방군 소속 문화 일꾼들은 상하이에서 회합을 갖고 마오쩌둥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마오의 사상에 반대하는 반당파와 반사회주의자의 책동으로 중국 문화의 정원이 ‘반사회주의라는 독초’로 뒤덮였다고 경고했다.
이때 무엇보다 마오쩌둥 지지 세력의 큰 힘이 되었던 것은 린뱌오가 장악하고 있던 인민해방군이었다. 같은 해 2월 2일부터 20일까지 쟝칭은 린뱌오의 후원 하에 각 군 부대의 문예공작자들을 비밀리에 소집해 좌담회를 열어 인민해방군이 ‘문화혁명 투쟁 과정에서 훌륭하게 지도적 역할을 수행’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온갖 회유와 협박을 통해 마오쩌둥에 대한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1966년 3월 류사오치 부부는 서남아시아 3개국 방문을 위해 중국을 일시 떠났다. 그 사이 정세는 일변해 군내 실권파 리더였던 뤄루이칭이 해임되었고 베이징은 린뱌오가 지휘하는 군의 통제 하에 놓였다. 3월 22일 린뱌오는 중앙군사위 상임위에 「린뱌오 동지가 중앙군사위 상임위에 보내는 편지」를 보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6년 동안 문예 전선에는 첨예한 계급 투쟁이 존재하여 누가 누구를 이기는가의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문예라는 이 진지는 무산계급이 아직 점령하지 못하고 자산계급이 확실히 점령하고 있어 투쟁이 불가피하다.
이것은 신중국 수립 이후 반당 · 반혁명분자들에 의해 점령당한 문예계에 대한 투쟁을 시작하는 선언문이었다. 또 마오쩌둥은 “작은 악귀들을 해방하기 위해 염라대왕을 타도하자”는 말로 각 급 단위에서 간부들이 자신의 상급자를 비판할 것을 호소했다. 4월 16일에는 2월에 열렸던 ‘좌담회’의 내용이 〈린뱌오 동지가 쟝칭 동지에게 위탁해 소집한 부대의 문학 · 예술 활동에 관한 좌담회 기요〉라는 제목으로 당내에 보고되었고, 뒤이어 18일에는 《해방군보》에 「마오쩌둥 사상의 위대한 붉은 깃발을 높이 들고 사회주의 문화대혁명에 적극 참가하자」라는 제목의 사설이 실리면서 처음으로 그때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으로 공식 규정했다.
1966년 5월 4일부터 26일까지 베이징에서는 중앙정치국 확대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는 류사오치가 주재했으며, 쟝칭과 장춘챠오 등 76명이 참석했다. 마오쩌둥은 고의로 이 회의에 불참했는데, 회의 기간 중 캉성을 통해 자신의 명령을 내려보냈다. 5월 7일 마오쩌둥은 「린뱌오 동시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뒤에 문화대혁명의 기본 방침이 되었던 이른바 5·7지시를 내렸는데, 여기서 마오는 인민해방군이 거대한 학교가 되어 군사뿐 아니라 정치를 배우고 생산에 종사하며 ‘사회주의 교육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뒤이어 5월 8일 자 《해방군보》에는 가오쥐(高炬, 고거)각주1) 의 「반당 · 반사회주의 반동 노선을 향해 발포하자」는 글이 실렸고, 5월 10일 자 상하이의 《해방일보》와 《문회보》에 야오원위안의 「‘삼가촌찰기’를 평함-「연산야화」와 「삼가촌찰기」의 반동 본질」이라는 글이 발표되는 동시에, 다음 날인 11일자 《인민일보》에도 전재되었다. 쟝칭과 캉성, 장춘챠오는 ‘5인 문화혁명소조를 해산하라’, ‘중앙선전부와 베이징 시 당 위원회를 해산하라’는 구호를 제창했고, 국방부장인 린뱌오는 이미 해임된 전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뤄루이칭을 ‘군권을 장악해 반당 행위를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했다.
1966년 5월 16일 본 회의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통지〉, 곧 이른바 5·16통지가 채택되어 공포되었다. 사실상 이 통지의 초안은 이미 4월 중순에 천보다(陳伯達, 진백달)와 캉성이 기초해 마오쩌둥에게 올려 몇 차례 수정을 거친 뒤 4월 24일의 정치국 상무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승인을 받은 것이었다. ‘5·16통지’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펑전을 위시한 ‘문화대혁명 5인 소조’를 해체하고 ‘2월 요강’을 폐지하며, 새롭게 ‘중앙 문화혁명 소조’를 수립해 중앙정치국 당무위원회 아래에 두어 훨씬 더 큰 권력을 부여한다. 그들은 자산계급의 입장에 서서 적과 아군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전도시키고 사회주의 혁명의 철저한 진행을 반대했으며, 마오쩌둥을 비롯한 당 중앙의 문화혁명 노선을 반대하는 자본주의 복귀에 대한 여론을 준비했다. ‘2월 요강’이야말로 자산계급 사상의 당내에서의 반영이고 철저한 수정주의이다.
