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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의 회심
예수를 믿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면서 박해도 그만큼 심해졌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와 사마리아 각처로 퍼졌다. 이때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사울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사울은 예수가 다윗이 예언한 구세주이며,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고 선전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격분했다. 더욱이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죽인 예수를 하느님이 3일 만에 부활시켰으며, 유대인들이 이러한 죄를 회개하면 하느님이 용서해줄 것이라는 말에 분노했다.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거룩한 성전과 율법을 거스르며 전능하신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메섹(다마스쿠스) 그리스도인들을 감옥에 잡아넣기 위해 산헤드린의 정식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게 되었다.
그가 다메섹 가까이 왔을 때 갑자기 강한 빛을 보게 되어 땅에 엎드릴 수 밖에 없었다. 눈을 뜰 수 없는 강한 빛이었다. 홀연히 하늘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주여 뉘시나이까?”라고 대답했다. 하늘에서 다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했다. 동행인들은 그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고 서 있기만 했다.(〈사도행전〉 9:6~9)
사울은 다메섹에서 만난 아나니야의 인도에 따라 시력을 회복했다. 사울은 그에게 세례를 받고 모든 사람 앞에서 다메섹 오는 길에 보고들은 하느님의 증인이 될 것을 증언했다. 그리스도인의 박해자였던 사울은 새롭게 바울로 거듭났다. 바울의 이 경험은 그의 삶뿐만 아니라 세계의 역사까지 변모시켰다.
바울(파울로스)은 그리스어 이름이며, 그의 히브리어 이름이 ‘사울(Saul)’이다. 당시 해외 유대인들은 대부분 히브리어 이름과 그리스어 이름을 모두 사용했다. 때문에 사도 바울도 그리스어 이름인 바울과 히브리어 이름인 사울을 모두 사용했다.
바울, 유대교와 기독교를 구분 짓다
바울이 환영을 경험하기 전, 예수의 제자들은 자신들을 《토라》를 따르는 유대인으로 여겼다. 다른 유대인들과 구별되는 그들의 특징은 메시아인 예수가 언젠가 유대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돌아오리라는 그들의 믿음이었다.
바울은 이 작은 유대 종파를 유대교와 확연히 구분되는 새로운 종교로 재정립했다. 바울은 하느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토라》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믿음이라고 설파했다. 예수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바울의 이러한 가르침을 강력하게 거부했다.
《신약》의 〈사도행전〉 10장 14절은 가톨릭교회가 최초의 교황으로 여기는 베드로가 카슈루트(유대교의 식사계율)를 세심하게 지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 2장 46절과 3장 1절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들은 정기적으로 대성전에서 예배를 드렸다. 예수의 동생 야고보는 안티오크에 몇몇 사람들을 보내 유대인들은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을 전하게 했다.(〈사도행전〉 15:1, 〈갈라디아서〉 2:12 참조)
그런데 바울이 야고보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우리는 사람이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로마서〉 3:28) 야고보의 가르침이 아닌 바울의 가르침이 기독교에서 승리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와 기독교는 큰 차이가 없다고 보았다. 곧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종파로 이해했다. 그래서 율법, 할례 등의 유대교 전통을 지켰다. 점차 이를 강조한 ‘유대 기독교인’과 유대교와 기독교 간의 단절을 주장하며 유대교 전통을 거부한 ‘이방 기독교인’으로 나뉘어졌다. 바울이 이방 기독교의 지도자였다.
원시 기독교 공동체가 탄생할 당시 유대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열심당 등의 다양한 종파가 있었다. 새롭게 시작하는 ‘그리스도교’도 나사렛 예수를 따른다는 의미에서 ‘나사렛파’로 불리는 유대교 내의 새로운 분파 정도로 인식되었다. 베드로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 예루살렘 교회 역시 이러한 인식에 안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토라》의 의례와 윤리적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하느님의 눈에 의로운 사람이라는 유대인의 믿음과 치열하게 싸웠다. 이러한 유대인의 믿음이 옳다면 사람들은 노력만으로 정의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목적이 사라져 “예수는 결국 헛되게 죽었을 뿐”(〈갈라디아서〉 2:21)이라는 것이 바울의 논리였다. 이는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한 베드로가 이끄는 ‘유대 기독교인’과의 갈등이기도 했다.
