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월폴은 로버트 월폴 대령과 메리 버웰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노퍽의 그레이트 더넘과 이튼 학교(1690~96) 및 케임브리지대학교의 킹스 칼리지(1696~98)에서 공부했다.
하나 남은 형 에드워드가 죽자 학업을 중단하고 남은 아들에게 주어진 길인 성직자가 되는 대신에 부친의 영지관리를 돕기 위해 노퍽으로 돌아왔다. 1700년 7월 30일 켄트 지방 바이브룩가(家)의 캐서린 쇼터와 결혼했다. 같은 해 아버지의 사망으로 광활한 영지를 물려받고 곧 의원으로 선출되어 라이징 성의 가문 의석을 계승했다. 1702년에는 킹스린으로 이주해 한 차례의 공백기를 제외하고는 40년 동안이나 킹스린 대표의원으로 활동했다.
월폴은 하원에서 명료하고 힘있는 연설가로, 확고하지만 열광적이지 않은 휘그 당원으로, 적극적인 의원으로 명성을 떨쳤다.
1705년 그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1~14) 동안 해군업무를 관장했던 왕세자 조지가 이끄는 덴마크 평의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는 탁월한 행정능력을 발휘해 말버러 공작과 고돌핀 경의 관심을 끌어 1708년 2월 25일 육군장관으로 승진했고, 1710년에는 해군의 재무총감이 되었으나, 1710년 총선거 후 토리당이 집권함에 따라 1711년 1월 2일 해임되었다. 당시 월폴은 휘그당을 이끄는 젊은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정치적·사회적으로 입지를 다졌다.
그는 휘그 성향의 문인들로 이루어진 킷캣 클럽을 이끄는 핵심인물이 되었다. 친구가 많았지만 지출이 너무 많아 곧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 그는 파산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자신의 직책을 이용했으며, 봉급과 부수입의 한도에 맞게 지출을 유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월폴이 의회에 열성적으로 참석하며 논쟁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 사실상 야당의 지도자로 부각하게 되자 토리당에서는 그를 말버러와 함께 파멸시키려는 결의를 다졌다.
1712년 1월 월폴은 육군장관으로 재직할 당시의 부정행위로 탄핵받았으며 유죄로 판명되어 의원직을 박탈당하고 런던 탑에 수감되었다. 휘그당에서는 즉각 그를 투사로 추앙했고, 월폴은 토리당의 지도자인 옥스퍼드 백작 로버트 할리와 자신을 몰락시킨 볼링브룩 자작 헨리 세인트 존에 대한 증오심을 키워나갔다.
1714년 조지 1세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군수총감이 되었을 뿐 아니라 비밀위원회 의장이 되어 볼링브룩과 옥스퍼드를 반역혐의로 탄핵함으로써 복수했다. 그는 놀라운 근면함과 하원에 대한 통제력을 인정받아 급속히 승진해, 1715년 10월 11일 재무위원회 위원장과 재무장관이 되었다. 능력을 인정받을수록 주위의 질시를 받게 되었고, 이같은 상황은 그와 그의 처남인 타운센드 자작 찰스가 왕의 두 측근인 선덜런드 백작 제임스 스태너프 및 찰스 스펜서와 외교정책을 놓고 충돌함으로써 더욱 악화되었다.
월폴과 타운센드는 아첨하는 무리들 때문에 영국의 이익이 하노버 왕가의 이익에 희생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1717년에는 왕가의 분열로 월폴과 타운센드가 내각에서 물러났다. 왕과 왕세자 간의 격렬한 싸움이 벌어진 직후 왕가는 분열되었고 반대파들은 왕세자의 거처인 레스터 하우스에 자신들의 거점을 마련했다. 그후 3년 동안 월폴은 정부와 모든 문제를 놓고 마찰을 빚었으며, 1719년 귀족작위 수여에 따른 국왕 대권을 제한하려 했던 귀족법안을 부결시키는 데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이 기간중에 그는 왕세자비인 안스바흐의 캐롤라인과 친분을 맺게 되었는데, 그녀는 남편이 1727년 조지 2세로 왕위에 오른 뒤에 월폴의 정치적인 입지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월폴은 왕세자(나중에 조지 2세)에 대한 영향력을 이용해 1720년 4월 국왕과 화해했으며 군수총감에 복귀했다.
월폴이 복직하자 곧 나라 안은 스페인령 아메리카와의 통상 독점권을 가지고 있는 합작회사인 남해회사와 관련된 투기열풍에 휩싸이게 되었다.
1720년에 정한 계획안에는 남해회사가 상당부분의 국채를 책임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월폴은 영국은행으로 하여금 부채를 인수하도록 하는 것에 찬성했지만 그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신중하지 못하게 남해 주식에 많은 투자를 했다. 그러나 그와 통하는 은행업자 로버트 제이컴의 예측 덕분에 큰 손해를 보지는 않았다. 월폴은 1720년에 정해진 계획안의 추진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국왕의 독일계 총신들뿐 아니라 다른 많은 관료들에게 씌워진 부패 오명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는 탁월한 정치술과 의회 내 논쟁에서의 설득력을 발휘해 휘그당 지도자들과 왕실이, 그들의 어리석은 판단에서 비롯한 결과로 피해를 입지 않게 했다. 재무상서인 존 애슬러비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은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희생되어야 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과로로 인해 사망하기도 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사람들로는 스태너프와 제임스 크래그스, 그리고 그의 아들 제임스가 있다.
그는 신임을 회복하고 휘그 당원들이 관직을 유지하게 했으며 왕실에서의 자신과 타운센드의 입지를 크게 향상시켰다. 그는 재무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으며, 1721년 4월에는 총리직에 올라 1742년까지 재직했다. 타운센드는 다시 국무장관이 되어 외교업무를 관장했다. 한동안 월폴과 타운센드는 존 카터릿(나중에 그랜빌 백작)과 세력을 공유해야 했다.
카터릿은 1722년 4월 선덜런드의 갑작스런 사망 이후 선덜런드의 세력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1724년경 월폴과 타운센드는 카터릿이 국무장관직에서 해임되게 만들었고 그를 아일랜드 총독으로 보냈다. 조지 1세의 나머지 통치기간중에 월폴과 타운센드는 내각의 수반으로 남아 있었으며 그들의 지위는 꾸준히 강화되었다. 스튜어트 왕가의 복귀를 지지하는 재커바이트의 희망은 남해회사포말사건으로 서서히 커졌지만 로체스터 주교인 프랜시스 어터버리가 기도하고 있던 반란이 탄로나면서 1723년에 좌절되었다.
1725년 볼링브룩이 사면되었음에도 토리당의 전망 또한 어두웠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정치가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