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카노바스 카스티요

다른 표기 언어 Antonio Cánovas del Castillo
요약 테이블
출생 1828. 2. 8, 스페인 말라가
사망 1897. 8. 8, 기푸스코아 산타아게다
국적 스페인

요약 스페인의 정치가.

스페인에 부르봉 왕조를 부활시키는 데 큰 활약을 했으며 1876년 헌법을 기초했다. 아버지가 죽자 마드리드로 가서 친척인 작가 세라핀 에스테바네스 칼데론과 은행가 호세 살라망카의 보호를 받았다.

1852년 레오폴도 오도넬 장군에 소개된 뒤 그의 정치 고문이 되었다. 오도넬 장군의 음모(1859)에 가담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오도넬이 내걸었던 공약인 만사나레스 선언은 카노바스의 작품이었다.

1854년의 선거에서 말라가 지역에서 당선되어 의회(Cortes)에 진출했으나 에스파르테로-오도넬 정부를 지지하지 않았으므로 의원직에서 물러나 정부가 제의한 수입이 좋은 바티칸의 직책을 받아들였다(1855).

이탈리아에서 돌아와(1857) 정부의 여러 직책을 거친 후 알레한드로 몬 정부에서 내무부장관을 지냈고(1864) 오도넬 정부 밑에서 식민장관을 지냈다(1865). 이사벨 2세가 퇴위(1868. 9. 29)한 뒤 프림 장군이 소집한 의회에 참여(1868)했으나 아마데오 왕정(1870~73)에 반대했다. 대신 알폰소파의 지도자가 되어 알폰소 12세의 복귀를 준비했다.

마르티네스 캄포스 장군이 사군토에서 알폰소 12세를 국왕으로 선포하자(1874. 12. 29) 자유주의당 지도자인 프락세데스 마테오 사가스타와 번갈아 총리를 지냈다.

알폰소 12세가 죽자(1885. 11. 25) 마테오 사가스타 및 마르티네스 캄포스 장군과 이른바 파르도 협정을 맺고 스스로 총리 자리에서 물러남으로써,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왕에게 권력이 평화적으로 이양되고 장차 알폰소 13세가 즉위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

스페인은 그의 국내정책으로 공공질서를 되찾고 상당한 정도까지 국가적 통합을 이룩했으나, 그는 노동자 계급까지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쿠바 문제에 대해서는 전쟁 정책으로 일관해 자유주의적인 개혁을 실시하지 못했다. 더욱이 마르티네스 캄포스의 사임 이후 발레리아노 웨일레르 이 니콜라우 장군을 쿠바로 보내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장군의 탄압조치는 미국 정부를 상대로 스페인의 대의명분을 살리지 못했다.

그는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 안히올리요에게 암살당할 때까지도 쿠바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썼다. 카노바스 델 카스티요는 학식이 풍부한 사람으로 언어학회와 역사학회의 회원이기도 했다. 상당한 수준의 역사학 저서를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펠리페 4세의 치적 연구 Estudios del reinado de Felipe Ⅳ〉·〈스페인 쇠퇴사 Historia de la decadencia de España〉·〈스페인의 오스트리아 가계 개요 Bosquejo de la casa de Austria en España〉 등이 특히 유용하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정치가

정치가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Daum백과] 카노바스 델 카스티요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