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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전체가 노예가 되다
이집트에서 탈출하는 ‘출애굽’ 사건은 유대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구심점이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와 문화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 유대인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가나안에 흉년이 들어 이집트로 이주했던 야곱 일가 남자 70명과 그 가족들로 시작한 유대민족은 430여 년 만에 2백만 명이 넘는 큰 민족으로 번성했다. 유대민족은 이집트 신왕조 들어 건설노예로 징발되어 수많은 건설 현장에서 혹사당하고 있었다. 나일 강변의 신전들은 이렇게 유대인들의 피와 땀으로 건축된 것들이 많다.
람세스 2세는 유대인 건설노예를 활용해, ‘건축의 대왕’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많은 건설 사업을 벌였다. 아비도스 신전, 카르나크 신전군, 룩소르 신전, 아부심벨 대신전과 소(小)신전, 라메세움 신전 등 이집트 전역에 수많은 신전 건축물을 세우고 내부를 람세스 2세 자신이 거둔 승리를 묘사한 글들과 그림들로 도배했다. 이러한 건설 사업을 위해 많은 유대인들이 징집되어 혹사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해 큰 무리가 되었다. 요즘 관광객들이 보는 많은 이집트 신전 건축물 대부분이 그때 유대인 건설노예들이 지은 것이다. 람세스 2세는 유대인들을 이용해 여러 도시 건설은 물론 이집트 역사상 가장 많은 건축물들을 세웠다.
건설노예뿐만 아니라 수공업 분야에서도 유대인 노예들이 혹사당했다. 특히 수많은 유대인 노예를 동원한 마직물공장은 공기가 잘 통하지 않는 열악한 작업장으로 악명이 높았다. 유대인들은 무자비한 압제와 혹독한 종살이에 지칠 대로 지쳐갔다. 노예로 전락한 유대인들은 절망적인 강제 노동의 상황에서 신에게 구원을 간구했다. 이집트에서 유대인들의 삶이 번영의 지속이었다면 그들은 결코 이집트를 떠날 생각을 안했을 것이다.
모세의 영도
이때 하느님은 어눌한 모세를 선택해 이스라엘 백성 구원에 앞장서게 한다. 모세는 원래 유대인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대는 유대인 아들이 태어나면 무조건 죽이도록 명령된 시대였다. 석 달을 숨겨 키운 어머니는 아기를 갈대상자에 담아 나일 강에 띄었다. 마침 나일 강에 목욕 나왔던 이집트 공주가 발견해 데려가 키웠다.
모세는 성장하면서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자의식을 갖기 시작했고 동족을 못살게 구는 이집트 병사를 죽이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 살았다. 그곳 호렙 산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신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된다. 모세는 이 엄청난 만남에서 신에게 물었다. “당신 이름이 무엇입니까?” 신은 “나는 나다”라고 대답한다. 이 대답은 ‘신’은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라는 하느님의 명령 앞에 모세는 자신은 일개 목동이라고 항변하지만, 신은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이 말뜻은 모세는 더 이상 모세가 아니라 모세 이상의 존재라는 것이다. 모세는 깨달음을 통해 신의 대리자가 된다. 아브라함 전통에서 이 사상을 ‘임마누엘’이라 한다. 임마누엘은 히브리어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모세는 신의 명령을 받아 이집트로 돌아가 유대인들을 해방시키는 대업을 시작한다. 모세는 람세스 2세에게 유대인들이 광야로 가서 제사드릴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다가 거절당한다. 모세는 이어지는 담판에서도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때부터 모세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파라오와 정면으로 맞선다. 《성경》의 열 가지 재앙 이야기가 그것이다. 나일 강이 피로 변하고, 개구리 소동이 일어나고, 모기와 등에가 들끓고, 가축병과 피부병이 만연하고, 우박이 쏟아지고, 메뚜기 소동이 일어나고, 세상이 어둠으로 변한다. 하지만 파라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은 이집트의 모든 맏아들의 죽음이었다.
