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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3·1운동

다른 표기 언어 沙川三一運動 동의어 모락장유혈투쟁, 沙川場市流血鬪爭

요약 1919년 3·1운동 당시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시위운동. 선두에 선 사람들은 상사리와 원장리 두 마을의 기독교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시위운동을 준비하다가 일부가 검거되었음에도 계획대로 시위를 진행했는데, 진행 도중 동료를 구하려 모락장교회으로 행진하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50여 명이 죽거나 부상당하게 되었다. 이에 분노한 군중이 일본 경찰 세 명을 살해하자 일본은 보복성 체포를 자행하여 주민 400여 명이 검거되었다. 모락장에서의 학살은 제암리와 더불어 대표적인 학살사건으로 남아 있다.

이곳에서의 3·1운동은 두 마을의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3월 1일 평양의 3·1운동에 참가했던 상사리 반석교회 장로 조진탁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원장리에 들러 원장교회측의 윤상열(尹相悅)·고지형(高志亨) 등과 두 교회 합동으로 3월 4일 원장리에서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합의했다. 이 소식은 모락장교회 목사 송현근에게도 전달되었다. 이에 모락장교회 신도들은 김해진(金海鎭)의 집에 모여 별도의 시위운동을 준비했는데, 헌병보조원에게 발각되어 김해진 등은 검거되고 송현근은 반석교회로 피신했다.

한편 3월 4일 오전 10시 원장리에서는 계획대로 시위가 벌어졌으며 이때 최능현 등은 모락장의 거사계획이 발각되었음을 알리고 체포된 동지들을 구출하자고 외쳤다. 주민들은 즉시 시위대형을 갖추고 반석면 상사리를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행렬이 모락장에 다다를 무렵 주변에 매복하고 있던 일본 헌병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당했다. 시위군 중 일부가 쓰러지자 흥분한 군중은 돌 등을 던지며 일본 헌병에 격렬히 저항했다. 일본 헌병들이 달아나자 군중은 그들을 뒤쫓아 헌병주재소 소장 사토[佐藤]와 헌병보조원 2명을 살해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시위 군중 13명이 죽고, 4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뒤이어 일본 헌병대는 보복으로 주민 400여 명을 체포하고, 49명을 투옥했다. 이곳의 3·1운동은 수원 제암리와 함께 일본 헌병이 자행한 대표적 학살사건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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