베드로, 야고보 등의 기존 사도들은 유대 기독교 지도자들이었고, 순교자 스테파노를 비롯한 일곱 부제들은 이방 기독교인이었다. 베드로와 바울이 충돌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신학적 갈등을 겪었다. 바울은 유대 기독교인들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형제라고 비난했고, 유대 기독교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은 바울을 유대교 전통을 파괴하는 인물로 보았다.
그럼에도 〈갈라디아서〉에 따르면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 야고보와 요한은 유대교 전통에 대한 해석은 달랐지만 바울을 이방인 사도로 존중하며, 두 교회 모두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일치했다.
바울의 주장을 인정한 예루살렘 종교회의
초대교회에서는 〈사도행전〉에 나타나듯 ‘이방인들이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이 집중됐다. 바울은 이방인들이 할례와 음식정결법을 지키지 않아도 유대교 안으로 흡수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바울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믿음 하나만으로 충분히 그들도 유대인처럼 아브라함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다른 것은 다 지켜도 늘 유대교 밖에 있다고 위축되어 있던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바울의 메시지는 진정한 복음이었다. 바울은 이방 지역 디아스포라 유대교 회당을 돌면서 이들 그룹 가운데 수많은 개종자들을 얻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아직까지는 스스로 기독교인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당시 유대교 안의 종파 가운데 하나인 ‘나사렛파’로 불린 유대 기독교 곧 초기 기독교 공동체 회원이 된 것이다.
바울이 선교여행을 떠난 후 예루살렘에서 온 신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안티오키아 교회에 와서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요하고 나섰다. 곧 구원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약속되어 있으므로 할례의식을 통해 이방인들을 이스라엘 백성에 입적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보다 율법을 우선시하고 있었다. 격렬한 의견 충돌과 치열한 논쟁은 시간이 흘러도 그칠 줄을 몰랐다. 그리하여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결단을 내린다. 예루살렘에 가서 확실한 결론을 얻어 더 이상 힘들게 전교한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을 막고 교회가 분열되는 사태를 막고자 했다.
서기 49년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사도들에게 그간의 이야기들을 보고했다. 그런데 바리새파에 속했다가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유대주의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사도행전〉 15:5)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섰다.
급기야 예수의 형제 야고보의 주재로 가톨릭교회 첫 공의회인 사도회의가 열렸다.(〈사도행전〉 15:6) 열띤 토론이 계속됐다. 그러나 토론의 결론이 날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때 이미 베드로는 환상을 통해 이방인을 구원하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 게다가 이방인 백부장인 고넬료의 가정을 방문하고 세례를 베푼 사실이 있었다.(〈사도행전〉 10:9~43)
그래서 베드로가 구원의 원칙을 세웠다(〈사도행전〉 15:7~11). 첫째, 유대인들도 잘 지키지 못하는 법, 즉 ‘할례’라는 멍에를 이방인들에게 강제로 부과할 수 없다. 둘째, 무엇보다도 예수가 죽고 부활함으로써 완전한 구원을 마련했으므로 불필요한 규칙은 폐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곧 베드로의 결정은 이방인들도 사도들과 똑같이 성령을 받아 모시고 있고, 예수도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았는데, 할례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방인은 할례와 음식정결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만 우상과 음행, 목매어 죽이는 것과 피를 멀리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결론지었다. 이로써 나사렛파 유대교인이 되려는 이방인들의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해주었다. 이 회의에서 내린 결정은 교회 역사상 가장 대담하고 관대한 결정이었다. 그 뒤 이방인 회심자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당시에는 그야말로 다양한 곳에서 온 그리스도인들을 서로 형제로 맞아들이며 다문화적인 연합을 추구했다.
보편적 기독교의 탄생
바울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다니며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전했다. 그 뒤 그는 아라비아 사막으로 가서 내적 준비를 갖춘 다음 마침내 위대한 전도자로 등장했다. 그는 초기 기독교의 포교와 신학에 주춧돌을 놓은 사도이자 51년경 첫 번째 《신약성경》인 〈데살로니가전서〉를 저술한 신학자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아무런 구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만민의 주님이 되시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찾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복을 내리십니다”라고 말했다.