재앙이 넘어가다
하느님은 마지막 재앙이 오기 전에 이스라엘 가정은 대문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라고 지시했다. 그날 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의 피를 바르고 기다렸다. 피 흘림은 죄 사함의 표시로 하느님 백성이라는 징표였다. 여기저기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집트의 모든 장자가 죽었으며 파라오라고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대인의 맏아들은 모두 무사했다. 그래서 그날을 ‘재앙이 넘어 간다’는 뜻의 유월절(과월절)이라 부르게 되었다. 영어로는 ‘Passover’, 그리스어로 파스카(Pascha)로 발음되고 히브리어로 ‘페사흐’로 불린다.
더 이상 버티는 것이 힘들다고 판단한 파라오는 밤중에 모세와 형 아론을 불러 이집트에서 떠나라고 했다. 이렇듯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의 포로생활에서 해방된 날이다. 하느님은 이를 자손 대대로 기념하라고 명했다.
탈출의 긴박함 속에서 유대인들은 먹을 때도 허리띠를 매고, 신발을 신고,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야 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가지고 나온 밀가루로 누룩 없는 과자를 구웠다. 당연히 반죽이 부풀지 않았다. 이집트에서 경황없이 나오느라 미처 누룩을 챙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엑소더스
우여곡절 끝에 유대인들은 탈출을 감행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엑소더스’다. 엑소더스란 탈출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다. 아이들을 제외해도 장정만 60여 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인원이라 이동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바뀐 파라오의 추격이 시작됐다. 정예부대가 이끄는 전차만 6백여 대에 이르는 대부대였다. 《성경》에는 이집트 탈출 과정에서 신이 보여준 여러 기적을 기록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홍해 바닷물을 양쪽으로 갈라지게 해 이스라엘 민족을 무사히 건너게 한 다음 바닷물을 다시 합쳐 뒤따라 밀어닥친 이집트 군대를 익사시킨 기적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하느님을 표현하는 거룩한 생활
드디어 유대인들은 해방을 맞았다.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너희야말로 사제의 직책을 맡은 내 나라, 거룩한 내 백성이 되리라”라고 말했다. 이후 ‘사제의 나라’, ‘거룩한 백성’이라는 말은 유대인 삶에 항상 지표가 된다.
《토라》는 유대인들에게 어떤 장소, 어느 때든지 거룩하라고 가르친다. 유대교의 ‘거룩함’은 성스럽고 위대하다는 뜻이지만 금욕적인 삶을 뜻하지는 않는다. 거룩한 생활이란 하느님을 표현하는 삶이다. 하느님이 보기에 아름답고 정당한 길을 감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신의 뜻을 추구하는 ‘거룩함’의 정신이 유대인의 가정생활, 사회생활, 신앙생활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40년 동안 만나를 먹다
이집트로 건너간 지 430년 만에 이집트를 탈출한 유대인들은 새로운 땅에 이르렀다. 하지만 가지고 온 양식도 떨어지고 물과 먹을 것이 부족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이집트 노예생활을 그리워하며 분노를 터뜨렸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유대인들에게 기적을 행한다.
모세에게 하느님은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라”라고 일렀다. 과연 그날 저녁 수많은 메추라기가 야영지를 덮었고 다음날 아침에는 서리같이 희고 동그란 것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모세는 백성에게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는 양식이니 각 사람의 몫대로 이것을 거두어라” 하고 말한다. 이것이 ‘만나(manna)’다. 맛은 꿀 과자 같았으며 해가 뜨면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서 그것을 모아야 했다. 또 하루가 지나면 부패해 그날 필요한 몫 곧 한 사람이 1호멜(4리터)씩만 가질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40년 동안을 날마다 만나에 의지해 목숨을 이어갔다.
꾸중 들은 모세,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다
배고픔이 해결된 이스라엘 민족은 이번에는 마실 물이 없는 것에 불평하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모세에게 먹을 물을 달라고 성화였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너는 지팡이를 가지고 회중을 불러 모아라. 그리고 형 아론과 함께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 바위에게 물을 내라고 명령하여라. 그리하면 네가 이 바위에서 터져 나오는 물로 회중과 가축을 먹일 수 있으리라.”(〈민수기〉 20:8)
모세는 늘 불평을 일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역자들아. 들어라. 이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해주랴?”라고 화를 내면서 바위를 지팡이로 두 번이나 쳤다. 물이 콸콸 터져 나왔다.
