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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폴은 1734년의 총선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선거는 과열경쟁과 소비세에 대한 비판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점차적인 지지도 상실은 대규모 항구와 인구밀집지역에서 많은 의석을 잃음으로써 확연해졌다. 그러나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의 지지자는 여전히 다수였다.
그는 에든버러 감옥에서 군중시위대에 총기를 발사한 호위대 대장을 왕실이 사면한 데 불만을 품고 일어난 에든버러 지방의 폭동을 큰 무리없이 해결했다. 또 그리 어렵지 않게 의원들을 설득해 국채의 이자를 삭감하자는 존 바너드 경의 주장을 거부하게 했으며, 런던 극장에 제재를 가함으로써 야당 성향의 문학인들(스위프트·포프·필딩 등)을 탄압했다. 그러나 1737년부터 그의 입지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캐롤라인 왕비가 세상을 떠날 무렵만 해도 조지 2세는 월폴을 크게 신뢰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왕비가 죽었다고 해서 그의 지위가 위태롭게 되지는 않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월폴이 점차 나이가 들어간다는 사실이었고 이런 상황에 힘입어 윌리엄 피트(나중에 채텀 백작)와 같은 젊은 정치가들이 어디에선가 진출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국왕 조지 2세와 심한 불화를 빚었던 왕세자 웨일스 공 프레더릭 루이스는 반대파의 우두머리로 떠오르면서 젊은 휘그당원들을 지칭하는 이른바 '애국 청년'에게 활동 축을 마련해주었고 장소도 제공했다. 서인도의 무역문제로 스페인과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자 반대파들은 이를 이용해 월폴을 궁지에 몰아넣기로 했다.
그는 협상을 통해 이 난국을 해결하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1739년 어쩔 수 없이 스페인과의 전쟁(일명 '젱킨스의 귀전쟁')을 선포하게 되었다(→ 젱킨스의 귀전쟁). 그는 전쟁에 찬동하지 않고 각료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밝혔다. 이당시 월폴은 공적인 불안과 아울러 개인적인 슬픔에 젖어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내가 1737년 세상을 떠난 뒤 1738년 3월 3일 오랫동안 자신의 정부였던 마리아 스커리트와 재혼했으나 매력과 재치가 출중했던 그녀가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아이를 낳다가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과의 전쟁은 지지부진했고 반대파들은 월폴에 대한 성토를 그치지 않았다. 그는 1741년 총선에서 승리했지만 다수 휘그당 정치인들과 무소속 정치인들은 그가 전쟁을 강력하게 수행할 만한 능력이 없다고 믿었으며 다시 7년간 의회를 이끌 능력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1742년 2월 2일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국왕은 그에게 옥스퍼드 백작작위를 내리고(1725년 기사작위를 받았음) 그를 위해 연간 4,000파운드의 연금을 책정했다. 그러나 하원에서는 그를 탄핵하려는 목적으로 위원회를 구성해 그의 내각을 조사했다. 그러나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으며 월폴에 대한 원한의 목소리도 차츰 줄어들었다.
남은 생애 동안 그는 계속 정치권에서 적극적이고 값진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자신의 퇴임시에 국무장관이 된 카터릿의 사임을 위해 전력을 다했으며 그의 부하이자 휘그당 내 월폴 지지세력의 주도자였던 헨리 펠럼을 총리직에 올려놓았다. 국왕 조지 2세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죽을 때까지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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