하느님은 단지 아브라함의 자손들만의 번성을 약속한 것이 아니었다. 이 약속이 가시화되는 중심에 유대인 예수가 있다. 구원의 메커니즘은 《구약》뿐 아니라 이제 《신약》에도 주어졌다.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은 이제 그의 자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것이다.
바울은 예수 사후 한참 후에 입교해 활약한 인물이다. 때문에 열두 사도에는 들어가지 않고 이방인 사도라 불린다. 바울은 처음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대상으로 전도하다 스스로 ‘이방인을 위한 사도’라 자처하며 당시로서는 세상의 끝이라 여겨졌던 지중해 전역으로 전도여행을 세 번이나 떠났다.
그는 선교여행 중 여러 번 죽을 위기를 맞았다. 유대인에게 다섯 번 매를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배가 파선되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고 돌아와서는 교회에 일일이 문안과 교훈의 편지를 썼다. 이 편지들이 《신약성경》 중에 가장 먼저 쓰인 것으로 13편에 이르며, 《신약》 27권 중 거의 반을 차지한다. 이 편지들은 대략 서기 50~60년 사이에 쓰였다.
초기 기독교는 이렇듯 임박한 종말을 교리의 핵심으로 하는 유대교의 한 종파였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유대교적 기독교가 오늘날의 기독교로 변화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원시 기독교는 〈묵시록〉을 신봉하면서 하느님 나라가 곧 올 것으로 기대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기독교 사상의 방향을 내세 중심, 내면 중심으로 환치시켰다. 곧 중요한 것은 현세가 아니라 내세이며, 외부 현실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정화라는 것이었다.
바울에 의해 체계화된 기독교는 에게 해 지역 사람들에게 전파되면서 유대교로서 갖고 있던 관행을 없앴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 유행하던 영지주의, 스토아의 자연철학, 로고스, 플라톤 등의 사상과 접목되어 유대인만을 위한 기독교가 아닌 보편적 기독교가 되었다.
바울의 3대 교리, 기독교를 세계화시키다
바울은 기독교의 세계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는 복음을 이방 세계에 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그는 구원의 의미를 ‘은혜’ 중심으로 설명함으로써, 유대 관습에 낯선 이방인들에게 문화적 충격 없이 복음을 전파하는 데 성공했다.
바울은 흩어져 있던 기독교 교리들을 하나로 정리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추가해 이를 글로 기록해 기독교 성립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그의 교리는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예수를 ‘인류의 보편적 구원자’로 정립했다. 둘째, 성령 개념을 도입해 신의 은총과 인간의 믿음을 연결시키는 ‘삼위일체론’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신해 죽음으로써 인간이 구원에 이르도록 했으나 이는 전적으로 하느님 뜻에 따른다는 ‘예정설’을 지지했다. 그 무렵 열두 제자가 주축인 예루살렘의 교부들이 유대교에 안주하고 있을 때 바울은 예수를 인류의 보편적 구원자로, 그리고 삼위일체설을 만들어 확고한 신의 아들로 자리매김했다.
바울에 의해 정리된 기독교의 교리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하느님 명령을 바탕에 둔 기독교는 사랑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이를 개인 차원만이 아닌 공동체 차원에서도 실현코자하는 종교라는 것이다. 이로써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구호활동이 로마시대 기독교도들과 사제들의 중요한 임무가 되었다. 지금부터 2천 년 전에 전체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과 재산의 분배 같은 사상을 내포한 범세계적 종교가 등장한 것이다. 이는 유대교에서 받은 영향으로 유대인들이 고대로부터 지켜 내려온 공동체 정신인 ‘각자 능력껏 벌어 필요에 따라 나누어 쓴다’라는 사상과도 맥을 같이한다.
임박한 종말을 강조한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지파에 머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인격적 신’을 체계화해 세 가지 핵심 교리를 기반으로 기독교를 성립시켰다. 기독교는 이후 로마제국을 등에 업고 세계 종교로 나아갔다.
바울의 열성적 전도와 신학사상으로 기독교는 유대교의 일파에서 벗어나 보편 종교로 발전했다. 약 30년 동안 복음 전파를 위해 힘을 쏟던 바울은 네로가 기독교인을 박해하던 60년 무렵, 로마로 가서 선교하다 65년 그곳에서 처형당했다고 한다. 기독교가 세계적 종교로 발전하게 된 데는, 세 번에 걸친 바울의 전도여행과 로마에서의 순교가 그 촉매제가 되었다.
