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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링턴의 총리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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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링턴 공작의 목표는 토리당을 재통합해 강력하고 균형잡힌 정부를 이룩하는 것이었다.

총사령관 자리를 다시 마지못해 사임한 그는 윌리엄 허스키슨이 이끄는 캐닝파를 받아들이는 한편 급진파 토리 당원은 자신의 온건 정책과 조화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제했다. 이리하여 우익이 소외되자 좌익이 분열하기 시작했다. 광범위한 개혁을 요구하는 야당은 허스키슨파의 공감을 얻었다. 현명한 웰링턴 공작은 처음 부닥친 교회 문제에서 뒤로 물러나 비국교도를 처벌하는 심사율 및 지방자치 단체법을 개정했고, 곡물법(값싼 외국산 농산물 수입을 금지하는 법률) 문제에서도 다시 뒤로 물러나 그와 농민측이 원하는 것보다 더 자유주의적인 개혁안을 도입했다.

그러나 웰링턴은 그 직후에 야기된 의회개혁 문제에서는 허스키슨파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5월에 허스키슨파는 모두 사임했다. 그 직후 아일랜드 클레어에서 치러진 보궐선거에서는 더 큰 위기가 일어났다. 허스키슨의 후임으로 장관이 된 윌리엄 비지 피츠제럴드가 의석을 지키기 위해 이 지역에 출마했다가 아일랜드 가톨릭 지도자인 다니엘 오코늘에게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인기있는 친가톨릭파인 비지 피츠제럴드의 패배는 웰링턴 공작을 놀라게 하는 동시에 커다란 교훈을 주었다. 가톨릭교도에게도 신교도와 동일한 정치적 권리를 인정하는 가톨릭교도 해방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어떤 토리 당원도 아일랜드 남부에서는 승리할 수 없으리라는 교훈이었다. 자칫하면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심사령). 그래서 웰링턴은 1828년 8월 생애에서 가장 힘겨운 정치적 의무에 착수했다.

조지 4세와 하원의 지도자가 된 로버트 필, 그리고 토리당의 다수파를 설득해 그들이 그때까지 입에 담기조차 싫어한 가톨릭교도 해방을 찬성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6개월 동안 막후에서 끈질긴 설득 작업을 벌인 끝에 웰링턴은 마침내 왕의 동의를 얻었다. 필의 입장은 여전히 불확실했다. 공공연한 신교도인 그는 하원 지도자가 아닌 평의원의 입장으로만 가톨릭교도 해방을 지지하겠다는 생각을 고집했다. 그러나 웰링턴의 끈기와 필의 관대함이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고, 필은 하원을 계속 이끌기로 동의했다. 수많은 급진파 토리 당원들은 웰링턴의 '전향' 명령에 끝까지 저항했지만, 토리당의 대다수는 복종했다.

그리하여 토리당은 분열했으나 1829년 4월에 가톨릭교도 해방이 법률로 채택되었다. 이것은 웰링턴 공작이 거둔 최대의 정치적 승리였다. 공작이 자신을 모욕한 급진파 토리 당원인 윈칠시 백작과 결투를 벌인 것은 이 승리에 멜로드라마 같은 요소를 덧붙여주었다. 웰링턴은 이따금 일관성이 없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일관성이 없었던 게 아니라 대중에게 좀더 일찍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았다는 점에서 단순한 비밀주의자일 뿐이었던 것 같다.

그는 1825년에 어떤 형태의 가톨릭교도 해방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런 속마음을 효과적으로 감추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웰링턴의 업적은 더 많은 변화에 대한 욕구를 자극했고, 1829~30년에 일어난 전국적인 경제 위기는 이 요구를 더욱 강화했다. 휘그당 지도자인 그레이 백작 2세 찰스 그레이는 이 요구의 물줄기를 새로운 선거법 개정안으로 끌어들였다.

귀족과 젠트리 계급이 소유하고 있는 독점 선거 대신, 버밍엄 같은 신흥산업 도시에서 의회 대표자를 낼 수 있게 하자는 것이 그의 선거법 개정안의 골자였다. 조지 4세가 죽은 뒤 1830년에 윌리엄 4세가 즉위해 총선거가 실시되자, 가난과 실업에 대한 웰링턴의 숙명론적 태도에 불만을 품고 있던 국민들은 그 불만을 표출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해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부르주아 혁명(7월 혁명)은 영국의 개혁론자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웰링턴 내각은 살아 남았지만 크게 약해졌고, 허스키슨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화해 계획은 시도해 보기도 전에 좌절되었다.

웰링턴은 선거법 개정을 만병 통치약이 아니라 헌법의 자살 행위로 간주했다. 의회가 열리기 2주 전에 그는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선거법 개정을 파멸적인 것으로 비난하고, 선거법 개정에 반대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밝혔다. 그는 11월 2일에 어떤 개혁에도 반대한다는 단호한 선언으로 의회를 놀라게 했다. 개혁론자들과 복수심에 불타는 급진파 토리 당원들은 합세해 11월 15일 그를 무너뜨렸다. 로버트 필은 이튿날 그를 사임했다. 그레이 백작이 웰링턴의 뒤를 이어 영국의 총리가 되었다.

웰링턴은 군인으로서는 '언덕 저편에' 있는 것을 알아맞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정치적 상상력은 부족했기 때문에, 개혁이라는 언덕 저편에는 혁명('법률이라는 정당한 절차에 따른 혁명')이 있다고 잘못 생각했다. 이런 착각 때문에 그는 반동주의자라는 당연한 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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