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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쟝졔스를 핍박하여 항일에 나서게 하다
시안 사변
1936년 12월 12일 새벽 5시 반 동북군의 한 부대가 쟝졔스가 머물고 있던 시안(西安, 서안) 교외의 휴양지인 화칭츠(華淸池, 화청지)를 급습했다. 극소수의 호위병만을 데리고 있던 쟝졔스는 반란이 일어났다는 걸 직감하고 잠옷 바람으로 뒷산으로 달아났다. 바위 아래 동굴에 웅크리고 있던 그는 수색대에 의해 체포되어 곧바로 시안으로 호송되었다. 그날 밤 장쉐량(張學良, 장학량)과 양후청(楊虎城, 양호성)은 전국에 전통문을 보내 쟝졔스의 생명을 보장하는 동시에 8가지 요구 사항을 공표했는데, 그 내용은 ‘내전을 중지하고 일치 단결해 항일에 나선다(內戰停止, 一致抗日)’는 것으로 요약된다.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비록 자신의 근거지인 동북 지방에서 쫓겨나긴 했지만, 장쉐량은 국민당 내에서 쟝졔스 다음가는 명실상부한 2인자였다. 쟝졔스가 소수의 경호병들만 대동하고 장쉐량의 진영을 찾은 것도 그를 누구보다 신임했기 때문이었다(시안 사변).
장쉐량은 자신들이 쟝졔스를 체포한 것이 아니며, 그에게 최후의 간언을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를 시안에 머물게 한 것이라고 강변했다. 사전에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던 중국 공산당 내에서도 이 사건을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는데, 12월 15일 모스크바에서 한 통의 전문이 전해졌다. 이것은 스탈린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그는 민족통일전선을 지지하지만 장쉐량이 그것을 이끌 만한 힘이나 재능이 있다고 여겨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간에 쟝졔스가 저지른 중국 공산당에 대한 갖은 탄압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쟝졔스에 대한 신뢰를 놓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스탈린은 ‘시안 사변’이 중국을 분열시키고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일본이 꾸며낸 일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스탈린은 중국 공산당이 그의 석방을 도와야 한다고 지시했다. 12월 16일 장쉐량은 대책 협의를 위해 중국 공산당 측의 저우언라이와 예졘잉(葉劍英, 엽검영), 친방셴(秦邦憲, 진방헌) 세 사람을 시안으로 불러들였다.
난징정부는 대규모 군사 보복을 주장하는 쪽과 쟝졔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협상을 벌어야 한다는 쪽으로 나뉘었다. 다른 누구보다 쟝졔스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 송미령)이 쟝졔스를 살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었다. 쑹메이링은 일단 시안으로 쳐들어가야 한다는 국민당 내 강경파의 주장을 잠시 막아낸 뒤 곧바로 시안으로 날아가 장쉐량과 저우언라이를 만났다.
난징정부는 시안 공격을 위해 뤄양에 육군과 공군을 동원하는 한편, 쟝졔스의 고문인 W. H. 도널드를 시안으로 보냈는데, 그는 과거 장쉐량의 고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조정과 타협을 통해 평화해결파가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12월 19일 중국 공산당 중앙은 ‘화평회의 소집을 위한 제안’을 발신했다. 그 내용은 공산당 대표를 포함한 구국회의를 소집하고, 쟝졔스의 처리를 신중하게 논의하되 난징을 그 장소로 제안하는 것이었다. 협상은 12월 25일까지 계속되었다. 드디어 장쉐량의 호소에는 귀 기울이지 않던 쟝졔스가 저우언라이의 설득에 마음을 돌렸다.
이전까지 완강하게 그 어떤 제의에도 응하지 않던 쟝졔스는 쑹메이링과 그의 오빠인 쑹쯔원(宋子文, 송자문), W. H. 도널드, 그리고 사건의 당사자인 장쉐량에게 자신의 정책 방향을 바꾸고 현 상황을 제고하겠다는 ‘구두 약속’을 했다. 그 대신 자신이 “말한 이상 반드시 성실히 지킬 것이며, 행한 이상 그 결과가 있을 것(言必信, 行必果)”이라는 말을 남겼다. 장쉐량 측에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었으나 쟝졔스의 석방을 가장 반대하던 양후청마저 마음을 돌리자 결국 그를 석방하기로 결정했다.
12월 25일 오후 2시경 쟝졔스는 시안을 떠났다. 장쉐량은 자신의 행위의 동기가 순수했고 따라서 자신이 반역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쟝졔스의 비행기에 동승했다. 비행기는 하루 만인 26일 정오경에 난징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쟝졔스는 수많은 지지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쟝졔스는 난징에 도착하자마자 〈장쉐량과 양후청에 대한 훈계〉를 발표했지만, 여기에는 그의 석방을 놓고 어떤 타협이 오갔는지 전혀 나와 있지 않았다. 그래서 28일 공산당 중앙은 〈쟝졔스 성명에 대한 성명〉을 내놓고 쟝졔스가 장쉐량이 제시한 조건에 서명을 하지는 않았지만 일정한 약속을 지키겠다고 말한 것을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그 주요 내용은 향후 ‘공산당 토벌’을 중지하고 각 당과 파벌을 넘어선 구국회의를 소집하고 항일구국방침을 수립하겠다는 것이었다.