《신약성경》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곧 재림하리라 믿었으므로 그의 행적을 기록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더구나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예루살렘 교회도 없어졌다. 이제는 누군가가 예수의 삶을 기록할 필요가 있었다.
《신약성경》의 글들은 당시의 예수를 믿고 따르던 사도들과 기독교인들이 서로 지역에 따른 언어 소통의 불편을 덜기 위한 수단으로 고대 그리스어의 방언의 일종인 ‘코이네(koine)’로 쓰였다.
《신약성경》의 내용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해석한 복음서들인 〈마태복음〉에서 〈요한복음〉까지 네 권, 사도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사도행전〉 한 권, 바울이 목회와 관련된 질문에 답을 주기 위해 교회에 보낸 목회편지 곧 〈로마서〉에서 〈빌레몬서〉까지 열세 권, 또 〈히브리서〉로부터 〈유다서〉까지의 바울 이외의 편지 여덟 권과, 사도 요한이 예수에게 받은 종말론적 계시를 기록한 묵시문학인 〈요한계시록〉 한 권, 총 스물일곱 권으로 되어 있다. 현재의 《신약성경》은 서기 50~150년 사이 1백 년에 걸쳐 쓰였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
유대교와 기독교가 극명하게 다른 점이 있다. 유대교는 유대인에 한정된 종교인 반면 기독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계기로 사랑과 전 인류의 구원을 지향하는 보편적인 종교로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구약》이란 ‘하느님이 인간에게 이런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하겠다’는 약속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계명이나 율법을 지키지 않아 모두 하느님의 심판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새로운 약속 곧 《신약》을 받았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구약》은 어떻게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느냐 하는 문제와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했다면 《신약》은 예수가 그리스도 곧 구세주임과 하느님의 아들임을 알게 하고 그를 왜 믿어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안내서다. 《구약》은 하느님과 유대민족과의 약속이라면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범위를 이방인에게까지 넓힌 것이다.
하지만 이후 기독교 문명의 번성은 포교와 전쟁이란 양자택일적 강압 수단에 의한 것이 많았다. 인류 역사에 기독교가 뿌리를 내린 이후 오늘날까지 신앙이란 이름으로 수많은 전쟁과 이로 말미암은 숱한 희생이 있었다. 반면 유대교에는 포교나 전도라는 개념이 없다. 왜냐하면 유대교는 선민 곧 선택된 민족만 갖는 종교이므로 굳이 이교도에게 전파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교를 목적으로 야기된 무력투쟁 역사도 없다. 이러한 배타적인 면이 유대인에 대한 역사적 박해를 가중시킨 측면이 있다.
참 올리브나무에 접붙인 돌 올리브나무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해 기독교를 유대교에서 분리했지만 기독교도들에게 유대교를 존중할 것을 권면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인데,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 적용된다(〈롬〉 1:16)고 바울은 가르쳤다. 모든 사람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유대인과 헬라인을 모두 구원하는 길을 마련했다는 것이다(〈롬〉 3:21~26). 당시 헬라인은 유대인 이외의 이방인을 뜻했다. 이방인들은 율법을 행하는 유대인으로 개종하지 않고, 믿음으로 하느님의 백성이 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느님이 선택한 민족 유대인을 존중하라고 일깨웠다. 유대인들이 지금 불순종한다고 해서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을 차별하는 것은, 참 올리브나무에 접붙인 돌 올리브나무 가지들이 우쭐대는 격이다. “그 가지가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그 가지를 지탱한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바울은 가르쳤다.(〈롬〉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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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Rabbi Joseph Telushkin, Jewish Literacy, 1부 72장 바울, Harpercollins, 2008.
- ・ 류모세, 《유대인 바로 보기》, 두란노, 2010, 51~53쪽.
- ・ 강성률 논문 등, 〈헬레니즘적 기독교와 사도 바울〉, 〈메시아에 대한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점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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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원시 기독교 사상의 변화 – 세 종교 이야기, 홍익희, 행성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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