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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05년부터 실시된 화폐개혁(대한제국). 일제에 의한 사업으로 기존의 조선 화폐를 없애고 일본 화폐와 통일시키는 것을 주목적으로 했다. 이전 화폐는 정부에 갖다주면 새로운 화폐인 금태환과 교환해주었다. 이 개혁의 명목은 금본위제도를 시행하는 것이었지만, 사실상 일본의 은행을 조선의 중앙은행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구화폐와 신화폐의 교환 가치는 맞지 않았고, 제도 시행 과정에서 화폐가 부족해지면서 조선에서 일하는 상인의 대다수가 파산 상태가 되었다. 일제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조선의 화폐시장을 장악했다.
화폐제도 문란과 인플레이션을 초래한 백동화를 환수하고 엽전을 점진적으로 정리하되 다이이치은행[第一銀行]권을 조선의 법화로 하고 새로운 보조화를 발행하고자 했던 사업으로서, 식민지통화제도의 수립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04년 8월 제2차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어 일본 대장성의 주세국장(主稅局長)이었던 메가다 수타로[目賀田種太郞]가 조선의 재정고문으로 부임했는데, 사실상 내정 일체에 관한 실권을 행사했다. 그는 일본정부와의 협의하에 조선재정 전반의 식민지화를 추진했으며, 화폐정리에 관한 기본방침으로서 첫째, 한국화폐의 기초 및 발행화폐를 완전히 일본과 동일하게 할 것, 둘째, 한국 화폐제도와 동일한 일본화폐의 유통을 인정할 것, 셋째, 본위화폐 및 태환권을 일본의 것으로 하거나 일본태환권을 준비로 일본정부의 감독 및 보증에 의해 발행된 은행권으로 할 것, 넷째, 보조화폐는 모두 한국정부에서 발행할 것 등을 정했다.
이 방침 아래 메가다 수타로는 한국정부로 하여금 1905년 1월 칙령 제2호로 1901년 일본과 동일한 금본위화폐제도를 확립하고자 법률상으로 채택되었던 '화폐조례'를 1905년 6월 1일부터 실시할 것을 공포했다. 칙령 제3호로는 화폐조례의 실시에 있어서는 동조례에 규정한 화폐와 품위, 양목 및 형체가 동일한 화폐는 국내에 무애통용(無礙通用)하고 공사(公私) 수수에 사용할 것을 공포했다.
칙령 제4호로는 구화폐의 교환·회수에 관한 규정이 공포되어 구화 은 10냥은 신화 금태환에 상당하는 비액(比額)으로서 정부의 편의에 의해 점차 교환 또는 환수하고 구백동화의 교환 및 환수는 7월 1일부터 개시하며, 교환 종료기간은 만 1년 후로 하고 기한 종료 후는 그 통용을 금지하되 단 통용금지 후 6개월간은 공납에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국민에게 공포된 화폐정리사업에 관한 규정은 표면적으로 화폐조례에 제시된 금본위제를 실시할 것을 표명했지만 사실은 다이이치은행을 한국의 중앙은행으로 만든 기초 위에 다이이치은행권을 한국의 본위화로 만들고자 했다는 점이다.
메가다 수타로는 이를 위해 우선 1904년 12월에 탁지부령 제2호 '금고출납역설치건'을 발령하여 다이이치은행을 금고출납역으로 규정했다. 이어서 화폐정리사무에 관한 계약서를 마련하여 다이이치은행으로 하여금 화폐정리사무를 집행시키고, 다이이치은행권을 법화로 인정함과 동시에 공사의 거래에 무제한으로 통용시키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다이이치은행은 한국의 국고금 취급 및 법화발행을 담당하는 중앙은행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다이이치은행권을 한국의 법화로 만든 바탕 위에서 화폐정리사업은 추진되었다. 1905~09년 정리의 주된 대상인 백동화는 교환·납세·매수 등의 방법으로 총 1,905만여 원이 환수되었으며, 엽전도 납세·매수·수출 등의 방법으로 점진적으로 환수되었다. 그 대신에 발행이 증가된 것은 법화인 다이이치은행권을 비롯하여 보조화인 신백동화였다.
백동화 환수로 대표되는 화폐정리사업은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첫째, 구화 2원을 신화 1원과 교환한다는 규정은 당시 백동화의 유통가치가 법정가치의 반 정도에 불과했던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지만 화폐당국이 구화의 법정가치를 무시하고 악화발행의 책임을 조선인에게 떠넘긴 것이었다. 둘째, 사업과정에서 전황(錢荒)이 초래되고 조선상인의 다수가 파산한 것이다. 당시의 조선인들은 위조백동화가 많은 현실에서 일본인 주도하의 화폐정리사업 과정에서 백동화 교환시 그들의 백동화가 갑종이 아닌 을종이나 병종의 판정을 받아 불이익을 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이에 따라 조선인은 백동화를 방매하여 부동산을 구입함으로써 유동성이 결핍되는 현상이 생겼다. 또 어음시장의 혼란, 외획의 폐지, 신화발행의 지체 등이 겹쳐 전황이 발생함으로써 종로 상인을 비롯한 다수의 조선상인이 파산했다. 이후 일제는 공동창고회사, 어음조합, 지방의 농공은행 등의 금융기관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식민지통화의 보급에 노력함으로써 조선의 통화발행권을 장악하고 식민지금융기구를 확립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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