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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31(순조 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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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79(고종 16) |
국적 | 조선, 한국 |
요약
개항을 전후한 국내외적 위기의 시기에 외교활동으로 조선의 자주적 개국을 추진했으며, 새로운 지식을 수입·연구하여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 개화파를 형성하게 했던 개화사상가이다. 역관 이상적에게 한어(漢語)와 금석·서화를 배웠고, 북학파인 박제가의 실학을 공부했다.
그는 중국을 왕래하면서 얻은 견문을 바탕으로 조선에도 곧 서양열강의 침략에 의한 위기가 도래할 것으로 생각하고, 중국에서 가져온 〈해국도지〉·〈영환지략〉 등 각종 신서를 친지들에게 소개하고 읽을 것을 권했는데, 그중 절친한 친구였던 유홍기(劉鴻基)와는 개화사상의 사상적 동지로 결합하게 되었다. 강화도조약 체결과정에서 활동하던 중 과로하여 일본이 군함을 이끌고 돌아간 직후인 1876년 4월 중풍으로 병석에 눕게 되었다. 1877년 8월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 12월에는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진되었다.
개요
개항을 전후한 국내외적 위기의 시기에 외교활동으로 조선의 자주적 개국을 추진했으며, 새로운 지식을 수입·연구하여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 개화파를 형성하게 했던 개화사상가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원거(元秬), 호는 진재(鎭齋)·역매(亦梅), 당호(堂號)는 천죽재(天竹齋).
출신 및 역관으로서의 활동
아버지는 한역관(漢譯官)으로 지중추부사를 지낸 응현(膺賢)이며, 아들이 3·1운동 33인의 한 사람인 세창(世昌)이다.
시서(詩書)와 금석(金石)의 대가였던 역관 이상적(李尙迪)에게 한어(漢語)와 금석·서화를 배웠고, 가학(家學)으로 북학파인 박제가의 실학을 공부했다. 1846년(헌종 12) 역과(譯科)에 한학(漢學)으로 합격하고, 1853년(철종 4)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가 파견될 때 역관으로 베이징[北京]에 가서 11개월 동안 머물렀다. 이때 서양열강들의 침략과 태평천국운동으로 위기에 처해 있던 중국의 상황과, 중국의 지식인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신서(新書)를 간행하는 것을 보고 자극을 받았다.
이후 1853~58년 4차례 중국을 왕래하면서 중국의 개혁문제를 걱정하는 지식인들과 광범위하게 교제·토론하는 한편 〈해국도지 海國圖志〉·〈영환지략 瀛環志略〉·〈박물신편 博物新編〉 등의 신서를 구입·연구했다. 1860년 10월 진하 겸 사은사 신석우(申錫愚) 일행을 따라 역관으로 베이징에 갔다가 이듬해 3월에 귀국했는데, 이때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베이징 점령사건으로 인한 중국의 대혼란과 위기를 체험했다.
1866년 5월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직전 프랑스 동양함대의 조선침공이 준비되자 조선정부가 사태를 해명하고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 청국에 파견한 주청사(奏請使) 일행의 역관으로 다시 베이징에 가게 되었다. 이때 서양의 침략에 경험을 가진 중국의 정책가들을 방문하여 프랑스 함대의 동태와 그들의 조선침략 대책수립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중국은 프랑스의 침공에 전혀 관계되어 있지 않으며 프랑스군은 군량(軍糧)이 부족하므로 지형을 이용하여 굳게 지키고 가능한 한 싸움을 피하면서 오래 끌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을 조선정부에 보고했다.
그의 이러한 보고는 조선이 프랑스군을 물리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개항의 주장
병인양요 이후, 그는 나라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주적인 개국과 개혁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더욱 통감했다.
1871년 미국이 수호통상조규의 체결과 개국을 요청해오자, 대원군에게 미국과의 외교를 주장하고 개항을 건의했지만 쇄국정책을 주장하는 대원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군함이 무력행사를 하며 신미양요를 일으키자 이에는 단호하게 대결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자주성을 잃은 타율적·침략적 개국에는 반대한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1872년 박규수가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중국에 갈 때 수역(首譯)으로서 수행했는데, 이러한 인연을 바탕으로 조선의 정치현실과 개국의 문제에 대해 뜻을 같이 할 수 있었고 그후 개화파의 형성에 박규수와 함께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876년 1월 일본이 1875년의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을 구실로 무력으로 위협하며 개국통상을 요구하자 민씨정권에 의하여 다시 발탁되어 문정관(問情官)에 임명되었다. 그는 일본군함을 찾아가 일본측이 강화에 상륙하는 것은 조선정부의 명령 없이는 허락될 수 없으며, 조선의 접견대신(接見大臣)은 군함이 정박해 있는 곳에서 일본측 사신을 접견할 것이라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무기력한 조선정부에 의해서 뒷받침될 수 없었고, 결국 1월 17일 일본군이 군함을 이끌고 상륙하여 강화부의 연무당(鍊武堂)에서 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그는 회담 도중 일본의 함포위협을 즉각 중지하도록 항의하는 등 조선측 정사 신헌(申櫶)과 부사 윤자승(尹滋承)을 도와 활동했다. 또한 당시의 민씨정권이 일본과 무력으로 대결하여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최대한으로 사태를 수습하면서 개국한 다음 대응을 수립해야 한다는 의견을 박규수에게 개진하여 개국을 추진하도록 했다.
오경석과 박규수가 일체가 되어 개국을 추진하는 동안 대원군은 오경석을 불러들여 개국을 거절하고 일본과 일전을 벌일 것을 지시했으나, 대원군의 주장에 따르지 않았다.
개화당과의 관계
그는 중국을 왕래하면서 얻은 견문을 바탕으로 조선에도 곧 서양열강의 침략에 의한 위기가 도래할 것으로 생각하고, 중국에서 가져온 〈해국도지〉·〈영환지략〉 등 각종 신서를 친지들에게 소개하고 읽을 것을 권했는데, 그중 절친한 친구였던 유홍기(劉鴻基)와는 개화사상의 사상적 동지로 결합하게 되었다.
그들은 조선의 정치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장차 정치의 전면에 나설 젊은 양반자제들과 접촉하여 개화사상을 교육하고 발전시켜서 근본적인 개혁정치를 실시하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박규수가 우의정에서 사직한 뒤인 1874년경부터 김옥균 등 젊은 지식인들은 박규수의 집을 드나들면서 북학파의 학문과 해외사정에 대해 지도를 받았으며, 오경석과도 접촉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박규수가 죽은 1877년 이후에는 오경석·유홍기, 그리고 오경석이 죽은 1879년 이후에는 유홍기에게 전적으로 지도받으면서 개화당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는 강화도조약 체결과정에서 활동하던 중 과로하여 일본이 군함을 이끌고 돌아간 직후인 1876년 4월 중풍으로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동안의 외교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1877년 8월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 12월에는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진되었다. 금석학에 대한 관심도 커서 역대 중국과 우리나라의 금석문을 수집했고, 글씨는 특히 전자(篆字)를 잘 썼으며 그림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저서로는 〈삼한금석록 三韓金石錄〉·〈삼한방비록 三韓訪碑錄〉·〈천죽재차록 天竹齋箚錄〉·〈수의쾌독 隨意快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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