그런데 이때 모세가 성질을 부린 것이 문제였다. 하느님의 명대로 바위를 향해 말하지 않고 화를 내며 지팡이로 쳐서 물이 나오게 한 행위는 하느님의 영광을 자신이 취한 큰 죄였다.
백성들은 흡족하게 물을 마셨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께 꾸중을 듣는다. “나를 믿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내 영광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이 회중에게 줄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결국 모세는 살아생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 지내는 유월절 축제
유대인들은 이집트를 탈출한 이듬해, 시나이 광야에서 첫 번째 유월절 축제를 지낸 이후 지금까지 유월절 축제 때면 허리에 띠를 매고, 신을 신고, 지팡이를 쥐고, ‘누룩 없는 빵’을 먹는다. 과거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잊지 않으려고 노예생활의 고통을 상징하는 쓴 나물 ‘고엽’과 누룩을 넣지 않은 납작하고 딱딱한 과자 ‘무교병(無酵餠, matzah)’을 먹으면서 선조들의 고통을 되새기는 것이다. 유월절은 과거를 망각하지 않으려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유대민족 최대의 축제다.
여전히 유대인들은 매년 봄 일주일 동안의 유월절 기간에 발효식품을 먹지 않는다. 《성경》에 유월절에는 발효식품을 먹지도 말며 집에 보관하지도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기간에는 이스라엘의 식품가게에서 부풀린 빵을 구할 수 없다. 심지어 맥도널드나 피자헛 같은 세계적인 프랜차이즈에서도 딱딱한 나무토막 같은 햄버거와 피자가 나온다.
누룩은 교만의 위험성을 암시
여기서 누룩은 교만의 위험성을 암시한다. 교만은 인간이 신을 도외시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또한 누룩은 인간의 자부심이 이기심으로 ‘커져 가는’ 방식을 뜻한다.
빵에 누룩을 넣으면 부드럽고 먹기가 편해진다. 이처럼 누룩은 안락하고 편안한 생활을 의미한다. 인간은 편해지면 나태해지고 타락하기 쉬워진다. 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중심적인 사람 곧 교만한 사람이 된다. 누룩이 들지 않은 빵은 딱딱하고 맛이 없다. 그래서 ‘고난의 떡’으로 불린다. 누룩 없는 빵을 먹는 것은 고난의 의미를 기억하기 위함이다. 고난은 인간을 성숙시키는 신의 은혜이기도 하다.
유대인에게 ‘40’의 의미
유대민족이 광야를 걸어간 과정을 보면 직선거리로 일주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런데 그들은 굽이굽이 돌아서 40년 동안 고난의 길을 걸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 동안 열 번이나 하느님을 시험하고 불신했다. 그들은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깨달아야 했다. 여기서부터 신앙이 시작되었다.
유대교에서 40년간의 광야생활은 아주 중요한 집단적 기억이다. ‘40’이라는 숫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구원을 위한 정화기간을 뜻한다. 고난과 시련을 통해 죄를 참회케 하고 속죄시키는 것이다. 또 ‘40’은 정화를 통해 그 뒤 더 높은 상태로의 부흥을 뜻하며 고난의 과정을 통해 은혜를 주는 하느님의 섭리를 의미한다
십계명
시나이 산에서 40일 동안의 기다림 끝에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다. 유대교에서는 〈출애굽기〉에 기록된 대로 시나이 산 정상에 하느님이 직접 ‘강림’함으로써 모든 인류에게 스스로를 드러냈다고 여긴다. 《성경》에 따르면 그 판은 하느님께서 직접 만든 것이고, 판에 새겨진 글자도 손수 새긴 것이라 한다.
그런데 모세가 시나이 산에 율법을 받으러 들어간 사이에 사단이 일어났다. 산에 올라간 모세가 오래도록 내려오지 않자 죽었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은 혼란과 의심에 빠졌다. 사람들은 두렵고 당황한 나머지 자신들의 앞길을 인도해줄 ‘금송아지’를 만들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시 소는 바알 신을 의미했다. 가나안 여러 신 중 우두머리 격 신이었다. 그들은 아론으로 하여금 금송아지를 만들게 했다.
