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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앙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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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357. 4. 11, 포르투갈 리스본
사망 1433. 8. 14, 리스본
국적 포르투갈

요약 포르투갈의 왕(1385~1433 재위).
(영). John Ⅰ. 별칭은 O Principe de Boa Mem대체이미지ria, Jo대체이미지o de Aviz, Jo대체이미지o O Grande, Jo대체이미지o O Bastardo.

주앙 1세(Joao I)

ⓒ Anonymous/wikipedia | Public Domain

개요

카스티야 왕국으로부터 포르투갈의 독립성을 지켰고, 포르투갈의 해외 팽창을 전개했다.

아비스 왕조의 창시자이다.

초기생애

주앙은 포르투갈의 왕 페드루 1세와 테레사 로렌수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였다.

6세 때 그는 군사 조직인 아비스 기사단의 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알렌테주의 아미스에서 성지 교육과 군사 교육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1367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주앙의 이복 형 페르난두가 왕이 되어 카스티야의 새로운 통치자인 엔리케 2세와 치열한 경쟁을 시작했다. 이 경쟁은 재앙을 가져왔고, 엔리케 2세의 강요에 시달린 페르난두는 결국 갓 난 상속녀인 베아트리스와 카스티야 왕자의 결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장차 포르투갈의 독립이 위태로워졌다.

1383년 페르난두가 죽자, 미망인인 레오노르 왕비는 사위이자 카스티야 왕인 후안 1세의 요구에 굴복하여 후안을 포르투갈 왕으로 인정했다. 그때까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주의깊게 숨어 있던 아비스의 주앙은 1382년 잠시 체포되었지만, 이제 누누 알바레스 페레이라가 이끄는 젊은 민족주의자 집단의 설득을 받아들여, 갈리시아인으로서 레오노르 왕비의 총애를 받는 조언자인 오렘 백작 주앙 페르난데스 안데이루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주앙은 당장 대중의 지지를 얻었고, 레오노르 왕비는 카스티야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리스본에서 도망쳤다. 1384년 5월 카스티야 군대는 주앙이 점령하고 있는 리스본을 포위 공격했지만, 전염병이 발생하자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1384. 9).

국왕 선출

주앙은 왕국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1385년 4월 세 신분의 대표자들은 쿠임브라에서 코르테스(의회)를 열어, 살아 남은 페드루 왕의 아들들 가운데 주앙보다 나이가 많은 왕자들은 모두 적출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자, 주앙을 왕으로 선출했다. 리스본과 포르투의 시민을 비롯해 상인조합과 동업조합은 열렬히 그를 지지했지만, 나이든 귀족들은 대부분 카스티야 왕의 포르투갈 왕위계승을 지지했다. 주앙과 그의 대신이 된 누누 알바레스는 북쪽으로 진군하여 주요지역을 함락했으나 카스티야가 대규모 침공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리스본으로 돌아왔다.

스페인군이 포르투갈 중부로 들어오자, 주앙과 누누 알바레스는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리스본으로 통하는 길을 가로막고 유명한 알주바로타 전투(1385. 8. 14)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는 포르투갈의 독립을 보장해주었다. 그는 이미 잉글랜드의 도움을 받았는데 알주바로타에서는 잉글랜드의 소규모 궁수부대가 그를 위해 싸웠으며, 그는 잉글랜드와 포르투갈 동맹의 토대가 된 윈저 조약을 맺었다(1386. 5. 9). 그결과 랭커스터 공작인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 왕 페드루 1세의 딸과 재혼(1371)하여 카스티야 왕위를 계승하려는 희망을 품고 갈리시아에 도착했다.

아비스의 주앙은 1387년 2월 랭커스터의 딸 필리파와 결혼함으로써 잉글랜드와 포르투갈의 동맹 관계를 더욱 확고히 했다. 주앙과 랭커스터 공작은 함께 레온을 침략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랭커스터 공작은 철수했다. 주앙은 1389년 카스티야와 10년 동안의 휴전 협정을 맺었지만, 그후에도 카스티야와 포르투갈 국경 지방의 전투는 1411년 강화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간헐적으로 지속되었다.

팽창

주앙의 아들들은 어느덧 기사가 될 수 있는 나이에 이르렀다.

주앙이 세우타 원정을 계획한 것은 겉으로는 이 아들들을 위해서였다. 세우타는 단 1일 만에 함락되었다(1415. 8. 24). 주앙은 모로코로 계속 진격하여 아프리카의 대상로(隊商路)를 공격하고 싶었으나, 그대신 세우타가 포르투갈령 알가르베에서 보급품을 공급받는 적진 한가운데의 전투기지가 되도록 하는 데 주력했다. 이것은 마데리아 제도와 아조레스 제도의 재발견과 주민 이주로 시작된 해양 탐험을 자극했다.

주앙의 궁정은 이제 필리파 왕비를 통해 잉글랜드 전통의 영향을 받는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들의 아들 가운데 '걸출한 세대'(inclita gera이미지ão)인 맏아들 두아르테는 아버지 밑에서 왕국을 다스렸고, 나중에 왕이 되었다. 둘째 아들 페드루는 유럽 전역을 여행했으며, 두아르테가 죽은 뒤 섭정이 되었다. 항해가로 유명한 셋째 아들 엔리케는 해외 영토 발견을 후원하고 계획했다. 이 아들들에게 주앙은 포르투갈 공작의 작위를 내렸다. 딸 이사벨은 플랑드르 백작이며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와 결혼했는데, 이 결혼은 포르투갈이 북해 연안의 저지대에 갖고 있는 이권을 강화해주었다.

주앙의 사생아 아폰수는 대신인 누누 알바레스의 딸과 결혼했고, 브라간사 가문은 1640년부터 포르투갈 왕가가 되었다.

주앙은 카스티야와의 오랜 투쟁 및 새로운 귀족 계급을 대우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재정적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주앙은 국민의 지지를 받았고, 신중한 지도자이자 통찰력있는 정치가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는 자신에 충실한 동업조합에 대한 보상으로 24인회에 영구적으로 참석할 수 있게 했다.

24인회는 12개의 주요 동업조합에서 2명씩 뽑힌 대표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는 또한 이들에게 인민 재판관인 특별 판사의 지위도 부여했다. 포르투갈에서 그는 주교가 그 도시에 대해 행사했던 인기 없는 민간 재판권을 폐지했다. 그는 또한 레이리아 근처에 그의 승리를 기념하고 국가적 위인들의 무덤으로 쓰이게 될 거대한 바타야 대수도원을 세워 독실한 믿음을 과시했다. 주앙은 그가 즐기는 취미인 사냥에 관한 저서 〈리브루 다 몬타리아 Livro da montaria〉도 썼다.

리스본의 고미술박물관에는 주앙의 초상화가 있고, 바타야에 있는 무덤에는 주앙과 필리파의 동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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