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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

다른 표기 언어 乙支文德
요약 테이블
출생 미상
사망 미상
국적 고구려, 한국
종교 불교

요약 고구려의 장군으로 침략을 시도하던 수나라의 30만 대군을 살수에서 몰살시킨 살수대첩 승리의 주역. 그 외의 개인적 사실은 많이 밝혀진 바 없으며 612년 영양왕의 명령으로 수나라에 맞서 당시 우문술과 우중문의 지휘 하에 있던 30만 별동대에게 거짓으로 항복 의사를 표했다. 이후 적군에게 다시 5언시를 지어 보내 적군을 철수하게 한 뒤, 군사를 출동시켜 살수에 도착한 적군에게 맹렬한 공격을 가해 물리쳤다. 이 전쟁의 여파로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세워졌으므로 중국의 역사를 바꾼 대사건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현재는 서울의 주요 거리인 을지로와 훈장인 을지무공훈장 등으로 이름을 기리고 있다.

을지문덕(乙支文德)

을지문덕 장군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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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고구려의 장군.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위지문덕(尉支文德)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청천강인 살수(薩水)에서 벌어진 살수대첩(薩水大捷)을 승리로 이끈 고구려의 장군으로만 알려질 뿐, 생몰년을 포함하여 개인과 관련된 사실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어떠한 문헌에 근거했는지 알 수 없지만,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 그가 평양 석다산(石多山) 사람이라고 전한다.

출생

을지문덕의 성인 '을지'에 대해서는 고구려 관등 우태(于台)와 같이 연장자나 가부장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하기도 하고, '을'만을 성으로 보기도 한다. 또 선비족 계통의 성인 '위지(尉遲)'와 을지를 같은 것으로 보아 고구려로 귀화한 선비족 계통의 사람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수나라와의 대립

수나라의 문제가 중국을 통일하고 589년 수나라를 건국한 뒤, 수문제(隋文帝)는 북쪽의 고구려와 돌궐에 대한 정벌의 야욕을 품기 시작했다. 수문제는 598년 왕세적(王世積)에게 30만 대군을 주어 고구려의 요동을 공격하도록 했다. 하지만 계절이 여름에 이르면서 전염병과 태풍을 만나 제대로 전투도 못하고 퇴각하게 되었다. 수문제는 이후 고구려 원정의 뜻을 접었으며 고구려의 영양왕도 사신을 보내는 등 양국간에 원만한 관계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수문제가 죽고 패악한 수양제(隋煬帝)가 제위에 오르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수양제는 만리장성을 수리하고, 대운하를 건설하면서 인접 나라 정복의 꿈을 현실화하기 시작했다. 수양제는 아버지 수문제에게 치욕을 안긴 고구려 정벌을 위해, 사전 포석으로 북쪽의 돌궐을 토벌하는 등 세력을 한껏 키웠다. 수양제가 영양왕에게 입조하여 공물을 바치도록 했으나 영양왕이 이를 거부하자, 이를 핑계로 고구려 정벌을 시도했다. 612년(영양왕 23) 수양제는 수륙 113만에 달하는 대군을 직접 인솔하고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요동성(遼東城)에서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한편 수군(水軍)은 대동강을 거슬러오면서 정병(精兵) 4만을 선발하여 거짓 패주하는 고구려군을 쫓아 평양성 안에 들어왔다가 거의 궤멸되었다. 평양성을 직공하기로 결정한 수군(隋軍)은 우문술(宇文述)과 우중문(于仲文)의 지휘하에 30만 별동대를 압록강 서쪽에 집결시켰다.

살수대첩

이때 영양왕은 대신 을지문덕을 보내 적진을 엿볼 겸 거짓으로 항복할 의사를 표했다. 우중문은 앞서 양제에게서 영양왕이나 을지문덕이 오면 사로잡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위무사(慰撫使) 유사룡(劉士龍)이 말려서 돌려보냈다. 우중문이 곧 후회하고 다시 오게 하려 했으나 을지문덕은 즉시 압록강을 건너 돌아왔다. 속은 것을 안 수군은 압록강을 건너 추격했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적군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알아채고 하루에도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도망가는 등 거짓으로 패주하면서 적군을 더욱 피로하게 했다.

겨우 살수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까지 도착한 적군에게 "신비한 계책은 천문을 꿰뚫고 오묘한 계산은 지리를 다했다. 전쟁에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원컨대 족함을 알고 그침이 어떠랴(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라는 5언시를 지어 보냈다. 그리고 다시 사람을 보내어 철군하면 왕을 모시고 조견(朝見:제후가 천자를 찾아가는 것)하겠다고 전했다. 적군은 거짓임을 알면서도 군량이 부족한 데다 군사들이 지쳐 고구려군을 이길 수 없다는 판단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을지문덕은 군사를 출동시켜 사방에서 적군을 추격하면서 살수에 도착한 적군이 강을 건널 때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압록강을 건너 요동까지 살아돌아간 자는 불과 2,700명 정도였다.

영향과 평가

살수대첩에서의 승리는 한반도를 장악하려는 수나라의 야욕을 제압함으로써, 고구려뿐 아니라 신라와 백제 등 한반도에 있는 다른 나라들이 수나라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수나라의 양제는 패전한 우문술과 우중문에게 책임을 지워 죄수 취급을 했다. 수양제는 이후에도 두 차례 더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나 실패했을 뿐 아니라, 고구려 원정에서의 귀환 길에서 양현감, 미밀, 왕세충, 두건덕 등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치세가 혼란스러워졌다. 결국 수양제가 618년 근위병들에게 죽음을 당하면서 수나라는 멸망했고, 이연이 당나라를 세웠으므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은 중국의 역사를 바꾼 대사건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을지문덕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을지문덕에 대하여 수나라를 막아 나라를 구한 것은 오직 을지문덕의 공이라고 상찬했다. 조선의 숙종은 을지문덕의 공을 기려 청천(淸川)이라는 호를 하사하고 사우(祠宇)에 향사(享祠)토록 했으며, 단재 신채호는 민족 자존을 드러낸 한반도에서 유일한 영웅이라고 칭송했다. 서울의 주요 거리인 을지로는 을지문덕을 기려 명명된 것이며, 무공을 세운 군인에게 수여되는 을지무공훈장 역시 을지문덕의 이름을 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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