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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42경, 러시아 지모베이스카야나도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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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775. 1. 21(구력 1. 10), 모스크바 |
국적 | 러시아 |
요약
러시아의 대표적인 카자크 농민 반란인 푸가초프의 난(1773~75)의 지도자.
Pugachov는 Pugachov라고도 씀.
돈카자크 출신으로 문맹이었던 그는 러시아군에 복무하면서 7년전쟁(1756~63) 종반의 전투, 폴란드 원정(1764), 러시아-투르크 전쟁(1768~74)에 참전했다. 벤데리 포위공격 및 점령(1769~70) 후에 부상한 몸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몸이 회복된 후 3년 동안 여러 곳을 편력했는데, 특히 복고신앙파(Raskolnik)의 정착촌을 찾아다녔다. 이 종파는 반정부적인 종교집단으로서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여행중에 야이크(우랄) 카자크인의 반란(1772)과 그에 대한 잔혹한 진압을 알게 된 푸가초프는 여전히 불만을 품고 있는 카자크인들이 있는 야이츠키고로도크(지금의 우랄스크)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군대탈영죄로 체포되어 카잔에 수감되었다가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았으나 탈출하여 1773년 6월 볼가 강 동편의 초원지대에 나타났다. 그는 스스로 황제 표트르 3세(표트르 3세는 황후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폐위되어 1762년에 암살되었음)라고 주장하면서 농노제 폐지를 선언하고 상당한 추종세력을 규합했는데, 거기에는 야이크 카자크인, 우랄 산맥 광산 및 공장의 농촌출신 노동자, 성직자, 바슈키르족이 포함되어 있었다.
궁극적으로 예카테리나를 폐위시킨다는 계획하에 이들은 1773년 가을 우랄 지역의 상공업 중심지인 오렌부르크로 돌진하여 포위했다. 이 지역의 지주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껴 모스크바로 도망쳐 오자 예카테리나는 반란의 심각성을 깨닫고 1774년 1월 A. I. 비비코프 장군이 지휘하는 토벌군을 보냈다. 그해 봄 비비코프는 오렌부르크 서편의 타티시체보에서 푸가초프를 패배시켰으나, 푸가초프는 1774년 7월 카잔으로 진격하여 도시를 불태워버렸다. 며칠 후 그는 다시 패배했으나, 돈 카자크인 중에서 증원군을 규합할 생각으로 볼가 강을 건넜다.
그는 1774년 8월 사라토프를 장악하고 차리친(지금의 볼고그라드)을 포위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1774년 9월 3일(구력 8. 23) 마침내 A.V. 수보로프 장군에게 패했다. 푸가초프는 탈출했으나 야이크 카자크인의 배반으로 모스크바에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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