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위대한 철학
자들은 철학
적으로...

김시습

다른 표기 언어 동의어 세상에 네 것 내 것이 어디 있느냐
요약 테이블
출생 1435년
사망 1493년
국적 한국
대표작 《금오신화》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 문학가. 방랑의 천재 시인으로 꼽기도 하고, 절의를 지킨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꼽기도 하며, (유교) 선비 출신이면서 승려가 되어 기행을 벌인 기인으로 꼽기도 하고, 최초로 남녀 사이의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 《금오신화》를 지은 작가로 꼽기도 한다. 또 농민의 고통을 대변한 저항 시인으로, 철저하게 기(氣)일원론(주기론)을 주창한 성리학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성리학적 세계관의 확립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조카에게 왕위를 빼앗고 집현전 학자들을 탄압하자 유가적 명분이 무너졌음을 깨닫고 승려가 되어 전국을 방랑했다.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어 세종대왕이 감탄하여 훗날 크게 쓰겠다고 할 정도였다.

김시습

ⓒ 평단문화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세종대왕이 감탄한 신동

김시습은 강릉 김씨인 김일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안주 목사, 조부는 오위 부장을 지냈는데, 아버지는 조부의 덕분으로 음직(蔭職)인 충순위각주1) 의 벼슬을 받았다. 그러나 워낙 병골이어서 실제로 벼슬자리에는 나가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집안은 뼈대는 있었으나 행세는 별로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김시습은 태어난 지 8개월 때부터 배우지 않고도 글을 알았다고 전한다. 마침 이웃에 먼 할아버지뻘 되는 최치운이라는 학자가 살았는데, 그는 명나라를 왕래하며 외교 분야에서 공을 세우고, 이조참판을 지낸 적도 있었다. 그 최치운이 김시습의 재주를 보고 그의 외할아버지에게 '시습'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시습'은 바로 《논어》의 첫 머리에 나오는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에서 따온 것으로, 재주만 믿지 말고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외할아버지는 김시습에게 천자문을 가르쳤다. 그는 말을 제대로 못하면서도 그 뜻은 모두 알아들었고, 붓을 쥐어주면 그 뜻을 나타낼 줄도 알았다. 3세 때부터는 스스로 글을 짓기 시작했고, 5세 때에는 이웃에 사는 수찬 이계전각주2) 의 문하에 들어가 배웠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정승 허조가 마침내 찾아와 그를 시험해보았다.

"내가 늙었으니 늙은 노(老)자를 넣어 시를 지어보아라."

이에 김시습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늙은 나무에 꽃이 피듯이 마음은 늙지 않았네(老木開花 心不老, 노목개화 심불로)."

그러자 허조는 감탄하며 말했다.

"이 아이야말로 말 그대로 신동이로구나."

신동이라는 소문이 점차 퍼져 김시습은 대궐에까지 불려가게 되었다. 세종대왕은 지신사 박이창각주3) 에게 신동 이야기가 사실인지 알아보라고 명했다. 이에 박이창은 어린 그를 무릎에 앉히고 말했다.

"어린 그대의 배움은 백학이 소나무 가지 끝에 앉아 춤을 추는 듯하구나(童子之學 白鶴舞靑松之末, 동자지학 백학무청송지말)."

이 말을 들은 김시습은 재빨리 대답했다.

"성스러운 임금의 덕은 황룡이 푸른 바다 가운데서 날아오는 듯하구나(聖主之德 黃龍飛碧海之中, 성주지덕 황룡비벽해지중)."

구구절절이 대구를 맞춘 명문장이 아닐 수 없었으니, 이 소식을 들은 세종대왕은 다음과 같은 전지(傳旨)를 내렸다.

"내가 불러보고자 하나 남들이 해괴하게 여길까 두렵다. 너무 드러내지 말고 잘 가르치도록 해라. 나이가 들고 학업이 성취되면 내가 크게 쓰겠노라."

그리고 비단 50필을 선물로 내려주면서 혼자 힘으로 가져가라 일렀다. 호기심에 그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던 벼슬아치들 사이로 김시습은 비단의 끝을 모두 묶고서 유유히 끌고 나갔다.

