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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식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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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모든 존재는 오직 식(識), 즉 마음에 불과하다고 보는 불교용어.

일찍이 원측(圓測:613~696)을 비롯한 신라인들은 유식학을 종지로 삼는 법상종의 성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삼국의 통일 이전에 유식학자들은 주로 중국에서 더 많은 활동을 펼쳤고, 통일 이후에는 신라에서도 유식학의 연구가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유식학자로는 원측·도증(道證)·승장(勝莊)·신방(神昉)·경흥(憬興)·대현(大賢)·도륜(道倫)·영인(靈因)·행달(行達)·순경(順璟)·현일(玄一)·오진(悟眞) 등을 들 수 있다.

원측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현장이 인도에서 전래한 호법 계통의 유상유식을 연구했으며, 안혜 계통의 무상유식설을 비롯한 불교학 전반을 두루 섭렵했고, 현장과 규기가 법상종을 일으킬 무렵에는 이미 독자적인 불교관이 확립되어 있었다.

당시 법상종은 규기의 자은학파(慈恩學派)와 원측의 서명학파(西明學派)로 양분되어 유식학에 관한 논쟁이 치열했다. 두 학파는 교상판석(敎相判釋)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규기는 호법의 3시교판(三時敎判)을 그대로 따랐는데,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함경 阿含經〉·〈반야경 般若經〉·〈해심밀경 解深密經〉으로 대표되는 세시기로 나누고, 이중 〈해심밀경〉은 가장 심오한 단계의 가르침으로 설정하는 교상판석을 말한다.

이에 대해 원측은 보다 회통적(會通的)인 관점에서 〈반야경〉의 가르침도 궁극적으로는 〈해심밀경〉의 삼무성설(三無性說) 등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또한 유식학의 핵심인 심분설(心分說)에 있어서도 원측은 규기와 견해를 달리했다. 규기는 호법의 사분설(四分說)을 전적으로 따른 반면, 원측은 안혜의 일분설(一分說), 진나의 삼분설(三分說) 등도 궁극적으로는 호법의 사분설과 위배되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회통적 입장을 견지했다.

규기의 자은학파는 불성론(佛性論)에 있어서도 모든 중생은 전생의 업에 따라 선천적으로 규정된 근기(根機)를 지니고 있다고 보고, 중생을 정성보살(定性菩薩)·정성연각(定性緣覺)·정성성문(定性聲聞)·부정종성(不定種性)·무종성(無種性) 등의 5가지 범주로 나누었다. 이 가운데 무종성·정성연각·정성성문은 영원히 성불(成佛)할 수 없다고 하는 오성각별설(五性各別說)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원측은, 〈해심밀경〉·〈능가경 楞伽經〉 등의 오성각별에 관한 교설이 하나의 방편으로 설해진 것이며, 이들이 결정적으로 영원히 성불할 수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라고 함으로써 유식사상을 〈화엄경 華嚴經〉·〈법화경 法華經〉 등의 일승사상(一乘思想)과 조화시켰다.

이와 같은 원측의 유식학은 모든 이론들을 타파하면서 동시에 살려내는 당시 신라 불교의 화쟁적(和諍的) 학풍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도증은 원측의 제자로서 〈성유식론요집 成唯識論要集〉·〈성유식론강요 成唯識論綱要〉·〈섭대승론세친석론소 攝大乘論世親釋論疏〉·〈변중변론소 辯中邊論疏〉·〈대인명론소 大因明論疏〉 등 13종의 저서목록이 전한다.

그의 저술은 모두 산실되어 현존하지 않으나, 규기의 제자인 혜소가 지은 〈성유식론요의등 成唯識論了義燈〉과 일본의 유식학자인 선주(善珠)의 〈유식요의등증명기 唯識了義燈增明記〉 등의 문헌들에 인용되어 있어 그의 유식사상을 엿볼 수 있다. 승장은 처음에는 현장의 문하에 입문했다가 후에 원측의 제자가 되었다고 하는데, 〈성유식론결 成唯識論決〉·〈대인명론술기 大因明論述記〉 등 7종의 저서목록이 전하며, 이중 현존하는 것은 〈범망경보살계본술기 梵網經菩薩戒本述記〉 4권뿐이다.

