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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모든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프랑스 혁명이 가져다준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왕과 귀족의 권위가 의문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예카테리나는 스스로가 '계몽주의 운동의 친구'였지만 자신의 특권을 포기할 의향은 전혀 없었으며 "나는 귀족이며 그것이 곧 직업이다"라고 말했다.
농노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책을 출간하려 했던 작가 A. N. 라디시체프가 1790년 재판을 통해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그후 사면을 받아 추방당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라디시체프가 표현했던 생각은 1767년의 예카테리나의 훈령과 매우 유사한 내용이었다. 그 다음으로 프랑스 혁명에 고무된 폴란드가 자유주의적인 내용의 헌법을 제정하고자 동요하기 시작했다. 1792년 혁명의 위험성을 사전에 예방한다는 구실로 예카테리나는 군대를 파견, 이듬해 우크라이나 서부지역 대부분을 합병했으며 프로이센은 그 와중에서 폴란드 서부영토를 차지했다. 1794년 타데우슈 코시치우슈코가 주도한 민족주의 성격의 봉기가 일어난 후 예카테리나는 이듬해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3국의 폴란드 분할을 통해 폴란드를 지도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여제의 치세 말기 몇 년 간은 프랑스 루이 16세의 처형과 혁명군의 진출, 그리고 급진사상의 확산 등으로 암운이 드리워져 있는데다가 자신에게 적당한 후임자가 없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아들 파벨은 무능하고 침착하지 못한 인물이었으며 손자 알렉산드르는 나이가 너무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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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예카테리나 2세와 프랑스 혁명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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