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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운동경기 및 유람용으로, 돛 또는 기관을 사용해 움직이는 비교적 가볍고 작은 배.
목차
접기매우 큰 유람용 선박을 말하기도 하는데, 처음에는 돛을 사용했으나 차츰 증기나 내연기관을 사용하게 되었다(→ 범선). 전문적으로 구분해본다면 패들·노·선외발동기를 사용하는 배는 제외된다. 초대형을 제외하고 기관을 사용하는 대형 유람선은 대개 캐빈 크루저라고 부른다. 현재 요트를 의미하는 영어 및 유럽 여러 나라의 말은 '추적용 배'라는 뜻을 가진 16, 17세기의 네덜란드어 'jaght schip'에서 일부(jacht)만 따온 말이다.
요트 타기와 요트 클럽
17세기에는 네덜란드가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일찍부터 운하나 로컨트리(지금의 베넬룩스 3국을 말함)의 모든 바다에서 요트가 각광을 받았다. 처음에는 귀족이, 뒤에는 시민들이 유람선으로 많이 이용했으며, 경주는 개인 시합으로 우연히 시작되었다(→ 요트 조정). 영국의 요트 타기는 영국 왕 찰스 2세가 로컨트리에서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에 시작되었다.
1660년 그가 영국의 왕으로 돌아오자 암스테르담 시에서는 길이 20m, 폭 5.6m의 메리호(號)를 그에게 선물했다. 그와 요크 공작인 동생 제임스(제임스 2세:1685~88 재위)는 또다른 요트들을 만들었다. 1662년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요트를 가지고 템스 강에서 100파운드를 걸고 그리니치와 그레이브젠드 사이를 왕복하는 시합을 했는데, 이를 계기로 귀족 및 상류층 사이에서 요트 타기가 유행하게 되었으나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영국 제도 최초의 요트 클럽인 워터 클럽은 1720년 아일랜드의 코크에서 순찰 및 민간 연안 경비 단체로서 생겼다. 이 클럽의 배들은 완전무장을 했으며 일정한 격식에 따라 운영되었는데, 한 함대를 적으로 가정하고 추격을 하는 놀이가 가장 경주에 가까웠다. 1765년까지는 사회단체로서 지속되었고, 1828년 다른 단체를 합쳐 코크 요트 클럽(뒤에 왕립 코크 요트 협회)이 되었다. 요트 경기가 어느 정도 조직적인 형태를 갖추어서 실시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중엽 템스 강에서였다.
1775년 컴벌랜드 공작이 템스 강에서의 경기를 위해 컴벌랜드 함대를 만들었고, 1820년 조지 4세가 왕이 되자 함대의 이름을 '황제 대관식을 위한 함대'(His Majesty's Coronation Sailing Society)로 바꾸었다. 1830년 요트 경기를 둘러싼 분쟁이 일어나자 템스 요트 클럽은 왕립 템스 요트 클럽이 되었다. 1815년 아일오브와이트의 카우스에서 최초의 영국 요트 클럽이 생겼고, 왕족의 도움으로 영국 본토와 아일오브와이트 사이의 솔런트 해협을 요트장으로 정했다. 카우스의 클럽은 조지 4세가 왕이 된 뒤 왕립 요트 클럽이 되었으며, 모든 회원은 적어도 2만 321kg이 나가는 배를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큰 상금이 걸린 경기가 열리고 사회 생활이 부유해짐에 따라 클럽에 소속된 배들의 크기도 35만 5,617kg 이상이 되었다.
북아메리카의 요트 타기는 17세기 뉴욕에서 네덜란드 사람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영국의 지배 아래에서도 계속되었다. 요트 타기는 거의 놀이를 위한 것이었고, 1815년 조지 크로윈실드의 유람선 클레오파트라즈바지호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 이 배는 지중해에서 운항되었고, 19세기말부터는 다른 배들에게 사치와 고상함의 상징이 되었다.
