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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9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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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50년 |
국적 | 프랑스 |
대표작 | 《데카르트 철학 원리》, 《신학적·정치적 논고》 |
프랑스의 수학자·철학자. 해석기하학의 창시자. 근세철학의 아버지. 젊은 시절 견문을 넓히기 위해 하인을 데리고 군대에 입대했다(당시 귀족들은 하인을 데리고 군대에 입대했다). 그의 책을 읽고 감명받은 스웨덴 여왕의 초청을 받아들여 가르침을 주러 건너갔다가 스톡홀름에서 생을 마감한다. 데카르트는 수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철학에서도 연역적 방법에 의하여 모든 것을 하나의 근본 개념으로부터 도출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이 확고한 기초 위에 있는지를 따져보기 위해 모든 것을 의심해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사색은 이른바 방법적 회의에서 출발한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고 믿었으나, 갈릴레오의 종교재판 소식을 듣고 나서 이 견해를 마음속으로만 간직했다.
공인받은 늦잠꾸러기
나폴레옹은 "미래는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의 것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예외의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프랑스 출신의 철학자 데카르트다. 그는 10세 때 입학한 예수회 학원에서 여러 가지 특혜 조치와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을 때까지 자도 괜찮다'는 허락을 받았다. 충분히 수면을 취하면 큰 힘을 얻게 되고, 자신의 모든 감각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하여 늦게 일어나는 것은 데카르트의 버릇이 되었고, 이 버릇은 일생 동안 그가 학문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최초로 그의 전기를 쓴 아드리앵 바이에는 "철학과 수학 분야에서 데카르트가 남긴 중요한 업적은 결국 그의 아침 잠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학교에서조차 늦잠 자는 것을 용인한 까닭은 그의 건강과 관계가 있다. 데카르트의 어머니는 그를 낳은 지 13개월 만에 '마른기침과 창백한 안색'을 아들에게 물려준 채 세상을 떠났다. 그는 몹시 병약했기 때문에 의사들조차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진단할 정도였다. 그러나 극진하게 돌봐준 유모 덕분에 건강을 회복하여 마침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병약한 몸으로 태어난 까닭에 어렵사리 삶을 시작했지만 도리어 덕을 본 일도 있었다. 침대에 누워 사색하는 습관을 평생 지니게 된 것이다. 주 고등법원의 평정관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명상하는 버릇을 발견하고, 기특하게 여겨 어린 데카르트에게 '철학자'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왕성한 지식욕과 더불어 진리 탐구에 뛰어난 소질을 갖고 있던 데카르트는 학문의 길에 들어선 뒤로 줄곧 숨어 살면서 사색에 잠기곤 했다. 그가 파리 교외에 있는 아버지의 친구 집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조용하던 이곳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문인이 몰려들어 시끄러운 아카데미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자 데카르트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교외의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버지의 친구는 당황하여 그를 수소문하다가 우연히 길에서 데카르트의 몸종을 만나게 되었다. 데카르트가 있는 곳을 알려 달라고 하자, 몸종은 주인의 엄한 명령이라면서 안 된다고 버티었다.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데카르트가 있는 곳으로 그를 데려가게 되었다.
때는 아침 11시. 살그머니 문구멍으로 방 안을 들여다보았더니 데카르트는 창문을 열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는 몸을 반쯤 일으켜 침대 곁에 있는 작은 책상에다가 무엇인가를 적고, 누웠다가 다시 몸을 일으켜 글을 쓰곤 했다. 30분쯤 이러더니 잠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었다.
30대 무렵에 데카르트가 친구 발자크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신의 잠에 대한 내용이 쓰여 있다.
"나는 여기서 매일 밤 열 시간씩 잠을 잔다네. 아무 걱정거리도 없어서 잠을 깨는 법이 없지. 한참 자고 있노라면 내 정신은 숲과 정원과 황홀한 궁전을 산책한다네. 그럴 때면 동화에서나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즐거움을 맛보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낮에 꿈꾸고 그리워하던 것을 밤의 꿈속에 섞곤 하지. 잠에서 깨면 나의 만족은 더욱 완전해지며, 또 내 모든 감각이 그것을 느끼게 된다네."