둘째, 이미 당과 정부 · 군대 및 사회 각 계에 들어와 있는 반당 · 반사회주의의 자산계급 대리인들은 ‘반혁명 수정주의 분자’들로 일단 시기가 무르익으면 정권을 탈취할 것이다. 당은 현재 매우 위험한 상태에 직면해 있으며 흐루시초프와 같은 수정주의자가 우리 곁에 있고, 또 그런 자들이 우리의 계승자로 배양되고 있다.
셋째, 모든 학술 권위자들의 자산계급적 반동적 입장을 철저히 폭로하고 학술계와 교육계, 언론계, 문학예술계, 출판계의 자산계급 반동 사상을 철저히 비판해 문화 영역에서의 무산계급의 영도권을 탈취해야 한다.
여기서 ‘흐루시초프와 같은 수정주의자’는 명백하게 류사오치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새롭게 구성된 ‘문화대혁명 소조’의 조장으로는 천보다가, 부조장은 쟝칭이 임명되었다. 5·16통지로 운동의 대상이 문화적 측면에서 정치권력적 측면으로, 베이징이라는 한 지역의 일에서 전 국가적인 사안으로 전환되었다.
5월 18일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린뱌오는 “마오 주석은 천재이고, 마오 주석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옳다. 마오 주석의 한마디는 다른 사람의 만 마디 말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또 베이징 시장 펑전은 권력을, 전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뤄루이칭은 군권을, 중앙선전부장 루딩이는 문화전선 · 사상전선을, 중앙판공청 주임 양상쿤(楊尙昆, 양상곤)은 기밀과 정보 연락 등을 담당하여, 펑전을 수괴로 한 반당 집단을 형성하고 반혁명을 획책하였다고 공격했다. 바로 그날 베이징 시 당위 서기이며 「연산야화」의 필자이고, 「삼가촌찰기」의 공동 집필자인 덩퉈(鄧拓, 등탁)가 체포되어 살해됐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당 중앙의 실권파를 제거하는 데 린뱌오가 지휘하는 인민해방군을 동원하는 것만큼은 피하려 했다. 마오쩌둥이 보기에 이 운동은 정부와 당 조직을 넘어서 기층 인민으로부터 출발해야 했다. 가장 먼저 마오의 뜻에 호응한 것은 젊은 학생들이었다. 5월 25일 캉성의 사주를 받은 베이징대학의 철학과 조교이자 학과 당서기인 녜위안쯔(聶元梓, 섭원재) 등 7인의 명의로 베이징대학 총장 루핑(陸平, 육평)과 베이징대학 당 위원회와 베이징 시 당위를 반당 · 반사회주의 반동파라고 비판하는 대자보가 학내에 나붙었다. 곧이어 캉성은 칭화대학 화학과 학생인 콰이다푸(蒯大富, 괴대부)를 사주해 교수들을 비판하는 대자보를 붙이고 학생들을 선동해 교수와 지식분자들을 공격하게 했다. 5월 29일에는 칭화대학 부속중학교에서 최초의 홍위병 조직이 탄생했다. 당시 항저우에 있던 마오쩌둥은 이 대자보를 가리켜 “20세기 60년대 중국에서의 ‘파리 코뮌 선언서’”라고 칭송하고 즉시 전국에 알릴 것을 지시했다.
류사오치 등 실권파는 일련의 사태에 대한 대책 마련에 나섰다. 6월 3일 당 중앙은 베이징 시 당위원회를 개편할 것을 결정하고 제1서기 펑전과 제2서기 류런(柳仁, 유인)을 해임했다. 후임에는 리쉐펑(李雪峰, 이설봉) 화북구 제1서기와 우더(吳德, 오덕) 지린성 제1서기를 각각 임명했다. 개편된 시 당위원회는 곧바로 베이징대학 당 위원회 서기 루핑 등을 해임하고, 당위 개편 기간 중 그 직권을 대행하기 위해 장청셴(張承先, 장승선) 등의 공작반을 베이징대학에 파견할 것을 결의했다. 이 결정에 새롭게 구성된 문화혁명 소조 조장 천보다와 마오쩌둥은 반대했다. 그러나 당시 마오는 여전히 베이징을 벗어나 있었고, 류사오치의 영향력도 아직은 남아 있었기에 6월 14일 500명 이상의 공작반이 베이징대학으로 향했다. 각 대학과 중학 등의 단위 위원회가 개편 작업에 들어가 기관장들이 모두 면직되는 일대 파란이 일어 모든 업무가 마비되어 각급 학교의 입학시험도 연기되었다.
