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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암리학살사건 제암리 사건, 提巖里虐殺事件
    1919년 4월15일 경기도 화성시 소재 제암리교회에서 일본 군인들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 사건. 1919년 3월 31일 발안 장터에서 있었던 만세운동 후 계속되는 시위에 대한 경고와 보복으로, 일본 육군에 의해 민간인 29명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의료선교사 스코필드와 언더우드에 의해 외부에 알려졌다. 1982년 교회...
    문화재 지정 :
    제암리3·1운동순국유적(사적 제299호, 1982년)
    발생 :
    1919년 4월 15일
  • 제암리 학살 사건 (관련어 제암리학살사건) Jeamni m..
    제암리 학살 사건(提巖里虐殺事件)은 일제강점기인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소재 제암리 감리교회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이다. 기독교계에서는 "제암리감리교회 사건"으로 부르며, 줄여서 '제암리 사건'이라고도 부른다. 1982년 9월 29일 문화공보부는 사건 지역을 사적 제29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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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
    버렸다. 이 같은 만행으로 이날 제암리일대에서는 사람과 가옥, 가축, 의류, 곡식 등이 타는 냄새와 연기가 10여㎞ 밖까지 퍼져 나갔다고 전한다. 제암리교회 학살 사건이 일어난 후 신자나 일반인들은 일본의 감시 때문에 사건 현장에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사건을 전해 들은 캐나다 의료선교사 스코필드...
    위치 :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길 50
    문화재 지정 :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 사적 제299호(1982.12.21 지정)
  •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주민들을 모이게 한 뒤 모든 문을 폐쇄하여 감금시키고 교회에 불을 지른 후, 교회를 향하여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23명을 학살하고 30여채의 가옥을 불태워버린 사건이다. 제암리 학살사건이 있은 지 63년이 지나서야 마을에서 4km 떨어진 도이리 공동묘지에 평토장으로 안장되었던 유해를 발굴하여 제암교회 뒷동산...
    위치 :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길 50
    문화재 지정 :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 사적 제299호(1982.12.21 지정)
  • 수원제암리참변 水原堤岩里慘變
    齋藤勇]는 『복음신보(福音新報)』에 「어떤 살륙사건」이라는 장편시를 발표하여 일본 군경의 만행에 대한 지식인의 통분을 읊기도 하였다. 한편 제암리 학살사건의 현장 지휘책임자인 보병 제79연대소속 아리다 중위에 대한 처벌은 행위가 직무 집행상 온당하였다는 이유로 덮어두려고 하였다가, 세계 여론의 지탄을...
    시대 :
    근대
    유형 :
    사건
    분야 :
    역사/근대사
  •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 華城 堤岩里 三一運動 殉國 遺蹟
    13일 발안에 도착한 일본군은 지역 일본 경찰에게 상황을 보고받았다. 15일 제암리에 도착한 일본군은 강연이 있다고 속여 기독교와 천도교 남자 신자 20여 명을...모이게 하였다. 돌연 출입문과 창문을 잠그고 안에 있는 사람들을 총칼로 학살한 뒤,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교회당에 불을 질렀다. 이때 불속에서 뛰쳐...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유형 :
    유적
    분야 :
    역사/근대사
  •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
    전동례의 증언으로 이 지역을 발굴 조사하였다. 그 결과 23위의 유해와 희생자들의 조끼단추, 동전, 못, 병들이 함께 출토되어 이곳에 표석을 세우고 합동장례식을 거행하였다. 불탄 예배당터에는 순국기념탑을 세우고, 국·내외 관계자료를 모아 기념관에 전시해 국민 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제암리 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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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향남읍
    부영주택 || 향남읍 상신하길로328번길 21 || 2015년 6월 |-|서봉마을 6단지 부영 || || || |-|서봉마을 7단지 부영 || || || |-|오색마을 9단지 부영 || || |-|오색마을 10단지 부영 || || |-|오색마을 11단지 부영 || || |-|언덕마을 17단지 부영 || || |} 화성종합경기타운 제암리 학살 사건 화성시 토막글
    도서 위키백과
  • 김성열 金聖烈
    23명을 제암리교회에 모이게 했다. 주민들이 지시에 따라 교회 안으로 들어가자 아리타는 출입문과 창문을 모두 잠그고 집중사격을 명령하는 동시에 불을 놓아 교회를 태워버렸다. 이때 주민들 23명이 교회 안에서 무고하게 학살되었으나 유해는 군경의 방해로 가족조차 접근할 수 없었다. 고주리로 이동한 일본 군경은...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유형 :
    인물/근현대 인물
    분야 :
    역사/근대사
  • 김세열 金世烈
    주민들에게 전달할 사항이 있다고 속이고 주민들을 제암리교회에 모이게 하였다. 주민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가자 아리타는 출입문과 창문을 모두 잠그고 집중...불을 놓아 교회를 태워버렸다. 이때 주민들 23명이 교회 안에서 무고하게 학살, 희생되었으나 유해는 군경의 방해로 가족조차 접근할 수 없었다. 이어 고주리...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유형 :
    인물/근현대 인물
    분야 :
    역사/근대사
  • 딜쿠샤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687호, Dilkusha
    33명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입수했으며, 동생을 통해 몰래 독립선언서를 외국으로 보내 보도했다. 테일러는 이후에도 일본군이 수원 제암리에서 주민들을 집단 학살제암리학살사건을 취재하는 한편, 일본 총독을 찾아가 조선인 학살에 대해 항의했다. 이런 사건들로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기도...
    도서 다음백과 | 태그 서울 , 문화재 , 건축물
  • 김주업 金周業
    俊夫] 중위가 이끄는 보병 13명은 발안에 도착하였다. 수비대는 순사보 조희창(趙熙彰)과 일본인 사사카[佐坂] 등의 안내를 받아 4월 15일에 제암리 학살사건을 저질렀다. 학살을 자행한 수비대는 옆마을인 고주리로 이동하였다. 일본군은 김주업 일가족 6명을 끌고 가 살해한 후, 시신마저 불태웠다. 3일이 지난 뒤에...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유형 :
    인물/근현대 인물
    분야 :
    역사/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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