'세상'이라는 책 속으로
데카르트가 다닌 학교는 전통 있는 예수회 학교로서 중세적인 학풍에 따라 공부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학교에서 배우는 중세철학보다는 (당시 예수회 학교들이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금지했던) 새로운 과학과 철학에 대해 은밀하면서도 뜨거운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20세가 갓 지난 어느 날, 그동안 학교에서 배운 것을 다 팽개쳐버리고 대신 '세상'이라는 큰 책 속에서 새로운 지식을 쌓기로 마음먹는다. 그리하여 이곳저곳을 여행할 욕심으로 군대에 지원해 보수도 받지 않고 장교로 복무한다.
데카르트는 1619년 11월 10일 하루 휴가를 얻어 도나우 강('검은 숲'이라는 뜻을 가진 독일의 슈바르츠발트 삼림 지대에서 시작해 유럽 대륙의 남동부를 흘러 흑해로 들어가는 강)의 근교 마을에서 휴식을 취했다. 날씨가 몹시 추워 종일 난롯가에 홀로 앉아 사색에 잠겼는데, 그날 밤 신비로운 세 가지 꿈을 꾸었다. 신으로부터 철학 전체의 체계를 혼자 힘으로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일종의 사명을 부여받은 것이라고 느낀 그는 이 사실에 대해 매우 흥분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장래를 축복받았다는 감격에 몸을 떨었다. 그는 즉시 이탈리아의 로레트 성모사원으로 순례하여 참배할 것을 맹세하고 군대 생활을 청산했다.
그 뒤로 여러 곳을 여행하는데, 파리에서는 사교계에 들락거리면서 쾌락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 승마나 펜싱, 춤과 도박을 즐겼는가 하면 연애 사건에 휘말려 결투를 하기도 했다. 이 무렵 그가 기지와 용기와 결단성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데카르트가 동유럽을 한 바퀴 돌고 프랑스로 돌아오던 중, 네덜란드의 서해를 건너기 위해 배 한 척을 세내었다. 이때 야비한 뱃사람들은 데카르트가 떠돌아다니는 돈 많은 장사꾼이라 단정했다. 또 외국인이 홀로 여행하는 것이라 추측했고, 따라서 그의 금품을 털어도 아무런 말썽이 없으리라고 믿었다. 그들이 이렇게 판단한 데는 그의 조용한 성품과 온화한 안색, 예의바른 태도가 한몫을 했으리라 여겨진다. 그들은 데카르트가 외국어를 알아듣지 못할 것으로 믿고, 그가 듣는 앞에서 그를 때려죽여 물에 빠뜨리고 가진 것을 몽땅 차지하자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네덜란드어와 독일어를 배운 바 있는 데카르트는 처음부터 그들의 말을 다 알아듣고 있었다. 사태가 이쯤 되자 데카르트는 불쑥 일어나 얼굴색을 바꿔 칼을 쭉 빼들고는 뱃사람들의 말로 소리쳤다.
"네 이놈들, 더 이상 나를 모욕하면 당장에 찔러 죽이고 말겠다!"
이에 혼비백산한 뱃사람들은 잇속 챙기려는 궁리를 멈추고 조용히 그를 건네다주었다.
이사의 달인
1628년 데카르트는 방랑 생활을 청산하고 네덜란드에 정착하여 본격적인 연구에 몰두했다. 사람들과 만나는 기회를 최대한 줄이고, 하루에 10시간씩 충분히 자면서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사색하고 글 쓰는 데만 열중했다. 방문객을 피하기 위해 20년 동안 13번이나 집을 옮겼으며, 아주 친한 친구가 아니면 주소조차 가르쳐주지 않았다. 대부분 편지로 다른 과학자나 철학자와 토론을 했는데, 일주일에 하루는 꼬박 편지를 썼다. 이때에도 신중을 기하기 위해 가짜 주소를 사용했다.