19세기초 뉴저지 호보컨의 존 C. 스티븐스와 제임스 스티븐스 형제는 훌륭한 요트들을 만들었는데, 그중 하나인 외양선 짐크랙호를 진수한 해에 뉴욕 요트 클럽(NYYC)을 만들었다. 이 클럽은 현재 남아 있는 최초의 미국 요트 클럽이다.
종류
돛을 사용하는 요트
초기의 요트들은 17~19세기말에 만들어진 브리건틴(쌍돛대의 범선) 같은 배의 선체를 따라서 제작되었다.
존 C. 스티븐스가 이끄는 단체를 위해 조지 스티어스가 설계한 아메리카호는 대형 요트 설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배는 1851년 카우스에서 열린 경기에서 우승을 했으며, 배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 컵 경기가 생겼다. 초기에는 하나의 모형을 본떠서 만들었으며, 19세기말 조선공학(造船工學)이 등장한 뒤에야 조선에서 디자인의 개념이 도입되었다.
1920년대 들어서는 돛 및 밧줄에 공기역학(空氣力學)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요트가 개인 주문에 의해 제작되었기 때문에 크기 및 성능이 달라 공평한 경기를 할 수 없었다. 이때문에 단일형급(one-design class) 배가 나오기 전까지는 우열평균조건(handicap)이 필요했다. 이런 점을 감안해 등급규칙이 마련되었고, 이것이 1906년 국제 규칙(International Rule)으로 채택되었다.
이 규칙은 1919년에 수정되었다. 오늘날 가장 빠르게 성장한 부분은 단일형급인데, 이 배들은 길이, 폭, 돛의 면적과 그밖의 요소가 똑같다. 이런 배의 경기에는 우열평균조건이 필요없다.
귀족 및 부자들 사이에서만 요트 타기를 하는 동안에는 배의 길이와 무게가 크게 증가하여, 요트라고 하면 주로 큰 배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요트가 만들어지고 일반인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19세기말 이후로 영국의 증권중개사 맥뮬런과 영국의 법정변호사이며 시사평론가인 E.F. 나이트의 배가 그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귀화인 미국선장 조슈아 슬로컴은 11.3m의 스프레이호를 타고서 단독으로 세계일주를 하여(1895~98) 작은 배가 바다에서 견디는 힘이 좋다는 것을 입증했다. 20세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더욱 더 작은 경기용 및 유람용 배가 일반인에게 인기를 끌었으며, 3.7m의 작은 배 딩기까지 연습선으로 인기가 있었다.
20세기말에는 3m도 안 되는 매우 작은 1인승 배가 대서양을 항해했다.
기관을 사용하는 요트
1840~50년 장사에 사용되는 선박에서 증기기관이 돛 대신에 사용되었으며, 그후 내연기관이 유람선에 널리 사용되었다(→ 색인:모터보트).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커다란 동력 요트들이 급속도로 개발되었고, 장거리 순항선(巡航船)이 상류층에게 인기가 있었다.
처음에는 외륜선(外輪船)이었다가 차차 물에 완전히 잠기는 나사식 프로펠러로 바뀌었다. 군용 및 상업용 배처럼 돛과 기관으로 움직이는 기범선(機帆船)이 오랫동안 유지해온 요트의 모양이었다. 20세기말까지 많은 요트가 기범선이었으나 대부분 가솔린이나 디젤 기관을 가지고 있었다. 1890년대에 큰 증기 요트 만들기가 갑자기 붐을 이루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메이플라워호(1897)이다. 이 배는 2,690t급으로 3단팽창식기관, 2개의 스크루, 쇠로 만든 격벽(隔壁)이 있으며, 150명 이상의 승무원이 탑승했다.
1898년 미국 해군이 구입하여 1929년까지 대통령의 배로 사용했고 제2차 세계대전때 유용하게 사용했다.