쟝졔스는 난징에 돌아오자마자 사표를 제출했으나 이듬해인 1937년 1월 2일 공식적으로 반려되고 그 대신 1개월 간의 휴가가 주어졌다. 장쉐량은 난징에 도착 즉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감형되어 10년의 금고에 처해졌다. 그 이듬해에 쟝졔스는 특사로 장쉐량을 풀어주었으나 실제로는 엄중한 감시 하에 그를 가택 연금했고, 이것은 쟝졔스 자신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세월이 흘러 언젠가 쟝졔스의 생일날 장쉐량은 쟝졔스에게 시계를 선물했는데, 그 답례로 쟝졔스는 낚싯대를 선물했다고 한다. 시계를 선물한 것은 세월이 흐른 만큼 자신을 풀어달라는 뜻이었는데, 낚싯대를 보낸 것은 아직도 어림없으니 낚시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라는 뜻이었다. 결국 장쉐량은 쟝졔스가 죽고(1975년) 그 아들인 쟝징궈(蔣經國, 장경국)도 죽은 뒤(1988년)인 1990년 6월 1일 연금이 해제되고 1993년 12월 15일 고령임을 감안해 44년 만에 대만을 떠나 미국으로 가도록 허용되었다.각주1)
‘시안 사변’이 일어난 것은 당시 일본의 군사적 압력이 그만큼 노골화되고 위협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반해 쟝졔스의 난징정부가 취한 정책은 가급적 일본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 인내심을 발휘해 온건하게 대처하는 것뿐이었다. 쟝졔스는 일본의 힘이 강대한 데 반해 중국은 허약하다는 이유로 일본군이 공세를 펼 때마다 굴복하고 오로지 ‘반공 투쟁’에만 올인했다. 그 사이 일본은 1933년에 맺은 ‘탕구 협정’에 의해 설정된 비무장지대를 확대해 허베이 성 일대까지 손에 넣으려 했다. 1935년이 되자 화북 지방에서는 배일 운동으로 인한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잇달았다.
급기야 1935년 5월 29일 지나 주둔군의 사카이 다카시(酒井隆)라는 일개 참모가 베이핑 군사분회 주임 허잉친(何應欽, 하응흠)을 방문해 배일 테러 사건을 감안해 국민당 당부와 중앙군 등이 화북 지역에서 철수할 것 등을 요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은 이 사항들을 상담하러 온 것이 아니고, 일본군의 단호한 결의를 통고하러 왔다.” 이 오만한 발언에 대해 국민당 정부가 취한 태도는 실로 어이없는 것이었다. 국민당 정부는 외교 경로를 통해 그것은 중국의 내정 문제에 속하는 것이고, 자발적으로 성 정부를 바오딩(保定, 보정)으로 옮겨 사태를 수습하고 싶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그러나 일본 측은 이것은 정전 협정에 관계된 군사 사항이니만큼 외교 교섭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하여 제안을 일축했다. 결국 이에 굴복한 국민당 정부는 6월 10일 이른바 우메츠 · 허잉친(梅津 · 何應欽) 협정을 맺어 일본의 요구에 굴복했다.
이것은 일본의 북부 중국 분리 작전의 일환으로 강행된 것으로 과연 그로부터 5개월 뒤인 1935년 11월 국민당 정부의 대일 창구 노릇을 하던 인루겅(殷汝耕, 은여경)이 주축이 되어 ‘지둥방공자치위원회(冀東防共自治委員會)각주2) ’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12월에는 다시 쑹저위안(宋哲元, 송철원)을 대표로 하는 ‘지차정무위원회(冀察政務委員會)각주3) ’가 발족되었다. 이것들은 모두 일본 군부의 괴뢰정부로 베이핑과 톈진을 포함한 허베이 성과 내몽골 지역을 포괄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 진전은 단순히 일본군 세력 범위의 확장에만 머물지 않았다. 이로써 북부 중국 전체가 일본군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베이핑과 톈진 등 중요 도시에 살고 있던 인민들 역시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지차정무위원회’가 발족한 다음날인 12월 9일 베이핑에서는 ‘일본 제국주의 타도’와 ‘화북 자치반대’, ‘내전정지, 일치항일’을 구호로 하는 대규모 학생 집회가 열렸다(12·9사건). 이것은 5·4운동에서 극명하게 분출된 바 있는 베이핑 학생들의 격렬한 저항 정신의 발로였다.
