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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부대. 1938년 무한에서 조직된 조선의용대의 일부 부대는 옌안 지역으로 이동해서 중국 공산당의 영향 하에 옌안의 한인 무장세력과 결합하여 항일전을 전개했다. 이 군대가 1942년 만들어진 조선의용군의 모태였다.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목표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조선의용군은 1945년 8월 9일 소련의 대일참전에 즈음해 소련군과 함께 입국할 준비를 하였다. 일본이 항복하자 화북과 만주에서 팔로군과 협동관계를 유지하면서 재류동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1945년 10월초 선발대 1,500명이 신의주에 도착했으나 무장해제 되어 만주 안동현으로 후퇴했다. 일부인사가 개인적으로 북조선 신민당에 참여했을 뿐 대부분 입국하지 못하고 중국 동북지방에서 동북민주연군에 흡수되어 그곳에 잔류했다.
목차
접기결성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의 군사조직으로서 1938년 10월 10일 우한[武漢]에서 조직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의 일부 부대는 옌안[延安] 지역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중국공산당의 영향하에 옌안계의 한인 무력과 결합하여 항일전을 전개했는데 이것이 조선의용군의 모태가 되었다. 이들이 중국공산당 팔로군(八路軍)의 도움을 받아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가운데 옌안 지역에서는 한인들의 비중이 커져가자 한인 자체의 혁명조직을 만들 필요성도 증대했다.
이에 따라 1941년 1월경 태행산(太行山)에서 김두봉(金枓捧)·최창익(崔昌益)·한빈(韓斌) 등의 주도하에 화북조선청년연합회가 조직되었는데 같은 해 7월경 이 한인무장부대는 화북조선청년연합회에 가입하고 자신들의 부대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했다. 그리고 1942년 7월 화북조선청년연합회가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개편될 때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했으며 1944년 2월에는 화중지대(華中支隊)를 설치했다.
조직구성과 활동
화북조선독립동맹 중앙상무위원회 군사부에 배속되었으며 사령은 독립동맹의 군사부장인 박효삼이 겸임했고 이익성(李益星)·김창만(金昌滿)·이성호(李成鎬)·손달(孫達)·김윤덕(金潤德) 등이 주요간부였다. 조선독립동맹과 함께 선전활동과 적구공작(敵區工作), 무장투쟁을 통해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목표로 활동했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의 대일참전에 즈음해 일본이 항복하기 전에 소련군과 함께 입국할 준비로 조선의용군이 1당소속의 군대라는 구실을 없애고 보다 많은 대중을 끌어들이기 위해 독립동맹 군사부와 분리하여 조선의용군 사령부를 별도로 설치했다.
이때 총사령에는 무정이, 부사령에는 박효삼과 박일우(朴一禹)가 취임했다. 그러나 일본이 항복한 뒤에도 화북과 만주에서 팔로군과 협동관계를 유지하면서 재류동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새로운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도처에서 한인청년들을 의무적으로 의용군에 편입시키면서 조선을 향해 진군하게 되어 빨리 귀국할 수 없었다.
8·15해방 후의 동향
1945년 10월초 선발대 1,500명이 신의주에 도착했으나 무장해제되어 만주 안동현(安東縣)으로 후퇴했다. 그후 일부인사가 개인적으로 북조선신민당에 참여했을 뿐 대부분 입국하지 못하고 중국 동북지방에서 동북민주연군(東北民主聯軍)에 흡수되어 그곳에 잔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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