광학과 생리학 실험을 열심히 하여 자신의 안경알을 스스로 갈기도 했으며, 도살장에서 송아지를 사온 뒤 해부도 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그에게 서재를 구경시켜 달라고 하자, 반쯤 해부된 송아지를 가리키며 "저것이 내 책입니다"고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1632년 중세 과학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책 《세계》를 썼다. 하지만 갈릴레오 갈릴레이각주1) 가 종교재판으로 파문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공개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이 책에서 지동설을 주장했으니, 교회 당국과 마찰이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어떻든 이 일로 불안해진 그는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조용하게 사는 것뿐이네. 세상은 내 작품을 내가 죽은 뒤 백년이 지나서야 보게 될 것이야."
이 편지를 받고 그 친구는 위트 있는 답장을 보냈다.
"자네의 책이 좀더 일찍 읽힐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빨리 철학자 하나를 죽이는 것밖에 도리가 없겠네."
결국 이 책은 《철학 원리》에 그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을 뿐 출판되지도 않고 전해지지도 않는다.
38세에는 암스테르담에서 한 소녀와 사랑에 빠져 프란시느라는 딸을 낳았다. 3년 후에는 알크마르 가까이의 은둔처에 모녀를 데려다가 함께 살았으나, 그의 딸은 5세 때 열병으로 죽고 말았다. 이 일로 데카르트는 크게 상심하여 슬픔에 빠졌다.
스웨덴 여왕의 초청
1649년에 마음과 몸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다룬 데카르트의 마지막 책인 《정념론》이 출판되었다. 이 책을 읽고 감명을 받은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각주2) 은 해군 제독과 군함을 보내면서까지 그를 초청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야인(野人)인 자신이 궁중 생활에 적응하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데다, 조용히 진리 탐구에 몰두하는 자유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주저했다.
그러나 자신을 표적으로 한 비판들을 피하기도 하고, 절친하던 프랑스 대사 샤뉘의 간곡한 권유도 있고 하여 여왕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마침내 그는 스톡홀름에 도착했다. 여왕은 데카르트의 도착을 기뻐하며 직접 선장을 불러들여 그에 대한 보고를 들었는데(당시에는 국빈을 모시고 온 선장이 궁전에 들어가 여왕에게 보고를 하는 것이 관례였다), 선장의 말은 이러했다.
"폐하! 소신이 모셔온 분은 사람이 아니라 반신(半神)이옵니다. 그분은 삼 주일 동안 선박과 바람과 항해술에 관하여, 소신이 바다에서 60년 동안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데카르트는 스톡홀름에 있는 샤뉘 대사의 집에 머물면서 새벽 5시에 궁전으로 가 여왕을 가르쳤다. '하루 가운데 가장 조용하고 자유로운 시간'에 맑은 정신으로 이 위대한 철학자에게서 학문을 배우고자 했던 여왕의 요청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에게 일찍 일어난다는 것은 오랫동안의 습관을 깨뜨리는, 지극히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다 여왕은 철학보다 문학을 좋아했고, 특히 헬라어(고대 그리스어) 공부와 고서를 수집하는 일에 더 열심이었다. 데카르트는 스웨덴의 궁중에서 지극히 외로웠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신하들의 시기와 미움까지 사게 되었다.
프랑스인의 피를 아끼시오
1650년 2월 1일 데카르트는 스웨덴 여왕에게 아카데미 설립 계획서를 바치고 돌아온 후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북유럽의 찬 기후에 잘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음 날에는 열이 몹시 오르면서 폐렴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데카르트 자신은 그저 류머티즘쯤으로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마침 여왕의 주치의가 자리를 비워 네덜란드 출신의 의사가 치료해보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이 의사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완곡하게 거부했다.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갔고, 그가 열에 들떠 정신을 가누지 못하자 여왕은 다시 의사들을 보내어 치료하게 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끝까지 사양했다. 의사들이 "아무래도 피를 좀 뽑아야겠다"고 말하자, 데카르트는 "여러분! 프랑스인의 피를 아끼시오"라고 대답했다.
일주일 후 열이 좀 내려 정신을 회복한 데카르트는 병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잘못됐음을 깨닫고 피를 뽑도록 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호흡이 곤란해지고 가래를 뱉는 것마저 고통스러웠다.
