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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래퍼드

다른 표기 언어 Thomas Wentworth, 1st earl of Strafford
요약 테이블
출생 1593. 4. 13, 런던
사망 1641. 5. 12, 런던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귀족.
Baron of Raby, Sir Thomas Wentworth(1611~28), Viscount Wentworth(1628~), Baron Wentworth of Wentworth Woodhouse, Baron of Newmarch and Oversley라고도 함.

개요

국왕 찰스 1세의 주요고문으로 국왕의 통치권을 강화하려다 의회에서 탄핵받아 처형당했다(영국내란).

초기생애와 활동

요크셔 지방의 지주인 윌리엄 웬트워스 경의 생존한 아들 중 큰아들인 그는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세인트존스 칼리지와 템플 법학원에서 수학했으며 1611년 제임스 1세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다.

몰락한 귀족인 컴벌랜드 백작의 딸 레이디 마거릿 클리퍼드와 결혼함으로써 북부지방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던 유서 깊은 귀족가문과 유대를 맺었다.

1614, 1621년에 요크셔를 대표해 의원생활을 했으며, 1624년에는 폰티프랙트 지역의원으로 활동했다. 1622년 아내가 자식 없이 사망하자 클레어 백작 존의 딸 애러벨라 홀리스와 재혼했다. 왕실의 눈밖에 난 귀족이었던 클레어 백작은 당시 국왕이 스페인과 프랑스에 대적해 과도한 비용을 들여 실익 없는 전쟁을 벌이는 정책에 대해 비판하던 인사들에게 스트래퍼드를 소개했다.

궁정 내의 다른 비판세력들과 함께 스트래퍼드는 1626년 의회진출이 좌절되었으며 그해말에는 전쟁비용조달을 위해 왕이 부과한 공채납부 승인서에 서명을 거부하다 얼마 동안 구금되기도 했다. 찰스 1세의 정책에 반대했던 경력에도 불구하고 당시 북부지역에서 입지강화를 노리던 왕이 1628년 그에게 남작작위를 제의함에 따라 왕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는 북부지역 장관(잉글랜드 험버 북부지역의 실질적인 총독)에 임명되었으며 1629년에는 추밀원에 들어갔다.

의회에서 열렬히 찰스 1세의 정책을 비판하던 그가 그렇게도 빨리 왕의 편에 서서 관직을 맡게 되자 가장 가까운 친구들조차도 놀랐다. 스트래퍼드의 이같은 변신의 이면에는 1628년 여름 이후 찰스 1세가 점차로 전쟁 추진을 포기했기 때문이라는 나름대로의 논리적 명분도 있기는 했지만 분명히 그의 행동은 어느 정도 개인적인 야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추밀원에서 그는 찰스 1세 집권 초기의 통치방식을 특징짓는 온정적인 성격의 정부를 주창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는 치안판사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고 구빈법이 좀더 효율적으로 시행되도록 하며, 또한 인클로저(공유지에 울타리를 쳐서 사유지화하는 것) 단속법과 기근에 대처하는 여러 조치들의 시행을 감시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1631년 옥수수 흉작이 들었을 때 개인적으로 이득을 보기도 했다. 북부지역 장관으로서 그는 자신의 권위에 저항하는 모든 세력들을 저지했으며 국왕의 대리자에 상응하는 영예를 주장함으로써 많은 적을 만들었다.

그러나 지역의 사법제도를 감독하고 종종 전횡을 일삼던 지방귀족들을 단속하는 등 그의 정책시행은 대체로 공정했으며, 효율성도 있었다. 1631년 몹시 사랑하던 부인이 죽자 크게 상심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1632년 10월 이웃한 시골지주의 어린 딸 엘리자베스 로즈와 비밀리에 결혼함으로써 추문을 일으켰다.

아일랜드 총독

찰스 1세는 스트래퍼드를 아일랜드 총독에 임명했다.