그뒤 더 크고 더 좋은 내연기관들이 개발되어 큰 요트에 많이 사용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중유를 사용하는 디젤 기관이 크게 발전하여 그후 10여 년 동안 큰 동력을 사용하는 요트가 많이 만들어졌는데, 3,097t의 오리온호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이 기간동안에 만든 가장 큰 기범선은 1931년에 만들어진 2,323t의 시클라우드호로 4개의 돛대와 철재 바크식 돛을 가지고 있었다. 큰 힘을 사용하는 요트는 1932년 이후 줄어들고 더 작고 더 싼 배를 만들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사람이 작은 해군배를 사서 요트용으로 다시 고쳐 만들었다. 20세기말 요트 타기는 자신의 유람선을 가진 수천 명의 요트인 사이에서 인기있는 스포츠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요트의 수와 요트 인구의 증가로 연안, 내해(內海) 및 호수에서의 무역도 증가했다.
요트 경기단체
1881년까지 영국에 있는 대부분의 요트 클럽이 요트 경기협회(1875년 설립, 1952년부터 왕립 요트 협회로 개칭)의 회원이었다.
협회는 요트 경주를 위해 규칙을 만들고 항구사용, 정부기관과의 교섭을 담당하는 등 영국의 요트 대표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민물항해를 많이 하는 미국에서는 1849~80년에 뉴올리언스, 디트로이트, 보스턴, 샌프란시스코, 매사추세츠 주 마블헤드, 뉴욕 주 오이스터베이, 시카고, 뉴욕 주 라치몬트에 협회를 만들었다. 왕립 캐나다 요트 협회는 1852년에, 오스트레일리아 요트 협회(뒤에 왕립 시드니 요트 협회가 됨)는 1862년에 창립되었다.
세계 곳곳에서 요트 단체가 설립되었고, 북아메리카 경기 연맹이 1925년에 창설되었다. 국제 경기규칙과 등급을 마련하는 일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1907년 국제 요트 경기연맹(International Yacht Racing Union/IYRU)이 창설되었다.
특별한 목적의 요트 단체도 생겼는데, 미국 크루징 클럽(1922), 왕립해양경기 클럽(1925) 등이 해양에서 경기를 했다. 또 해도 만들기와 작은 배를 위한 경기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들이 생겼고, 20세기말에는 설계와 급이 같은 배들의 모임도 생겼다.
요트 대회
올림픽 대회
1904년을 제외하고 1900년 이후 열린 올림픽 요트 경기를 보면 배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것과 중기 이후에는 일정한 등급경기를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기에는 무게 제한이 없는 무제한급(open class) 경기와 길이 40~45.5m, 무게 508~520kg급의 경기가 열렸다.
1920년 대회에는 1906년 규칙과 1919년 규칙에 맞는 배를 14등급으로 나누어 경기를 했다. 참가할 선박의 운송이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아마추어 선수가 적어 대부분 주최국이 우승했고 참가선수도 거의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등급의 수를 정리하고 배의 크기도 작게 했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5.5m 배를 포함하여 대개 1인승 단일형배(monotype), 2인승 센터보드 배, 2인승 킬드 배, 3인승 단일형배, 개량형 배(development boat)의 5등급으로 나뉜다.
어떤 등급의 경기가 이번 대회에 포함되지 않으면 다음 대회 때에 하게 된다. 등급은 국제 요트 연맹의 추천에 의해서 국제 올림픽 위원회가 결정한다.
코스
경기는 포인트 투 포인트 및 클로즈드 코스경기가 있다.
대양횡단대회, 세계일주대회, 버뮤다 대회(1930년 시작, 뉴포트에서 버뮤다까지), 태평양횡단대회(1906년 시작, 캘리포니아에서 하와이까지)등 대부분 포인트 투 포인트 경기이다. 아메리카 컵 및 패스트네트 컵 대회는 각각 클로즈드와 포인트 투 포인트 경기로 진행된다. 1907년 처음 시작한 원 톤 대회는 두 경기를 모두 한다. 내해 및 연해에서 하는 작은 배들의 경기는 클로즈드 경기이며 삼각형 항로가 대부분이다.
