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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이 된 웰링턴 공작은 상원에서 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려는 그레이의 노력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과격한 폭도들은 웰링턴의 창문을 2번이나 박살냈다. 그러자 웰링턴은 창문에 쇠로 만든 덧문을 씌웠는데, 이때문에 '철공작'이라는 그의 별명은 더욱 그럴 듯해 보였다.
이 강력한 투쟁은 1832년 5월의 위기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 위기는 프랑스의 7월 혁명처럼 끝날 우려가 있었다. 왕은 적대적인 상원을 압도하기 위한 새로운 귀족 직위를 만들기를 거부했고, 그레이는 사임했다. 그러나 웰링턴은 그레이 내각을 대신할 새 내각을 구성하지 못했다. 혼미의 교착 상태에 부딪힌 웰링턴은 여전히 선거법 개정에 반대했지만, 나라를 위해 한 걸음 물러서서 6월에 선거법 개정안이 법률로 제정될 때까지 의회에 출석하지 말자고 지지자들을 설득했다. 그런데도 성난 군중은 위털루 전승 기념일에 웰링턴을 습격했다. "묘한 날을 골랐군." 이것이 그의 유일한 논평이었다.
투표에 불참한 웰링턴 공작의 자제는 상원을 구했고, 그는 토리당 상원의원들을 이끄는 동안 상원이 하원과 치명적으로 충돌하지 않도록 했다. 그는 가능할 때마다 왕의 정부를 지지했다. 윌리엄 4세는 1834년 웰링턴 공작을 불러 내각을 구성하라고 명령했지만, 65세의 공작은 로버트 필이 총리가 되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정치가한테서는 지극히 보기 드문 이 자기 희생은 당연히 인정받았다. 그는 필 내각에서 외무장관(1834~35)과 무임소장관(1841~46)으로 일했다. 또한 옥스퍼드대학교 명예 총장, 런던 탑 감찰총감, 햄프셔 주지사로도 일했고, 수로안내협회 간부를 거쳐 수로안내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빅토리아 여왕의 아버지 역할까지 맡았다. 그가 생애의 마지막 10년 동안 총사령관 자리를 지킨 것은 잘못이었다. 그는 나중에 절실히 필요해진 개혁을 주도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1848년에 임박한 차티스트 운동의 봉기를 침착하게 처리해 폭력사태를 막아냄으로써, 노련한 천재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가 곡물법을 둘러싸고 또다시 상원의원들에게 '전향'을 명령한 덕분에, 로버트 필은 곡물법을 폐지할 수 있었다. 웰링턴은 1846년 공직에서 은퇴했지만, 그후에도 모든 정당이 그에게 자문을 구했다. 하이드파크 모퉁이에 있는 그의 런던 저택 앱슬리 하우스는 런던 1번지로 알려졌다. 웰링턴 공작은 오항(五港)의 총독으로 있던 중, 그가 좋아하는 거처인 월머 성에서 1852년 9월 14일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엄한 국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은 대영제국에서 마지막으로 벌어진 웅장한 의식이었다. 그는 세인트폴 대성당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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