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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589년 수나라의 중국 통일 후 고구려는 수나라와 대결하게 되었다. 598년 수의 문제가 고구려를 침입하였으나 실패하자 612년 양제가 고구려 원정에 나섰으나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으로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에 우중문·우문술이 30만 명의 군사로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자 을지문덕이 우중문을 희롱한 시를 보내면서 거짓 조회 약속으로 수나라군은 철수하였다. 고구려군은 곧 추격전을 벌였고, 수나라군이 살수를 건널 때 맹공을 가하여 궤멸시켰다.
압록강을 건너 요동에 도착한 수군의 수는 2,700명에 불과했다. 참패를 만회하기 위해 613, 614년 다시 고구려를 침략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거듭된 원정으로 일어난 반란으로 이어짐으로써 멸망하고 말았다
6세기 후반 이후 중국에서 300여 년 간 계속되던 남북조의 분열상을 589년 수나라가 통일하자 동북 아시아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고구려는 국제적인 세력관계의 균형을 모색하기 위해 돌궐·백제·왜와 연결했고, 신라가 수에 접근함으로써 양대 진영을 대표한 수나라와 고구려가 대결하게 되었다. 평원왕(平原王)은 군대정비·군량비축·병기개조에 착수했고, 영양왕 즉위 후 고구려의 전쟁준비는 보다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598년(영양왕 9)에 고구려가 요서지방을 선제공격하자 수나라의 문제(文帝)는 수륙군 30만 명을 동원하여 침략해왔으나 질병과 기근으로 인해 막대한 손실만 입은 채 철수했다.
그후 양제(煬帝)가 즉위하여 고구려 원정준비에 착수했고, 612년에는 113만 명에 달하는 수륙군을 직접 통솔하여 원정에 나섰다. 그러나 바닷길로 평양성 부근에 도착한 수군 4만 명은 고구려군에게 궤멸되었고, 랴오허 강[遼河]을 건너 요동성을 포위한 육군이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으로 교착상태에 빠지자 우중문(于仲文)·우문술(宇文述)이 이끄는 별동대 30만 명이 평양성을 직접 공격했다.
수나라군은 군량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을지문덕의 유도작전에 말려 평양성 30리 밖까지 접근했으나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이때 을지문덕이 우중문을 희롱한 5언시(五言詩)를 보내고 거짓으로 영양왕 조회를 약속하자 수나라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고구려군은 곧 추격전을 벌였고, 수나라군이 살수를 건널 때 맹공을 가하여 거의 궤멸시켰다. 그결과 압록강을 건너 요동에 도착한 수나라군의 수는 2,700명에 불과했다.
수나라는 이런 참패를 만회하기 위해 613, 614년 다시 고구려를 침략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거듭된 원정으로 이반된 민심이 반란으로 이어짐으로써 멸망하고 말았다.→ 고구려의 대중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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