그때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께서 손수 돌 판에 쓴 증거 판 두 개를 받아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히브리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춤추고 경배하는 우상숭배에 격노해 증거 판을 내던져 금송아지를 부순다. 그리고 그 가루를 물에 타서 백성들에게 마시게 했다. 그날 우상숭배로 인해 3천 명이나 죽임을 당했다.
모세는 재차 시나이 산에 올라가 40일간을 하느님과 교통하며 또다시 십계명을 받았다. 이로써 신과 계약을 다시 맺고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 이 계약은 아브라함이 맺었던 계약을 새롭게 한 것으로, 이제 유대인들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하느님에게만 예배드리기로 했다. 이후 4천 년 동안 ‘하느님과의 계약’ 사상만은 변함없이 이어져 왔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해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두 번째 십계명 판을 갖고 내려온 날이 유대인의 속죄일 ‘욤 키푸르’다. ‘욤 키푸르’란 히브리어로 덮어주다라는 뜻이다. 신이 죄를 덮어주는 날 곧 속죄일을 뜻한다. 이날은 한 해 동안 명예와 권력을 위해 살아온 죄를 참회하고 하루 종일 금식하며 예배를 드린다.
십계명의 요지
유대민족의 헌법인 십계명은 이후 모든 세부 법전들의 모태가 된다. 유대교, 가톨릭, 개신교 모두 십계명을 하느님이 준 계명으로 받아들인다. 십계명은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가 신앙에 관한 계명이다. 이렇듯 하느님이 유대인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당부한 것이 신앙이었다. 특히 다른 신을 만들어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엄하게 말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기 위해 야훼 대신 ‘아도나이(나의 주님)’ 등으로 읽는다.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야훼’ 또는 ‘여호와’라고 직접 부르는 것을 대담한 행위로 간주한다. 실제로 가톨릭에서도 앞으로 《성경》에서는 야훼나 여호와 대신 하느님, 주님 등으로 호칭을 바꾸기로 했다.
다섯 번째부터 마지막 열 번째 계명까지는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할 계명들이다. 우선적으로 지켜야 할 계명이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이며 다른 계명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당연히 지켜야 할 강제적 성격인 반면 이 계명은 십계명 가운데 유일하게 합당한 대가를 언급하고 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러면 너의 하느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너의 생명을 길게 하리라.” 다시 말해 장수의 축복을 주겠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축복 중에서도 장수를 최고로 여긴다.
십계명
제일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제이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제삼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제사는, 안식일을 기억해 거룩하게 지키라.
제오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제육은, 살인하지 말라.
제칠은, 간음하지 말라.
제팔은, 도둑질하지 말라.
제구는, 네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하지 말라.
제십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십계명에 담긴 뜻은 크게 두 가지다. ‘하느님 공경’과 ‘인간사랑’이다. 예수는 훗날 바리새파의 질문에 하느님의 계명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복음〉 22:36~40)
율법, 성문 율법과 구전 율법
유대교 경전 《토라》에는 창조이야기를 시작으로 이집트 탈출과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의 유대인 역사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을 비롯해 유대민족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계율이 상세히 적혀 있다. 《토라》에 실린 계율의 수는 613개다. 이 가운데 “하지 마라”가 365개로 일 년의 날 수와 같고, “하라”가 248개로 인간의 뼈와 모든 장기의 수와 같다. 이는 다시 말해 우리가 일 년 내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는가 하면, 우리의 지체를 가지고 열심히 해야 할 것들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토라》는 특별하게 규제하는 것이 없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도록 허락되어 있다. 규제를 최소화하는 이른바 ‘네거티브 시스템’이다.
《토라》는 ‘가르침’이란 뜻의 히브리어다. 이렇듯 《토라》는 유대민족이 어떻게 태동해 왔는지를 알려주는 역사서이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율법서다. 하느님은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그의 백성들이 앞으로 지킬 십계명과 율법을 주며 삶의 작은 부분까지 아주 자세히 알려주었다. 율법의 말씀은 글로 쓴 《토라》에 기록되어 있고 구체적 설명은 장로들에게 구전되어 내려왔다.