9일째 되는 날 아침, 그는 음식을 청하여 먹고는 조용히 누워 있었다. 저녁에는 평생 동안 그를 돌봐준 유모에게 자기의 재산을 떼어주도록 유언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날 밤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영혼아, 네가 포로가 된 지 오래구나. 이제 네가 감옥에서 나와 몸의 질곡으로부터 해방될 순간이 다가왔다. 영혼과 신체의 이 나누어짐을 기쁨과 용기를 가지고 견디지 않으면 안 된다."
사태의 위급함을 알고 밤늦게 달려온 뷔오게 신부는 데카르트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마지막 축복을 원하면 무슨 표시를 해주시오."
데카르트는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 동작은 거기 있던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가슴 깊이 감동한 샤뉘 대사는 모인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의 친구는 인생에 만족하고 벗들을 만족스럽게 여기며,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확신이 넘쳐서, 그리고 저 세상에 가서 그가 일생 동안 찾아온 진리를 발견하고 소유하게 되리라는 데 대해 의심하지 않고 기쁨에 넘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모두 무릎을 꿇고 있는 가운데 신부는 축복 기도를 드렸다.
"전 세계에 널려 있는 교회의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맡아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기도가 끝나기 전에 데카르트는 흠 없이 살아온 그의 생애에 합당하게 조용한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여왕은 성대한 장례식을 거행하고 화려한 기념비를 세우려 했으나 샤뉘 대사가 반대하여 조촐하게 장사지냈다. 데카르트는 살아생전에 여왕으로부터 스웨덴의 국적을 취득하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죽어서도 스웨덴 사람이 되지는 않았다. 그의 유해는 1667년 프랑스로 옮겨져 현재는 파리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한때 두개골이 도난당해 없어졌다가 1878년에 발견되어 파리 인류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철학 속으로
먼저 데카르트는 우리의 모든 지식이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가장 단순한 원리로부터 이끌어져야 한다면 무엇보다도 그 출발점이 확고한 기초 위에 있는지를 따져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철저한 회의(의심)를 이겨낼 만한 제1명제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우리는 모든 것을 의심해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것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이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도 의심해보아야 하며, 나아가 1 더하기 1은 2라고 하는 등의 수학적 원리에 대해서도 일단 의심해봐야 한다. 1 더하기 1이 실은 3인데도 불구하고 악마가 있어서 모든 인간을 한꺼번에 속였다고 가정해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의심하면 할수록 더욱 확실한 것으로 나타나는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내가 바로 이 순간에 의심하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나 자신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여기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하는 유명한 명제가 나온다. 데카르트는 이것을 움직일 수 없는 하나의 출발점으로 삼았으며, 나아가 이 명제처럼 우리가 직접 명석하고 판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도 역시 확실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보았다. 데카르트는 이 명제를 출발점으로 삼아 신과 세계 등을 도출해나갔다.
또 데카르트는 신 이외에 정신과 물체라고 하는 서로 독립된 두 가지 실체를 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오직 신만이 참다운 실체이긴 하지만, 정신과 물체 역시 서로 독립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2차적 의미의 실체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먼저 정신에 대해 보자면, 우리는 공간적인 연장(延長)을 반드시 덧붙여 생각하지 않고서도 내가 사유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다음으로 물체는 정신과는 관계없이 연장과 공간적 충만성이라고 하는 속성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양자는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여기에서 생기는 문제가 심신(心身)의 관계다. 정신과 물체가 공통성을 전혀 갖지 못한다고 하면,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신체와 정신의 상호작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마치 폭풍 속에서도 태양 광선이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이 두 가지 실체가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고 하는 주장은 설득력을 얻기가 힘들다. 결국 데카르트는 적어도 인간에게 만큼은 몸과 마음, 육체와 정신이 결합하여 서로 작용한다고 인정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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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철학자 30인의 알려지지 않은 철학 이야기를 통해 세계철학사의 흐름을 읽다. 철학자의 사상보다는 삶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들의 삶 역시 평범한 인간과 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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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데카르트 – 위대한 철학자들은 철학적으로 살았을까, 강성률, 평단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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