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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의 역사는 825년경 알스터 강과 엘베 강 사이에 있는 사질(沙質)의 갑(岬)에 건설된 하마부르크 성으로부터 시작된다.
834년 이 성의 세례장은 대주교좌 소재지가 되었고, 대주교 안스가르는 초기 함부르크 시를 북유럽 이교도에 대한 선교의 토대로 삼았다. 845년 바이킹족의 침입으로 화재를 입어 재건설되었으며, 그후 300여 년 간 8번의 화재를 입었다. 11세기말경 북유럽의 정신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이 끝난 후부터는 종교보다 상업이 함부르크의 주된 역할이 되었다.
1120~40년 일부 무역업이 정착되고 홀슈타인 백작 아돌프 2세가 발트 해와 인접한 곳에 뤼베크를 건설하면서 함부르크는 뤼베크의 발트 해 항구로서 경제발전이 가속화되었다. 1188년 가을 일단의 함부르크 상공인들이 자신들의 봉건영주인 샤우엔부르크의 아돌프 3세로부터 엘베 강 이용의 편익을 위해 알스터 강에 항구 및 부대시설과 함께 구도시에 인접해서 신도시를 건축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1189년 5월 7일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는 무역특권·사용료면제·운항특권을 인정하는 아돌프 백작의 인가장을 인준했다.
13세기에 함부르크는 한자동맹의 발달로 면적과 경제적 중요성이 점차 증대하여 한자 동맹에서 뤼베크 다음 가는 위치를 차지했다. 러시아와 플랑드르 사이의 무역에 있어 주요전진기지였던 함부르크는 무역 루트를 보호하기 위해 도시와 바로 인접한 엘베 강 지류 구역과 하류의 삼각주를 확보함으로써 강의 이용을 통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류 지역 항행의 보호자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1459년 홀슈타인의 마지막 샤우엔부르크 백작이 죽자 정치적 혼란이 일어났으며, 독일에서 그의 군주권은 덴마크 왕실로 넘어갔다. 그러나 함부르크는 덴마크의 종주권을 거의 인정하지 않았다. 중세말에 이르면서 한자 동맹은 점진적으로 해체되어 함부르크는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고, 1550년경에는 경제적 중요성에서 뤼베크를 능가하게 되었다. 증권거래소(1558)와 함부르크은행(1619)이 설립되었고, 1662년에는 선박호송체계가 이루어짐으로써 함부르크 상인들은 처음으로 공해상에서 전사들의 호위를 받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해상보험이 처음으로 독일에 도입되었다. 새로운 세력 신장은 2가지 요인에 기인하는데 첫번째는 16세기 후반 종교전쟁으로 많은 네덜란드 상인들이 엘베 강 하류 지역으로 이주함으로써 함부르크가 국제무역의 중심지가 된 것이고, 2번째는 1616~25년에 도시가 철저히 요새화되어 30년전쟁이라는 최악의 위기 속에서도 별 문제 없이 사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17세기말에 인구 7만 명의 함부르크는 독일에서 쾰른 다음으로 큰 도시가 되었다.
1768년 5월 27일 덴마크와 체결한 고토르프 조약으로 함부르크는 덴마크 왕의 형식적 지배로부터 벗어났으며, 함부르크 시와 엘베 강 좌안 사이에 있는 섬들을 할양받았는데 1세기 뒤에 이 지역은 새로운 선착장들의 부지가 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러한 이점을 향유하지 못하고 독일의 구질서를 무너뜨린 나폴레옹 전쟁으로 1810년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에 복속되었다. 나폴레옹 몰락(1814~15) 후 함부르크는 독일 연방을 구성하는 한 주가 되었고, 1819년 이래 '자유 한자 도시 함부르크'라고 불렸다. 아프리카·아시아·아메리카 신개척지로 함부르크의 무역이 확대되면서 급속히 옛 번영을 되찾았고, 1842년 5월 도시의 1/4을 파괴한 대화재가 일어났으나 도시는 계속 번성했고, 항구에는 엘베 강 어귀의 조류 상태와 상관없이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1871년 건설된 독일제국하에서 함부르크의 정치적 지위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발전은 계속되었다. 인구가 밀집된 브루크 섬에 있던 찬란한 바로크 양식의 집들은 1880년대에 새로운 자유항의 창고를 건설하기 위해 철거되었다. 19세기말에 인구가 13만 명에서 70만 명으로 증가하면서 함부르크는 교외지역과 아임스뷔텔·에펜도르프 등 인접 농촌지역으로 시역을 넓혔다.
20세기에는 세계로 통하는 독일 관문으로서의 지위를 강화하면서 엘베 강 좌안에 새로운 선창과 부두를 건설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성장이 주춤거렸고, 함부르크의 국제무역이 붕괴되면서 1,466척의 상선이 항구에 묶여 있었다. 전후 전승연합국은 독일에게 배상의 대가로 함부르크의 거의 모든 상선을 요구했다. 전후 오랫동안 함부르크는 기존의 모든 잠재력을 소진했기 때문에 발전을 이룰 수 없었으나, 1937년 1월 26일 대(大)함부르크 법령은 당시까지 프로이센에 속했던 알토나·반츠베크·하어부르크 등의 인접도시를 함부르크에 합병하도록 함으로써 이러한 상황을 바꾸어놓았다.
이들 지역의 대규모 개발계획을 통한 성장 전망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깨졌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계속된 공습으로 함부르크 주거지역의 50%, 항구설비의 60%가 파괴되었고, 5만 5,000명의 주민이 죽었다. 급속히 전개된 재건으로 1960년대에 새롭게 건설된 광대한 사무지역과 함께 전후 상업적 번성이 다시 시작되었다. 소중한 전통, 번창하는 상업활동, 문화생활, 주민의 활력이 어우러져 오늘날 함부르크를 세계에서 가장 활기찬 도시로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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