신방은 현장의 수제자 4명 중 한 사람으로 대승방(大乘昉)으로도 불린다. 저서에는 〈성유식론요집 成唯識論要集〉·〈현유식론집기 顯唯識論集記〉·〈십륜경소 十輪經疏〉 등이 있었으나 현존하지 않고, 그가 현장과 함께 번역한 〈대승대집지장십륜경 大乘大集地藏十輪經〉의 서문만이 전한다. 순경은 인명학(因明學)의 대가로 중국에 널리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그는 중국에 가지 못했으나 신라에서 현장의 유식비량(唯識比量)을 보고는 상위결정(相違決定)의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고 이에 능위(能違)의 비량(比量)을 만들어서, 이를 당으로 가는 사신편에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 이미 현장이 입적(入寂)한 지 2년 뒤의 일이였으므로 규기가 대신 받아보고는 매우 감탄했다고 전한다. 그는 신라에서 많은 저술활동을 했다고 하나, 〈성유식론요간 成唯識論料簡〉·〈인명입정리론초 因明入正理論抄〉 등의 저술목록만 전하고 있다.

경흥은 신문왕대에 국사(國師)를 지냈다고 하며, 대현과 함께 신라 유식가(唯識家)의 초조(初祖)로 일컬어졌다.

그는 원효 다음으로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40부 250여 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무량수경연의술문찬 無量壽經連義述文贊〉·〈삼미륵경소 三彌勒經疏〉·〈금광명최승왕경약찬 金光明最勝王經略贊〉 등이다. 그의 저술목록을 보면, 〈성유식론폄량 成唯識論貶量〉·〈유가론석론기 瑜伽論釋論記〉·〈인명론의초 因明論義鈔〉 등 많은 유식학 관계 저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현은 경덕왕대의 사람으로 〈삼국유사 三國遺事〉에서는 그를 유가조(瑜伽祖) 대덕(大德)이라고 했으며, 유식학과 인명학에 통달하여 국내외 학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따랐다고 전한다.

그는 도증에게 유식학을 배웠다고 전하며, 52부 120여 권에 달하는 많은 저술을 남겨 원효·경흥과 함께 신라의 3대 저술가로 꼽힌다. 그의 저서 역시 대부분 산실되고 현존하는 것은 〈성유식론고적기 成唯識論古迹記〉·〈범망경고적기 梵網經古迹記〉·〈기신론내의약탐기 起信論內義略探記〉·〈약사본원경고적기 藥師本願經古迹記〉 등이다.

〈성유식론고적기〉는 현장이 번역한 〈성유식론〉에 대한 주석서로 대승·소승의 경전들을 비롯하여 유명한 유식학자들의 이견(異見)을 인용하고 그 차이를 논한 것이 특징적이다. 대현은 중국의 혜소·지주 등이 원측의 학설을 무조건 배척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원측과 도증, 현장과 규기 등의 이론들을 서로 비교·검토하면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비판적 관점에서 그의 유식사상을 펴나갔다.

도륜은 그의 〈유가론기 瑜伽論記〉에 '해동흥륜사사문도륜집찬'(海東興輪寺沙門道倫集撰)이라고 기록된 것을 통해서 신라의 승려임을 알 수 있을 뿐 그밖의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24권으로 구성된 〈유가론기〉는 미륵의 〈유가사지론 瑜伽師地論〉 100권에 대한 방대한 연구서로서 드물게 남아 있는 신라 유식학 관계문헌이다. 특히 여기에는 원측·원효·도증·혜경(慧景)·행달·영인·현범(玄範)·신방·현일 등 저술들이 별로 남아 있지 않은 신라 유식학자들의 학설을 많이 소개하고 있어 주목된다. 한국의 유식사상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고려시대 이후에는 선종(禪宗)이나 화엄종(華嚴宗)에 비해 교리적인 연구는 활발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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