마오쩌둥 역시 외부에서 사태의 진행을 관망할 수만은 없었다. 마오는 5월 이후 당 중앙과 각급 당 조직 지도 간부들이 자신의 과격한 움직임을 저지하려 하는 것을 알고 그들을 제거시키기 위해 당 중앙위원회의 개최를 서둘렀다. 오랜 지방 여행을 끝내고 베이징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 마오는 류사오치에게 회의 개최를 통지한 뒤 7월 16일 신해혁명의 단초가 되었던 ‘우창 봉기’가 일어났던 우한 부근의 양쯔 강에서 1시간 남짓 수영을 했다. 이것은 마오 자신의 건강을 과시함과 동시에 류사오치 일파의 반격으로 일시 곤경에 빠진 조반파를 격려하는 뜻이 담긴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7월 18일 베이징에 돌아온 마오는 각급 학교에 파견되어 있는 공작반의 철수를 지시했다.
7월 27일 홍위병 대표단이 마오에게 공식적인 서한을 보내 자신들의 ‘반란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造反有理)’는 것을 주장했고, 8월 1일 마오는 이들의 선언에 대해 “베이징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문화대혁명 운동 중에 너희들과 같이 혁명의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들은 일률적으로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고 말했다. 같은 날 제8기 11중전회가 베이징에서 개최되었는데, 이 회의는 참석자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는 않았고, 나아가 대학과 고등학교의 교원과 학생 대표들도 참석한 매우 이례적인 성격의 대회였다. 회의 기간 중인 8월 5일 마오는 갑자기 〈사령부를 포격하라-나의 대자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8월 7일 회의에서 쟝칭은 마오가 말한 ‘사령부’에 대해 설명하면서, 베이징에는 두 개의 사령부가 있으니, 하나는 자산계급을 대표하는 사령부이고 다른 하나는 무산계급을 대표하는 사령부로 마오가 포격하고자 한 것은 바로 전자라고 말했다.
11중전회가 끝나기도 전인 8월 8일에는 당 중앙의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16개 조’)이 발표되었다. 중요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이 ‘16개 조’가 발표되었다는 사실로 이들 조반파의 조급증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엿볼 수 있다. ‘16개 조’에서는 문화대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의 신단계’라 규정하고,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의 타도가 당면 목표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투쟁과 비판, 개혁’을 호소했다.
당면한 우리들의 목적은 자본주의의 길을 가고 있는 당권파각주2) 와 투쟁하고, 자산계급의 반동학술 ‘권위’를 비판하며, 자산계급과 모든 착취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이다.······이번 운동의 중점은 당내의 자본주의의 길을 가고 있는 당권파를 정리하는 것이다.······한 큰 무리의 이름 없는 혁명 청소년들이 용감한 선봉장이 되었다. 그들의 혁명의 큰 방향은 시종 정확한 것이다.
주목할 것은 언론과 표현, 결사의 자유를 보장한 15조와 16조로, 특히 16조에서 규정한 자유는 뒤에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의 ‘대민주(大民主)’의 ‘4대 자유’, 곧 ‘자유롭게 말할 권리(大鳴)’와 ‘자신의 견해를 발표할 수 있는 권리 또는 다른 사람과 단결할 수 있는 권리(大放, 大串聯)’, ‘대자보를 쓸 수 있는 권리(大字報)’, 그리고 ‘논쟁을 할 수 있는 권리(大辯論)’였다. 이때만 해도 아직까지 냉정을 잃지 않았던 지도자들이 있어 토론이 강요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논리에 의해 진행되어야 한다든지, 과학자나 기술자에 대해서는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등의 항목이 첨가되었다. 이렇게 규정된 자유들에 의거해 홍위병들은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마오쩌둥주의자가 아닌 모든 사람을 비판했고, 때로는 부패 혐의로 고발하여 감옥에 보내거나 실각시켰다.
