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웰링턴의 초기생애

다른 표기 언어

아서 웨즐리 웰링턴(1798년부터는 웰즐리)은 1769년 5월 1일 더블린에서 모닝턴 백작 1세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지나치게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이튼 학교에 다니다가 프랑스 육군사관학교에 보내졌고, 미망인이 된 어머니의 말처럼 "총알받이에 불과한 신세"가 되었다. 18세 때 육군 장교로 임관해 아일랜드 총독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1790~97년에는 가족 영지가 있는 트림의 대표로 아일랜드 의회에 진출했다. 24세 때 빚더미에 올라앉은 신세로, 캐서린(키티) 패커넘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했다. 웰링턴은 도박을 그만두고 자신의 직업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제33보병대의 중령 계급을 돈으로 산 그는 플랑드르에서 적극적으로 복무하면서(1794~95) 상관들의 실수에서 교훈을 얻었다. 공직을 얻는 데 실패하자 1796년 자진해서 인도에 배치되었다.

인도에서 그는 절제하며 명랑하게 사는 방식을 택했다. 큰형 리처드가 인도 총독으로 부임하자, 그는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사단 하나를 맡아 마이소르의 티푸 술탄과 싸워 이긴 뒤 마이소르 총독이 되었고(1799), 총사령관으로서 마라타족과 싸웠다. 그가 거둔 승리, 특히 아사예에서 거둔 승리(1803)는 평화를 가져왔고, 그는 직접 협상을 이끌었다.

나중에 유럽의 전쟁터에서 보여준 성공적인 자질들, 결단력, 상식, 세부적인 면에 대한 주의력, 부하 장병들과 보급품에 대한 관심, 민간인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는 모두 인도에서 개발된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나중에 편지에서 그를 '인도 민병 부대 장군'쯤으로 여겼는데, 이는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웰링턴에게 새로 맡겨진 임무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하노버 원정 계획이 무산된 뒤, 그는 헤이스팅스에서 여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의무가 요구하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복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가지 의무는 아름다움이 시들어버린 키티와 결혼하는(1806) 것이었고, 또 하나는 형의 인도 근무 기록에 대한 과격한 비난을 물리치기 위해 의회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는 토리당 서기장이 되어 2년 동안 아일랜드에서 지냈다.

1807년 잠시 코펜하겐에 원정한 것은 휴식이 되었고 이 원정에서 덴마크의 소규모 부대를 무찔렀다. 1808년 포르투갈인들이 나폴레옹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자 웰링턴은 그들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세계사

세계사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Daum백과] 웰링턴의 초기생애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