베이핑의 경찰들은 성문을 잠그고 혹한의 날씨임에도 시위대에 물을 뿌려대고 곤봉으로 닥치는 대로 구타와 체포를 자행했다. 그러나 한번 터진 민중의 불만은 이제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분출되었으며, 마치 전염이라도 된 듯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한번 일어난 동요는 해를 넘겨 1936년까지도 지속되었다. 이 해 5월 쑨원의 미망인인 쑹칭링과 허샹닝(何香凝, 하향응), 장나이치(章乃器, 장내기) 등을 중심으로 ‘전국각계구국연합회’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공산당과 국민당이 서로 싸우지 말고 항일을 위해 서로 협조할 것을 천명했다.
한편 이미 1931년 9·18사건 이후 자신의 근거지에서 쫓겨난 장쉐량은 상하이에서 서양인 의사의 도움으로 아편 중독을 치료한 뒤 유럽으로 여행을 갔다가 1934년 초 중국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는 줄곧 쟝졔스를 도와 후베이와 허난, 안후이 경계 지역에서 공산당 세력을 말살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었다. 9·18사건 이후 난징의 국민당 정부가 보여준 태도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유럽 여행 중에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독일의 히틀러의 민족주의와 강력한 군대를 접한 바 있는 장쉐량의 눈에 비친 쟝졔스의 무력한 모습은 더 이상 그가 기댈 만한 의지처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그가 그토록 열심히 공을 들였던 ‘공비(共匪)’ 토벌에 나섰음에도 그들이 주장하는 ‘항일’이라는 구호가 그의 귓전에 맴돌았다. 이제는 저들을 적대적으로만 대할 것이 아니라 이 문제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그의 뇌리에 점차 자리를 잡아나갔다. 그가 지휘하는 부대의 장교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들 역시 일본군에 의해 고향에서 쫓겨난 신세였기에 일본에 대한 원수 갚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1936년 2월까지 장쉐량은 공산당 측 협상자와 적어도 한 차례의 회담을 가졌고, 산시(陝西, 섬서)의 공산당은 그들이 포로로 잡은 만저우군 병력들에게 항일 통일전선 사상을 전파한 뒤 전원 석방했다. 같은 해 봄 장쉐량의 암묵적 동의 하에 공산당 특사들이 장쉐량의 젊은 관리와 장교들과 항일동지회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4월 말과 5월 초에는 장쉐량이 직접 산시 북부 산간 지방에 있는 공산당 근거지를 방문해 항일 협동작전의 가능성을 놓고 저우언라이와 긴 회담을 가졌다. 어렸을 때 펑톈(奉天, 봉천)에 살았던 저우언라이에 대해 장쉐량은 개인적으로 호감을 갖고 있었다. 6월에는 광시 군벌 리쭝런(李宗仁, 이종인), 바이충시(白崇禧, 백숭희) 등이 쟝졔스의 독재와 대일 타협정책을 비난하며 ‘반쟝항일통전(反蔣抗日通電)’을 보내왔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었지만, 쟝졔스의 입장은 확고했다. 일본이라는 ‘외환’보다는 공산당이라는 ‘내우’를 먼저 해결하자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1936년 10월 20개 사단 이상을 동원하는 제6차 포위 공격이 개시되었다. 이어서 11월에는 ‘전국구국연합회’의 간부들이 불법단체를 조직해 공비들과 손을 잡고 치안을 교란하고 정부의 전복을 꾀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10월 31일은 쟝졔스의 50세 생일이었다. 이 날을 축하하기 위해 국내외 인민들로부터 신형 비행기 68대가 헌납되고 난징에서는 성대한 헌납식이 열렸으며, 축하연에서 쟝졔스는 공산당이 ‘우리’의 가장 큰 반역자라는 연설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호는 더 이상 연회에 참석했던 장쉐량을 포함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지 못했다.
이때 내몽골과 만저우 괴뢰정부의 군대가 일본군과 연합해 산시(陝西, 섬서)에 인접한 쑤이위안(綏遠, 수원)을 침공했다[쑤이둥 사변(綏東事變, 수동 사변)]. 국민당 군대는 영웅적인 저항으로 이들을 격퇴했다. 이때 장쉐량은 쟝졔스에게 이들과의 전쟁에 그의 군대를 파견할 것을 제안했으나 쟝졔스는 허락하지 않고 그를 질타했다. 그러는 사이에 베이핑에서 ‘12·9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장쉐량은 학생들을 무마하고자 했으며, 데모를 중단하고 대일 항전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믿어줄 것을 호소했다. 그리고 체포된 시위자들이 경찰에서 풀려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뜻을 쟝졔스에게 전했을 때 쟝졔스는 그를 해임시켜버렸다. 결국 장쉐량이 선택한 길은 하나밖에 없었던 셈이다. 그것은 ‘쟝졔스를 핍박해 항일로 나서게 하는 것(逼蔣抗日)’이었다. ‘시안 사변’은 그 결과로 일어난 사건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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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출처
이 책은 자매편이라 할『중국사 강의』의 후속편이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부터 1997년 홍콩 반환까지를 다루고 초강대국으로 변모한 중국의 현대사를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