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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은 대선 승리의 기쁨을 안은 채 4월 9일 18대 국회의원 선거(이하 4.9총선)에서의 대승을 위한 채비를 갖췄다. 그 첫단계는 공천이었다. 한나라당은 1월 24일 안강민 전 서울지검장을 위원장으로 4.9 총선 출마자를 결정할 공천심사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을 시작으로 공천 심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공천 결과는 친이, 친박 진영 간 새로운 갈등의 신호탄이었다. 공천 심사 기간에 터져 나온 파열음은 중량급 정치인들의 대거 낙천과 함께 탈당, 한나라당에 대항할 새로운 정당, 그리고 극심한 진통이라는 후유증을 낳았다.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회가 2월 29일 서울 지역 총선 출마자 22명을 비롯해 66명의 1차 공천자의 명단을 발표할 때만 해도 공천작업은 순조로운 듯이 보였지만, 3월 13일 영남권의 대대적 ‘물갈이 공천’이 이뤄지면서 한나라당은 매머드급 태풍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경선캠프 선대위원장을 지낸 5선의 박희태 전 국회 부의장과 친박 진영의 좌장격인 김무성 최고위원을 비롯해 박종근, 안택수, 권오을, 정형근 의원 등 현역의원이 무더기로 낙천했다. 현역 의원 교체비율은 한나라당 창당 이래 가장 높은 43.5%에 달했다. 이어 3월 16일 공천심사 결과 5선의 김덕룡 의원을 비롯해 맹형규 의원, 박계동 의원이 탈락했다.
총 245명의 4.9총선 지역구 출마자 공천이 완료된 가운데 친이 진영 인사는 157명이, 친박 진영 인사는 44명이 공천됐다. 당장 공천에서 탈락한 친박계 인사들의 즉각적인 반발이 가시화됐다. 친박계인 김무성 의원은 공천 탈락 직후인 3월 14일 한나라당을 탈당했으며, 3월 17일 이경재, 박종근, 이해봉, 이인기, 김태환 의원 등과 함께 ‘친박 무소속 연대’를 발족, 4,9총선에 임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한나라당 서청원 전 대표와 홍사덕 전 의원, 이규택 의원 등은 ‘친박연대’를 구성, 총선에 임했다.
박근혜 전 대표는 공천 결과에 대해 3월 23일 기자회견을 열어 “저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며 당 지도부의 책임론을 공식 제기, 파문은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공천 후유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공천 심사 시작과 함께 불거진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전 국회 부의장의 공천 논란이 본격화됐다. 한나라당 소장파의 리더격인 남경필 의원이 3월 21일 이상득 전 부의장의 총선 불출마를 요구한 것을 시작으로 급기야 3월 23일 한나라당 수도권 공천자를 중심으로 한 공천자들이 가세하고 나선 것이다. 이른바 ‘55인 파동’으로, 이는 여권의 실세로 떠오른 이상득 전 부의장과 이재오 전 최고위원의 권력투쟁으로도 비쳐졌다.
이에 강재섭 대표는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사태 진화에 나섰지만, 당 내분은 쉽게 진화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득 전 부의장과 이재오 전 최고위원이 3월 25일 더이상의 정면충돌을 피하고 ‘동반 출마’하기로 가닥을 잡고, ‘55인’ 역시 추가행동을 하지 않기로 함에 따라 상황은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공천 과정에서 불거진 친이ㆍ친박 갈등, 그리고 친이계 내부의 권력투쟁은 2008년 집권여당인 한나라당의 순항을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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