사육신의 시체를 거두다

13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외가로 옮겨간 김시습은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외할머니는 어머니를 잃은 그를 애지중지 키웠다. 훗날 김시습은 '할머니는 나를 마치 아들처럼 길러주셨다'고 회고하는데, 그런 외할머니마저 곧 세상을 뜨고 말았다. 형편이 이렇게 되자 그의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가족을 거느리고 시골로 내려갔다. 하지만 늘 병석에 누워 있는지라 가사를 돌볼 수 없었으므로 가세는 점점 기울어갔다. 그는 의붓어머니가 들어오고서야 다소 늦은 나이인 20세에 장가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글공부를 하는 한편, 친구들과의 교류도 넓혀나갔다.

21세 때 삼각산 중흥사에서 글을 읽으며 지냈는데, 하루는 서울 나들이를 하고 온 사람이 말했다.

"수양대군이 금상(今上, 임금)이 되었다 하오. 금상(단종)은 상왕으로 모셔지고……."

김시습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생각하고 책을 덮고는 문을 걸어 닫았다. 그리고 사흘 동안 문 밖을 나오지 않았다. 사흘째 되던 날 저녁 그는 대성통곡을 하고는 읽던 책을 모두 불살라버렸고, 미친 척하면서 측간에 들어가 있다가 절을 빠져나왔다.

그 뒤로 이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과 세조의 폭압정치, 봉건 권문세력들의 농민에 대한 횡포와 수탈 등에 김시습의 불만은 점점 커졌다. 결국 그는 관리가 되어 나라를 다스리고자 했던 원래의 꿈을 접고, 평생 벼슬과는 인연을 끊고 살아갔다. 그는 유학자의 갓을 팽개치고, 작은 시통(얇은 대나무 조각에 한시의 운두를 적어 넣어가지고 다니는 통) 하나만 덜렁 등에 지고서 전국 곳곳을 떠돌면서 그렇게 항의의 뜻을 표현했다.

그는 서울로 올라와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여기저기서 주워들으며 지내다가 몇몇 사람들과 뜻을 맞추었다. 그를 포함하여 의기투합한 9명의 구의사각주4) 는 강원도 금화현에서 남쪽으로 10여 리 떨어진 사곡촌 골짜기에 초막을 지었다. 나무 잎사귀에 시를 쓰고 통곡하다가 물에 띄워버리기도 하고, 담소도 하고, 한탄도 하고, 돌 소리와 물소리를 들으며 스스로 방외인(方外人,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자처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수양대군이 임금 자리에 오른 이듬해에 사육신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가 상왕 복위를 꿈꾸다가 장찬손 등에게 발각되어 곧 참형되는 사건이 있었다.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한 뒤에 일어난 두 번째의 대량살육이었다. 이때 9명의 은사는 자신들에게 화가 미치는 것을 피하고, 각자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사육신의 시체가 길거리에 버려져 있었으나 누구 한 사람 시체를 거두어주지 않았다. 사육신의 가족들마저 모두 잡혀가 있는 데다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이때 어떤 승려가 이들의 시체를 거두어 노량진 길가 남쪽 언덕에 묻었다고 전하니, 이 승려가 바로 김시습이라는 것이다.

《금오신화》를 완성하다

이 무렵 김시습은 설잠이라는 승려로 지냈는데, 승려치고는 모습이 괴상야릇했다. 머리는 깎았으되 수염은 기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에 대해 김시습은 이렇게 말했다.

"머리를 깎은 것은 세상을 피하기 위함이요, 수염을 기른 것은 대장부의 기상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1463년(세조 9) 그가 책을 사러 서울로 올라왔을 때, 세조는 자기 손에 죽은 사람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교 행사를 크게 벌이려던 중이었다. 또한 효령대군(태종 이방원의 둘째 아들)의 주도로 《묘법연화경》의 번역 사업을 추진하는데, 이때 많은 승려가 이 일의 적임자로 김시습을 추천했다. 효령대군의 간청으로 김시습은 신미, 학조 등 이름난 승려들과 함께 내불당(경복궁 안에 있는 왕실 사찰)에 들었다. 그러고 나서 일단 임금의 공덕을 칭송했다. 그답지 않게 권력 앞에 굴절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임금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귀한 햇과일들을 보내주었고, 김시습은 이에 대해 '물건은 비록 작은 것이지만, 성의는 크다'고 적었다. 그리고 10여 일쯤 내불당에 있다가 다시 금오산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경주의 남산인 금오산에 폐허가 된 절 하나가 있었는데, 이것이 용장사였다. 절이 폐허가 된 데다 골짜기가 깊어서 사람의 발자취가 거의 닿지 않았다. 김시습은 바로 이곳에 토굴을 짓고 매화를 심어 이 토굴을 '금오산실'이라고도 하고 '매월당'이라고도 했다. 이렇게 해서 김시습의 호가 매월당이 된 것이다.