그래서 유대인에게 율법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글로 쓰인 ‘성문 율법’이요 또 다른 하나는 말로 전해 내려온 ‘구전 율법’이다. 둘 다 모세가 하느님에게 받은 가르침이다.
유대교의 본질, 율법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받은 십계명을 포함한 율법이 유대교 신앙의 본질이다. 신은 유대인들을 이집트에서 구했을 뿐 아니라, 시나이 산에서 공식적으로 언약을 맺고 십계명을 줌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 및 이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또 예배하는 법과 사는 법을 가르쳤다. 유대인에게 있어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이 손수 가르쳐준 이 율법을 지킨다는 뜻이다.
이러한 율법과 언약으로 하느님과 유대민족 간에 새 계약이 체결되어 유대인들은 비로소 하나의 민족으로 재탄생했다. 이로써 진정한 의미의 이스라엘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이집트 탈출과 시나이 산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유대인들은 오늘날에도 유월절과 율법을 받은 날을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경축하며 해마다 그 기억을 새롭게 하고 있다.
율법 정신, 시대를 앞서다
유대교 율법의 기본정신은 ‘정의와 평등’이다. ‘정의’라 함은 홀로된 과부나 고아 등 공동체의 약자를 돌보는 것이다.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를 행하지 않으면 불의를 저지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평등’이라 함은 세상의 통치자는 하느님 한 분으로 그 아래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평등하다는 사상이다.
오늘날 유대인 공동체의 완벽한 복지제도는 바로 이 정의의 정신에서 유래했다. 그들은 공동체 내의 약자나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을 어떻게든 같이 끌어안고 간다. 또 평등 정신은 어떤 성문법보다도 ‘민주주의 정신과 여성 존중’이라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가르치고 있다. 그 무렵 ‘법 앞의 평등’이라는 개념은 파격이었다. 오늘날 유대인들 특유의 도전 정신을 의미하는 ‘후츠파(chutzpah)’ 정신 또한 이 평등사상에서 유래했다.
게다가 율법에 명시된 위생관련 사항은 유대인들을 죽음의 전염병에서 건져주었다. 그들이 목숨 걸고 지킨 안식일 개념은 훗날 1천5백 년이 지나 로마시대에 채택되어 인류를 당시의 혹독한 노동 환경에서 구해내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는 쉴 수 있게 했다. 또 모세 율법은 최초로 종교와 국가의 분리를 원칙으로 세웠다. 이는 3천 년이 지난 뒤 18세기 계몽주의의 시대가 되어서야 역사에 등장하는 개념이다.
모세의 율법 수여가 끝나자 모세의 임무도 완수된다. 그 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요르단 강 동편 모압 광야에서 죽었다. 모세는 죽기 전 유대민족의 새 지도자로 여호수아를 세웠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모세는 기독교도들에게 예수와도 같은 인물이지만 그를 기리는 명절은 없다. 복음서 곧 《신약성경》은 예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지만 《모세오경》에는 모세가 말했다고 인용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통치자는 하느님 한 분뿐이며 하늘 아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믿는다. 모세도 인간 중 한 명이라는 것이다.
예정되어 있었던 고난의 역사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말이 있다. “너는 잘 알아두어라. 너의 후손은 남의 나라에서 나그네살이하며 4백 년 동안 그들의 종살이를 하고 학대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네 후손을 부리던 민족을 나는 심판하리라. 그런 다음, 네 자손에게 많은 재물을 들려 거기에서 나오게 하리라.”(〈창세기〉 15:13)
이미 〈창세기〉 때부터 예정되어 있던 고난의 역사인 것이다. 일주일 만에 갈 수 있는 가나안 땅을 지척에 두고도 40년간 광야의 삶을 살아야 했던 민족, 이들의 후손이 2천 년 가까이 외지를 떠돌면서도 신과 가나안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쇠는 뜨거운 불속의 풀무질과 다듬질을 반복함으로써 더 단단해지고 예리해진다. 실질(實質)이 강해지는 것이다. 하느님은 유대민족을 혹독한 시련을 통해 단련시켰다. 유대교는 이러한 민족적 고난과 시련의 과정을 거쳐 탄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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