나아가 이 결정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던 학생 운동이 노동자나 농민, 그리고 병사들의 집단이 참여하는 전국 규모의 대중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이를 위해 ‘대자보’와 ‘논쟁’이 활용되었으며, 여기서 ‘낡은 사상(舊思想)’, ‘낡은 문화(舊文化)’, ‘낡은 풍속(舊風俗)’, ‘낡은 관습(舊習慣)’의 ‘네 가지 낡은 것(四舊)’의 척결이라는 목표가 제시되었다. 회의 마지막 날인 12일에는 중앙 영도 기구의 개편이 이루어졌는데, 펑전과 뤄루이칭, 루딩이, 양상쿤이 중앙서기처 서기와 후보서기의 직무에서 해직되었다. 그 대신 린뱌오의 공적이 크게 강조되어 중앙정치국 당무위원회 선거에서 린뱌오가 2인자로 부상하고 류사오치는 여덟 번째로 떨어졌으며, 주석과 부주석의 임명이 없어졌다.
8월 18일 베이징 중심부 톈안먼광장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100만 인의 ‘혁명적 대중’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축하대회가 열렸다. 『마오 주석 어록』을 손에 들고 붉은 완장을 찬 홍위병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어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만세”, “마오 주석 만세”를 외쳤다. 마오쩌둥과 린뱌오, 저우언라이 등의 지도자가 모두 나와 홍위병을 맞이했고, 마오는 홍위병 대표에게 홍위병 휘장을 수여했다. 8월 20일 밤 홍위병 시위대는 톈안먼광장에서 베이징의 번화가인 왕푸징(王府井, 왕부정)으로 이동해 ‘광란의 파괴’를 시작했다. 중국의 유서 깊은 전통적인 사적지나 골동품 점, 음식점, 고서점 등이 그 대상이었으며, 그들은 거리의 표지와 상점 간판을 멋대로 뜯어내고 거리 이름을 바꾸었다.
‘왕푸징’은 ‘거밍다루(革命大路, 혁명대로)’로, 외국 대사관들이 밀집해 있던 ‘둥쟈오민샹(東交民巷, 동교민항)’은 ‘판디루(反帝路, 반제로)’로 바꾸었다. 이어 대학교수나 작가, 예술가, 과학자, 종교인, 민주당파의 인사 등 지식인들을 잡아내 ‘우귀사신(牛鬼蛇神)’이라는 팻말을 목에 걸게 하고 거리와 골목에서 조리돌림을 해 모욕을 주는 한편, 그들이 소장하고 있던 책과 자료들도 몰수하여 불살라버리거나 파괴했다. 8월 24일 저명한 소설가이자 희곡 작가인 라오서(老舍, 노사)가 홍위병의 핍박을 받고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8월과 9월에만 베이징에서 1,772명이 살해되었고, 상하이에서는 704명이 자살하고 534명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당 중앙은 일견 그러한 과격성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방관했다. 9월 5일에는 마오가 모든 홍위병이 베이징을 순례하도록 권장하는 통지문을 발표했다. 이들의 숙박비와 교통비는 모두 정부가 부담한다는 것이었다. 10월에 접어들어서는 밀려드는 홍위병들을 수송할 교통 수단이 부족해 도보로 베이징을 향하는 홍위병들이 나타났고, 이들이 묵을 숙소도 태부족일 지경이었다.
10월 1일 건국 17주년 국경절 축하대회 때 《신화사 통신》은 톈안먼 성루에 오른 사람들의 명단을 열거하며, “마오 주석과 그의 친밀한 전우인 린뱌오 동지, 그리고 당과 국가의 주요 책임자 류사오치, 쑹칭링, 둥비우(董必武, 동필무), 저우언라이, 타오주(陶鑄, 도주), 천보다, 덩샤오핑······” 등을 언급했다. 이때까지 류사오치 등은 아직 형식상 그 지위가 인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0월 8일부터 25일에 걸쳐 열린 중국 공산당 중앙공작회의에서 류사오치 등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린뱌오는 보고에서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노골적으로 지칭하며 대약진 운동 이후 마오 주석의 정책을 반대해온 자산계급 반동노선의 대표라고 공격했다. 사세불급의 처지에 놓인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자아비판을 했고, 마오는 이들의 자아비판을 받아들이는 듯한 결론을 내렸으며, 11월 25일에는 홍위병 집회에 이들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그러나 12월이 되자 사태는 급변해 중앙정부의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베이징 시 당위의 펑전, 완리(萬里, 만리), 중앙선전부와 군 · 당의 루딩이(陸定一, 육정일), 뤄루이칭(羅瑞慶, 나서경), 양상쿤(楊尙昆, 양상곤) 등이 홍위병의 대중집회에 끌려나가 이른바 ‘투쟁’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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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출처
이 책은 자매편이라 할『중국사 강의』의 후속편이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부터 1997년 홍콩 반환까지를 다루고 초강대국으로 변모한 중국의 현대사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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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의 서막과 홍위병의 등장 – 중국현대사 강의, 조관희, 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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