1467년 그의 나이 32세가 되던 해 3월 그믐날, 서울에서 종자(從者)가 말 한 필을 끌고 내려와 "효령대군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성상께서 옛 흥복사를 새로이 세우고 이름을 원각사라 지었습니다. 스님들을 모시고 낙성회(落成會)를 갖는데 여기에 참석하시게 하라는 분부를 받고 왔습니다"고 전했다. 이에 김시습은 그날로 말을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낙성회 첫날 임금이 대사령(일반 사면령)을 내리자 김시습은 이를 찬탄하는 시를 지었다. 이어 효령대군의 부탁으로 '원각사 찬시'를 지어 임금에게 올렸고, 임금은 이를 보고 효령대군에게 분부했다.

"이 찬시는 매우 아름답소. 내가 그를 직접 만나볼 테니 이 절에 거처하도록 하시오."

그러나 김시습은 서울에서 지낸 지 며칠이 못 되어 끝내 길을 떠났다. 경주로 내려가는 길에 임금이 보낸 사자(심부름꾼)를 중간에서 만나 다시 올라오라는 분부를 받았으나, 병을 핑계대고 끝내 다시 서울로 올라가지 않았다.

금오산실에서 지내던 김시습은 틈틈이 바닷가를 거닐기도 하고, 교외나 시전(市廛)에 나가 구경을 하기도 했다. 비록 몸은 병이 들었으나 동가식서가숙각주5) 할 때보다는 고달프지 않았다. 그 덕분에 저술에 몰두할 수가 있었다. 이때 그는 소설을 썼는데 이것들을 묶어 《금오신화》라 이름 붙였다. 그리고 석실(돌로 쌓아 만든 묘실)에 간직하며 "뒷날 이 소설을 알아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김시습의 시 짓는 버릇은 괴상했다고 전한다. 서 있는 나무를 깎아 시를 써 놓고는 한동안 읊고 나서 통곡을 하며 깎아버리거나 종이에 시를 써서 한참 바라보다가 물에 던져버렸다.

한명회를 조롱하다

김시습은 금오산실에서 7년을 살았는데 그동안 세조도 죽고, 그 뒤를 이은 예종도 죽었다. 그리고 새 임금 성종이 문치(文治)를 표방하며 널리 인재를 구하는 때였다. 친구들이 그에게 정국이 새로운 기운을 맞고 있으니 서울로 올라와 벼슬살이를 하라고 권유하자, 김시습은 행장을 꾸려 정들었던 금오산실을 떠나 수락산 폭천정사로 옮겼다.

그는 남소문동에 있는 이정은(태종의 손자이자 영의정 이원익의 할아버지)의 집을 거처로 삼기도 했다. 그는 김시습을 늘 도와주었을 뿐만 아니라 선비들과도 잘 어울려 그의 사랑채에는 많은 식객(食客)이 들끓었다.

그런데 당시의 권신 한명회(김종서 등을 참살하게 하여 수양대군의 즉위에 큰 공을 세움)는 한강 가에 화려한 압구정을 짓고 서강 가에는 별장을 두고 이를 찬탄하는 현판들을 걸어놓았다. 워낙에 권세가 있는 사람의 건물이어서 일반인들은 감히 오르지도 못했다. 어느 날 김시습이 이곳에 갔다가 별장의 현판을 발견하는데, 거기에는 이런 시가 적혀 있었다.

청춘에는 사직을 붙들고
(靑春扶社稷, 청춘부사직)
늙어서는 강호에 누웠네
(白首臥江湖, 백수와강호).

김시습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고쳐놓았다.

청춘에는 사직을 위태롭게 했고
(靑春危社稷, 청춘위사직)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혔네
(白首汚江湖, 백수오강호).

부(扶)를 위(危)로, 와(臥)를 오(汚)로 바꾸어 놓으니 영락없이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다. 이를 보고 사람들이 정말 그럴듯하다고 수군거리자 한명회는 나중에 현판을 아예 없애버렸다.

세상에 네 것 내 것이 어디 있느냐

언젠가 김시습은 종들과 가옥, 전답을 모두 간특한 사람에게 빼앗긴 적이 있었다. 그는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어느 날 상대방을 찾아가 재산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물론 그 사람은 거절했다. 그러자 김시습은 그 사람을 한성부에 고소했고, 두 사람은 대질심문을 받기 위해 불려갔다. 보통 양반들 같으면 이런 송사가 있을 때, 종을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그는 직접 대질에 임하여 입에 거품을 물고 싸웠다. 본래 자신의 재산을 빼앗긴 터라 승소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송사에 이긴 김시습은 문서를 받아 관아 문 밖을 나오더니 하늘을 보고 크게 웃었다.