1633년 여름, 총독으로 부임하자마자 국왕의 권위를 확고히 세우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잉글랜드 출신' 지주들로 이루어진 지배적 파당세력을 타파했다. 이와 함께 잉글랜드인 정착지를 확대했으며 농경법을 개선해 토지생산성을 높이고 산업과 교역을 진흥했다. 그의 궁극적 목적은 아일랜드의 법률과 관습을 영국 제도에 동화시키는 것이었으며 또한 번영을 누리는 프로테스탄트 지역인 아일랜드를 영국 국왕의 수입원 가운데 하나로 만드는 것이었다.

아일랜드에서 효율적이고 강력한 행정을 계속 펴다 1639년 소환명령을 받았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반란에 대처하기 위해 스트래퍼드의 조언과 지원이 필요했다. 이 반란은 스코틀랜드 주민들에게 주교감독제도를 강요함에 따라 촉발된 것이었다. 그는 1640년 백작작위를 받았으며 위기상황을 해결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수행하는 그의 정책은 그 자신과 찰스 1세 모두에게 불행을 안겨다주었다. 전쟁비용 승인을 위해 특별히 소집된 의회는 요구대로 움직여주지 않았으며, 잉글랜드 군대를 지휘하던 스트래퍼드는 스코틀랜드 반란세력이 북부의 주들을 휩쓸고 다니는 것을 막지 못했다.

자신의 군대에 자금을 댈 능력도 없고 더군다나 스코틀랜드 반란세력을 돈으로 매수할 수도 없었던 찰스 1세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공동의 움직임에 의해 1640년 11월 새로운 의회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트래퍼드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양쪽 모두에게 주요공격대상이 되었다. 그는 해외 이주를 권고받았으나, 그의 도움에 의존하고 있던 찰스 1세는 그의 생명과 재산이 아무런 손실을 입지 않을 것임을 장담했다. 스코틀랜드측과 반역을 도모하는 내용의 서신교환을 했다는 혐의로 의회 내 국왕 반대파들을 탄핵하기 위해 그해 11월 10일 스트래퍼드는 병든 몸을 이끌고 의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원의 지도자 존 은 그가 상원의 의석에 앉기도 전에 그에 대한 탄핵안을 제출했다.

1641년 3월 그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기본적인 혐의사실은 법질서를 파괴했다는 것이었으며, 잉글랜드 내 국왕 반대파들을 저지하기 위해 아일랜드 군대를 불러들이려 했다는 혐의가 추가되었다. 좀더 구체적인 혐의사실들은 아일랜드와 북부지역에서 행정업무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노련한 술수로 자신을 변론했으며 어쩌면 무죄방면될 것 같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존 핌이 권리박탈 법안(의회의 특별조치로 즉결 사형선고를 내리기 위한 것)을 제출했다. 하원은 압도적 다수결로 이 법안을 통과시켰으며, 민중봉기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상원 역시 근소한 표차로 이 법안을 승인했다.

처형

화이트홀 부근에 성난 군중들이 몰려든 가운데 스트래퍼드는 국왕에게 과거에 자신을 보호해주겠다고 한 약속을 없었던 것으로 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고, 왕비의 안전을 걱정하고 있던 찰스 1세는 스트래퍼드의 처형을 단행하는 법안에 동의했다.

1641년 5월 12일 환호하는 엄청난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트래퍼드는 형장으로 끌려갔으며, 최후 진술을 통해 '국왕과 그 백성의 공동 및 개인적 번영'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다시 한번 천명했다. 그는 자신의 견해에 따라 언제나 이같은 신념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영국 역사에서 그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야심가였으며, 권력과 부에 대한 탐욕의 소유자로 무자비하고 때로는 부정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자주 호소력 있게 표명해왔던 자비로우면서도 권위 있는 정부와 효율성 있는 행정부에 대한 이상을 간직하고 있었다. 무수히 많은 적들을 만들었지만 몇 안 되는 가까운 친구들은 그에게 깊은 애착을 느꼈다. 생의 마지막 몇 주 동안 보여준 위엄과 언변, 그리고 국왕에 대한 충성심은 그의 적들에게조차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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