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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한국에서 발달한 한국 내 남겨진 굳은 돌이나 단단한 물질에 기록된 명문(銘文)을 연구하는 학문.
개요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이전부터 금석학이 발달했으리라 추정되지만 자료로 볼 수 있는 것은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삼국시대의 금석문을 이용한 것이 최초이다.
그외에 〈조당집〉이나 〈해동고승전〉에도 관련 비문을 이용한 흔적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금석문이 이용된 시기는 크게 3시기로 나뉜다. ① 글자체를 중요시하여 서첩(書帖)으로 사용하기 위해 탁본을 만든 시기, ② 조선 후기 실학파 연구 중 고증을 위하여 금석문을 정리하던 시기, ③ 20세기 후반 문헌사료에서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금석문을 이용하는 시기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금석학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17세기 이후이며, 그 이전에는 금석문의 종합적 정리가 없다.
17세기의 금석학과 금석학자
1592년 일본의 침략과 1625년 청(淸)의 침략으로 성리학의 화이관(華夷觀)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고, 이에 따라 전통문화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금석문의 열기도 높아졌다.
또 문인(文人)들이 보조학문인 서예를 위해서도 금석문을 필요로 했으므로 금석문의 탁본과 정리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당시 중요한 금석학자와 그의 논저로는 조속(趙涑:1595~1668)의 〈금석청완 金石淸玩〉과 이우(李俁:1637~93)의 〈대동금석첩 大東金石帖〉을 들 수 있다. 전자는 모두 10책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현존하는 가장 오랜 서첩이므로 수록된 비문 가운데 현존하지 않은 비문도 있어 매우 중요하다.
후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중요 금석문 탁본을 모아서 서첩을 만든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이마니시[今西龍]가 소장하였는데, 그는 책 내용 중 조선 이후의 자료를 빼고 해제를 써서 〈대동금석서〉로 간행하였다. 그밖에 17세기 금석학자로는 차천로(車天路:1556~1615)·중관해안(中觀海眼:1567~?)·김수증(金壽增) 등이 있다.
18세기의 금석학과 금석학자
18세기에 들면서 정치가 안정되자 금석문의 수집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이중 김재로(金在魯:1624~1701)의 〈금석록 金石錄〉은 그의 권세 못지않게 내용도 풍부하다. 원책은 246책의 거대한 것이었으나 남아 있는 것은 조선시대 것인 26책이 전부이다. 그외 중요한 금석학자로는 이익(李瀷:1681~1763)·유척기(兪拓基:1691~1767)·김광수(金光遂:1696~?)·이희령(李希齡:1697~1776)·안정복(安鼎福:1712~91)·홍양호(洪良浩:1724~1802) 등이 있다.
19세기의 금석학과 금석학자
19세기의 금석학은 이전의 서예 중심의 연구에서 내용 중심의 연구로 바뀌었다는 데 큰 특징이 있다.
청대 고증학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당대 실학의 발전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때에는 이전 금석문의 일부를 모아 서첩을 만들던 방식에서 전문을 모아 일비일첩(一碑一帖)으로 만들었다. 서유구(徐有榘:1764~1845)는 〈임원십육지 林園十六志〉 중에 동국금석(東國金石)을 두어 금석문을 정리했는데, 이는 일종의 목록집으로 목록 다음에 여러 전적(典籍)에서 언급된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이조묵(李祖默:1792~1840)은 1824년에 〈나려임랑고 羅麗琳瑯攷〉를 간행하였다. 본서는 7종의 중요 금석문에 대한 서체, 찬자(撰者), 글자의 크기, 현존상태 등을 서술하였다. 부록인 〈탁비비결 拓碑秘訣〉에는 탁본할 때 알아두어야 할 시기·순서·준비도구 등이 정리되어 있다.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일찍이 박제가의 제자가 되어 청대 고증학을 배운 바 있다.