"아하하, 이 세상에 네 것 내 것이 어디 있나?"

그러고 나서 문서를 갈가리 찢어 개천에 던져버렸다.

어느 날 그는 무량사에서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붓을 잡고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림이 완성되자 그 위에 이런 글귀를 써넣었다.

"너의 모양은 조그마하고 너의 말은 크게 분별이 없구나. 너는 구덩이 속에 처박아 두어야 마땅하다."

실제로 김시습은 키가 작고 얼굴이 못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글 내용은 인생을 마감하면서 남긴 처절한 자기반성이 아닌가 싶다.

58세 되던 해에 김시습은 이렇게 유언했다.

"내가 죽거든 화장을 하지 말고, 임시로 관을 절 옆에 두어라."

그의 제자들은 유언에 따라 관을 절 옆에 그대로 조용히 모셔두었다. 그리고 3년 후에 장사를 지내려고 관을 열어보니, 시신의 얼굴색이 살아 있는 사람과 똑같았다. 여러 승려들이 놀라 '성불했다'고 말했다. 불교의 장례의식에 따라 다비(시신을 불사르는 일)를 하자 사리각주6) 가 나왔고, 그 사리를 담아 무량사에 부도(고승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하는 묘탑)를 만들어 안치했다.

죽은 지 89년 후, 선조는 그의 충절을 기려 생육신으로 떠받들게 했고, 또 정조는 그에게 이조판서를 증직했으며, 이어 곳곳에 그를 기리는 서원과 사당이 세워졌다.

생육신은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관직에 나가지 않고 절의를 지킨 6명의 신하, 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을 말한다. 단종복위 운동의 실패로 죽임을 당한 사육신에 비해서 살아서 절개를 지켰다는 의미에서 생육신으로 불렸다.

철학 속으로

김시습은 당시의 사상적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유·불·도 삼교(三敎)를 원융적(圓融的)으로 일치시키려 했다. 가령 불교적 미신은 배척하면서도, 불교에서 강조하는 자비에 대해서는 만물을 이롭게 하고 마음을 밝혀 탐욕을 없애주는 것으로 파악했다. 또 비합리적인 도교의 신선술은 부정하면서도, 기(氣)를 다스리는 일은 천명(天命)을 따르게 하는 데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기를 강조하는 성리학의 입장에서 불교와 도교를 흡수하여 그의 철학을 완성시키고자 한 것이다.

김시습은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 속에서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기구한 일생을 보냈는데, 그의 사상과 문학은 이러한 고민에서 비롯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얻은 생활 체험은 현실을 직시하는 비판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해주었고, 불의한 위정자들에 대한 비판과 맞닿으면서 백성을 중시하는 왕도정치의 이념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군주가 그 백성을 사랑하여 부도덕한 정치를 없애는 것은 부처의 자비 정신에도 부합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김시습이 지향했던 근본 목표는 어디까지나 유가적 혹은 주자학적 민본주의를 실현하여 주자학적인 명분을 회복함과 동시에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오히려 봉건 윤리를 철저히 수립함으로써 당시의 사회적·사상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그의 기(氣)철학은 불교의 윤회설, 영혼불멸설, 극락 지옥설, 무속 신앙 등의 미신을 타파하고 성리학(유교)적인 세계관을 확립하는 과정에 불과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김시습의 사상은 관념적 주리론(主理論)에 반대하는 기(氣)일원론, 유물론으로 해석된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강성률 집필자 소개

전남 영광 출생. 전남대학교 철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전북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광주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교내에서 윤리교육과 학과장, 학생생활연구..펼쳐보기

출처

위대한 철학자들은 철학적으로 살았을까
위대한 철학자들은 철학적으로 살았을까 | 저자강성률 | cp명평단문화사 전체항목 도서 소개

세상을 바꾼 철학자 30인의 알려지지 않은 철학 이야기를 통해 세계철학사의 흐름을 읽다. 철학자의 사상보다는 삶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들의 삶 역시 평범한 인간과 다..펼쳐보기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철학가

추천항목


[Daum백과] 김시습위대한 철학자들은 철학적으로 살았을까, 강성률, 평단문화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