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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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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618(영양왕 29) |
국적 | 고구려, 한국 |
재위 | 590년∼618년 |
요약 고구려의 제 26대 왕이자 평원왕의 맏아들로 이름은 원 또는 대원.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에 맞서 대립하다가 4 차례에 걸친 수나라의 침공을 살수에서 막아내었으며 내치와 국방에 힘썼다.
개요
고구려 제26대 왕(재위 590~618년). 평양왕(平陽王), 대흥왕(大興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원(元), 대원(大元)이다. 아버지는 평원왕(平原王)이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에 맞서 대립하다가 4 차례에 걸친 수나라의 침공을 살수에서 막아내었다. 한편 역사서의 발간에 힘써 <유기(留記)>를 재편한 <신집(新集)> 5권을 발간하게 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수서(隋書)>,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초기 생애
아버지 평원왕의 장남으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풍채가 준수하고 쾌활했으며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일을 자신의 책무로 생각했다고 한다. 565년 평원왕에 의해 태자로 책봉되어, 25년동안 태자로 지내다가 평원왕이 죽은 뒤 즉위했다.
주요 활동과 치적
영양왕은 590년 평원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이래,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것을 책무라고 여기며 내치와 국방에 힘썼다. 영양왕이 즉위할 무렵, 중국은 수나라가 진나라를 함락시키고 중국을 통일한 상황이었다. 영양왕은 즉위 직후부터 북으로는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려는 수나라, 남으로는 호시탐탐 영토를 확대하려는 백제와 신라의 위협에 둘러싸여 있었다. 영양왕은 백제와 신라의 북진을 막아 남쪽을 안정시켜야 수나라에 대한 총력적인 대응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즉위 원년부터 신라에 대한 견제에 나섰다. 평강공주(平岡公主)의 남편인 온달(溫達)이 신라의 아단성(阿旦城)을 공격하다가 전사한 것도 이때이다.
한편 영양왕은 수나라에 대해서는 화전 양면 정책을 구사했다. 영양왕이 598년 말갈 군사 1만을 이끌고 요서지방을 공격하자, 이에 격노한 수 문제(隋 文帝)가 30만 대군을 내어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장마·기근·질병으로 실패하고 돌아갔다. 영양왕은 패전한 수나라에 화친을 제의했고, 수 문제가 화친을 받아들여 수 문제의 재위동안에는 두 나라 사이에 평화가 유지되었다.
수나라의 1차 침공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영양왕은 600년에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을 시켜 고구려의 옛 역사서인 〈유기〉 100권을 정리하여 〈신집〉 5권을 만들게 했다. 백제·신라에서 새로운 역사서가 편찬된 시기가 대개 국력이 한창 신장될 때였던 것과 같이, 영양왕 때의 고구려도 평원왕 이후 안정된 왕권과 국가체제를 유지했다.
수 문제에 이어 황제가 된 수 양제(隋 煬帝)는 문제와 달리 야심이 커서 만리장성(萬里長城)을 개축하고, 대운하공사를 벌였으며, 동북으로 영토를 확장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수 양제는 고구려를 복속하려는 야심으로 조공을 요구했으나 영양왕은 응하지 않았고, 수 양제는 612년 113만 대군을 이끌고 수륙 양면으로 침공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서전을 유리하게 이끌었으며, 마침내 을지문덕의 활약으로 적군을 살수(薩水)에서 대파했다(살수대첩).
수 양제는 613년에 35만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재차 침공했으나 고구려가 잘 막아내는 가운데 수나라군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퇴각했다. 수 양제는 이듬해인 614년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시 군사를 모아 고구려 정벌에 올랐으나, 영양왕이 화친을 제의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수나라는 여러 차례에 걸친 고구려 침공의 실패와 거듭된 토목공사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면서 반란이 빈발했고, 마침내 618년 반란군에게 수 양제가 살해당하면서 멸망했다.
영양왕은 성공적으로 4차례에 걸친 수나라의 침공을 막아내면서, 남쪽으로는 백제와 신라에 대한 견제를 멈추지 않았다. 598년 수 문제의 침공을 물리친 후 백제가 수나라와 연통하여 수나라에게 고구려 공격을 요청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영양왕은 즉시 백제를 공격하여 기세를 제압했다. 이후 603년에는 신라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공격했고, 607년에는 백제의 송산성(松山城)과 석두성(石頭城)을 공격하는 등 압박을 계속한 끝에 608년에 이르러 아리수(지금의 한강) 북쪽의 영토를 회복했다.
신라, 백제와 적대적 관계를 계속한 것과는 달리 영양왕은 일본과는 활발한 교류를 가졌다. 595년에는 혜자(惠慈)가 일본으로 건너가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되었고, 610년에는 담징(曇徵)·법정(法定) 등의 승려가 일본으로 건너가 오경(五經)과 채화(彩畵) 등을 가르쳤다. 담징은 일본 호류지(法隆寺)에 금당벽화를 그리기도 했다. 영양왕은618년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唐)나라가 중국에 세워지는 것을 보면서 오랜 전쟁으로 약해진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에 죽었다. 후손이 없었던 영양양의 뒤를 이복 동생인 영류왕(榮留王)이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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