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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카테리나 2세의 초기 재위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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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예카테리나 2세는 지배자였다.

러시아에 대해 진정 헌신적이었던 그녀는 러시아를 부강한 국가로 만들기로 작정했다. 러시아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그녀는 질서와 정의에 바탕을 둔 통치체제의 확립과 교육의 확대를 꿈꾸어왔었다. 또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 필적하는 궁정을 꾸미고 프랑스를 모방하는 것 이상으로 민족문화를 창달하려는 생각을 마음 속에 품어왔었다. 그녀의 계획은 모두 실행에 옮기기에는 너무나 수가 많아서 모든 관심을 오로지 이 계획에만 쏟는다 해도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 가운데 가장 시급한 문제는 옐리자베타 여제 사망 당시 이미 텅 비어버린 국고를 다시 채우는 일이었다. 이 문제는 1762년 성직자의 재산을 정부재산으로 이관함으로써 해결되었다. 당시 러시아의 성직자들은 나라 전체 토지와 봉토의 1/3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성직자들은 표트르 대제의 개혁으로 미미한 정도로 남아 있던 권력을 모두 잃고서 국록을 받는 공직집단으로 지위가 격하되었다.

한편 자신의 쿠데타와 표트르 3세의 의문스런 죽음은 그녀가 여타 유럽 국가들과 상대하는 데 있어서 신중함과 안정을 찾는 것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러시아의 전통적 동맹국인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오랜 적대국가인 프로이센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1764년 자신의 오랜 정부 가운데 한 사람인 스타니수아프 포니아토프스키폴란드 왕으로 앉힘으로써 분명한 국경선이 없이 이웃한 3개 열강들의 야심의 대상이 되어온 폴란드 문제를 해결했다.

포니아토프스키는 심약한 성격이었으나 예카테리나에게는 절대적으로 헌신적인 인물이었다. 반면 그녀의 개혁 노력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영국과 프랑스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신봉자였던 그녀는 몽테스키외와 장 자크 루소가 옹호하던 개혁이 무정부적·후진적인 성격의 러시아 현실에 전혀 맞지 않다는 사실을 재빨리 깨달았다. 이들의 개혁사상은 유럽에서도 실행에 옮겨지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1767년 자신의 백성들이 진정 원하는 바를 직접 확인하고 헌법의 틀을 마련하기 위해 전국 각 지방과 각 계층(농노를 제외하고) 대표로 구성된 위원회를 소집했다.

이 위원회에서 수개월간 논의가 진행되었으나 결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자 위원회에 내려진 예카테리나의 교서가 헌법의 초안이 되고 곧 법전이 되었다. 그러나 이 헌법은 프랑스에서 공포되기에도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인 내용을 담은 것으로 여겨져 러시아에서는 사문화되었다.

개혁의 시도가 좌절되자 예카테리나는 1768년 정책을 변경하기 위해 투르크와의 전쟁을 구실로 삼았다.

이때 이후로 무엇보다도 국가의 영광을 앞세우는 데 정책의 역점을 두었다. 표트르 대제 이후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의 숙적이었다. 따라서 투르크와의 전쟁은 예카테리나의 신하들의 애국심과 열정에 불을 당겼다. 그리하여 1770년 체슈메 전투의 승리가 예카테리나에게 군사적 영예를 안겨다주기는 했으나 투르크족들은 아직 완전히 패배하지 않았으며 전투가 계속되었다.

바로 이 시점에 러시아는 예기치 않았던 곤경에 직면했다. 먼저 전쟁에 따른 어려움과 함께 무서운 전염병이 모스크바에 창궐했다. 전염병은 대중들 사이에 민심이탈과 함께 대중동요의 기운을 조성했다. 1773년 돈 카자크족의 장교출신인 예멜리얀 푸가초프가 죽은 표트르 3세로 자처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1917년 혁명 이전 러시아 역사에서 최대 규모의 반란이었다. 우랄 산맥지역에서 시작된 반란은 남동부 각 지방으로 급속히 확산되었으며 1774년 6월 푸가초프의 카자크 군대는 모스크바 진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투르크와의 전쟁이 러시아의 승리로 종결되었으며 예카테리나는 반란세력을 분쇄하기 위해 정예부대를 파견했다. 전투에서 패하고 체포된 푸가초프는 1775년 참수되었으나 그가 야기한 공포와 혼돈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예카테리나는 백성들이 연민의 대상이기보다는 두려움의 존재이며 이들을 자유롭게 하기보다 오히려 속박을 더욱 단단히 해야만 할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권좌에 오르기 전 예카테리나는 농노해방을 계획했었다. 산업의 95%가 농업인 러시아 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농노는 소유주들의 재산이었으며 귀족들의 재력은 토지가 아니라 농노의 숫자에 따라 평가되었다. 그러나 예카테리나는 권력의 현실에 맞부딪히게 되자 농노해방이 농노 소유주들로부터 너그러이 수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소유주들은 곧 예카테리나 자신의 지지기반이었으므로, 생산수단인 농노를 빼앗기게 될 경우 나라 전체를 무질서 속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존재였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스스로 불가피한 악습과 타협한 예카테리나는 과거 한때 자신이 비인간적인 제도라고 비난했던 농노제를 이제 새로이 조직하고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유로운 신분이었던 우크라이나 농민들을 농노로 만들었으며 이른바 왕실소유영토를 자신의 총신과 각료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일정한 자치권을 누려왔던 해당 농민들의 운명을 열악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집권 말기에 러시아에서는 자유농은 찾아보기가 힘들었으며 보다 조직적인 통제 때문에 농노들의 형편은 그녀가 즉위하기 전보다 더욱 비참해졌다. 어쨌든 러시아 국민의 95%는 예카테리나의 치세기에 이룩된 업적들로부터 직접적인 혜택을 입지 못했다. 오히려 이들 농노의 강제노동은 경제와 군사력을 신장시키고 문화를 창달하려는 원대한 계획에 소요되는 증가일로의 막대한 지출에 자금을 조달해주었을 따름이다.

그결과 예카테리나는 적어도 자신이 훌륭한 행정가였음을 입증했으며, 백성들의 피와 땀이 헛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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