대서양 횡단경기 및 세계일주경기
1866년에 대서양 횡단경기가 열렸는데, 뉴욕 요트 클럽의 규칙 아래 미국 코네티컷의 샌디후크에서부터 영국 아일오브와이트의 카우스 사이를 항로로 했다. 이 경기에는 길이가 32~32.6m인 3척의 스쿠너(플리트윙호·베스타호·헨리에타호 등)가 참가했으며, 미국의 신문 발행인인 제임스 고든 베넷의 헨리에타호가 13일 동안의 항해로 우승했다. 첫 단독 대서양횡단 탐험은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이루어졌는데, 1876년 앨프레드 존슨은 6m짜리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다.
1891년 1인 경기에서는 미국의 시롤러가 우승했다. 런던의 〈옵서버 Observer〉지가 주최한 1인 경기는 1960년에 시작되었으며 4년마다 열린다. 이 경기에서는 프랜시스 치치스터가 관심을 끌었다. 1966~67년 그가 단독으로 세계일주를 마치고 돌아오자 이에 크게 고무되어, 1968년 런던의 〈선데이 타임스 Sunday Times〉지가 주최하는 골든 글로브 경기대회를 포함하여 세계일주대회가 생겼다. 후에 왕립 해군 경기협회가 만든 대회가 1973년부터 4년마다 열린다. 이런 경기에서는 자동항해장치가 매우 유용하게 사용된다(→ 스포츠 기록:요트, 올림픽 대회).
한국의 요트 경기
한국 요트 경기의 역사는 1974년 4월 30일 대한조정협회의 요트부가 발족하면서 싹이 텄다. 초창기에는 주로 서울 중심의 각 대학 서클이 주류가 되어 이어지다가 동호인이 차츰 늘어나면서 1979년 3월 17일 대한 요트 협회가 창립되었다. 1979년 6월 19일 대한체육회 준가맹(準加盟) 단체가 되면서 같은 해 11월 9일 YRU 회원국으로 가입했고, 1982년 11월 28일에는 아시아 요트 연맹(AYF)이 창설되면서 창설 멤버로 가입했다.
1985년 제3회 아시아 선수권대회, 1986년 제10회 아시아 경기대회의 한국 개최를 주관했다. 1985년 1월 1일부터 1986년 12월 31일까지는 아시아 연맹 회원국이었다. 고도성장과 함께 국내의 요트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경기 성적도 크게 향상되었다. 1986년 아시아 경기대회 요트 경기에서 종합우승을 한 것을 비롯해 각종 아시아 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함으로써 한국 요트는 아시아 요트계의 정상으로 떠올랐다. 더욱이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회의 개최를 통해 요트에 대한 국민의 관심도가 더욱 높아져, 현재는 동호인 수가 수만 명에 이르고 있다.
한편 1986, 1988년의 대회를 계기로 경기 보트도 다량 보급되어 국내 요트의 스포츠 정착을 위한 촉진제가 되었다. 1985년에는 제66회 전국체육대회의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고, 현재는 대구광역시를 제외한 전국 14개 시·도 지부와 재일 요트 협회가 요트 협회 산하에 가입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부산·여수·아산만·한강에 요트 경기장이 들어서면서 한국 요트계의 미래를 밝게 해주고 있다.
주요국제대회의 참가성적으로는 제3회 부산 아시아 경기 선수권 대회에서 은 2개와 동 1개, 4회 자카르타 대회에서는 금 2, 은 3, 동 4개를 획득했다. 그리고 아시아 경기대회에서는 1986년 제10회 대회에서 금 2, 은 1개를, 제 11회 대회에서는 금 1, 은 1, 동 3개를 차지했다. 그러나 올림픽대회에서는 입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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