그는 이후 청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금석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가 정리한 〈금석과안록 金石過眼錄〉은 이런 방법론을 기초로 씌어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김정희는 중국의 금석학과 서도사(書道史)에 대한 해박한 지식 및 우리 금석에 대한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이 방면에 많은 후진을 배출했다. 대표적 인물로는 신위·조인영·권돈인·이조묵·윤정현·신헌·조면호·이상적·전기·경석 등이 있다.
그밖에 청나라 사람 유희해(劉喜海)가 있는데, 그는 김정희·조인영 등과의 교류를 통해 1832년에 〈해동금석원 海東金石苑〉 8권을 정리하였다.
금석학자로서 19세기를 마무리한 사람으로 오경석(吳慶錫:1831~79)을 들 수 있다. 그는 이른바 개화당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금석문을 철저히 판독하고 고증하여 1858년에 〈삼한금석록 三韓金石錄〉을 저술하였다.
이 저서는 본래 147종을 대상으로 정리하려 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실제는 8종의 전문과 고증만이 실려 있다. 수록방식상의 특징은 이전과 달리 전문을 판독하여 싣되 행(行)을 구분하였으며 알아보기 어려운 글자를 1쪽만이라도 수록했을 뿐 아니라 이전의 견해를 모아 전문보다 1글자씩 낮추어 정리하였고, 자신의 견해 역시 2글자씩 낮추어 서술하였다. 19세기에는 이와 같이 금석문의 수집뿐만 아니라 체계적인 연구와 판독을 바탕으로 한 저술을 통하여 금석학이 발전되었다.
20세기초의 금석학과 금석학자
20세기초의 금석학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맞물려 진행되었다.
먼저 일제는 조선의 불교계를 지배하기 위해 1912년 조선총독부가 중심이 되어 〈조선사찰사료 朝鮮寺刹史料〉(상·하)를 간행했고, 이를 기초로 1919년에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금석총람 朝鮮金石總覽〉(상·하)을 간행했다. 두 책이 간행되는 과정에서 한국인 학자로는 이능화(李能和)가 1918년 〈조선불교통사 朝鮮佛敎通史〉(상·중·하)를 간행했고 일본의 학자로는 가쓰라기[葛城末治]가 1935년에 〈조선금석고 朝鮮金石攷〉를 간행했다.
가쓰라기의 연구서는 한국의 금석문에 대한 최초의 단행본 연구서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당시 절정에 달한 일제의 한국사 연구로 인해 다양한 자료의 수집과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는 종래 서체를 중시하던 금석학의 효용성과 고증학 이후 금석학의 기반을 종합하여 이를 충실히 소개하는 반면, 금석문에서 발견된 중국의 침략과 연호의 차용 등을 내세워 한국 전통문화의 예속성을 강조하였다. 이런 연구자로는 역사의 이마니시[今西龍]·이케우치[池內宏], 언어학과 고고학의 야유카이[鮎貝方之進]·후지다[藤田亮策], 불교학의 누카리야[忽滑谷快天] 등이 있다.
최근의 금석학 연구경향
해방 후 정치적·사회적 혼란과 전쟁 등으로 많은 자료가 흩어지고 소실되어 금석학은 오히려 퇴보하였다.
이후 금석학 연구는 각종 금석문 자료의 발굴소개 및 보존, 발굴된 자료의 탁본작업 및 판독, 혹은 서책으로 간행하거나 대중적인 보급을 위한 활자화작업이 진행되었다. 그결과 1960~80년대에 걸쳐 다양한 금석문 관계 자료들이 출간되고 정리되었다. 금석문 관계자료로는 〈조선금석문추보 朝鮮金石文追補〉(이난영, 1968)·〈한국금석유문 韓國金石遺文〉(황수영 편, 1976)·〈한국금석문대계 韓國金石文大系〉(조동원 편, 1983, 전북편·충남북편·경북편)·〈한국금석집성 韓國金石集成〉(임창순, 1984)·〈한국금석전문 韓國金石全文〉(허흥식 편, 1984)·〈한국금석총목 韓國金石總目〉(장충식 편, 198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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