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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영국과 프랑스 간에 체결된 협정(1904. 4. 8).
이 협정에 의하여 영국과 프랑스는 양국간에 놓여 있는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적대관계를 청산했다. 또한 이 협정은 양국간에 외교적 협력의 분위기를 조성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10년 동안 독일의 압력에 공동대응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이 협정은 결코 양국 사이에 동맹 관계가 형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1894년 프랑스가 러시아에게 약속한 공약에 영국을 끌어들이지도 못했다.
이 화친협정은 1898년부터 프랑스의 외무장관직을 맡은 테오필 델카세가 실시한 정책의 결정판이었다. 그는 프랑스와 영국이 협약을 체결한다면 서유럽에서 독일이 어떤 동맹 체제를 형성하더라도 프랑스의 안전이 어느 정도 보장될 것으로 믿었다. 협상을 성사시킨 주역은 런던 주재 프랑스 대사 폴 캉봉과 영국의 외무장관 랜스다운 경이었지만 영국 왕 에드워드 7세의 친프랑스적 성향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 협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집트에서는 영국에게, 모로코에서는 프랑스에게 행동의 자유를 부여한 것이었다. 다만 프랑스의 경우에는 프랑스가 모로코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하건 그곳에서 스페인이 갖는 이권을 합리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조건이 첨가되었다. 동시에 영국은 프랑스령 기니 근해의 로스 제도를 프랑스에 할양하고 나이지리아의 국경을 프랑스에 유리하게 설정하며 감비아 계곡 상류에 대한 통제권을 프랑스에게 양보하기로 했다.
반면에 프랑스는 뉴펀들랜드 근해의 일정 어장에 대한 독점권을 포기했다. 뿐만 아니라 타이에서 프랑스와 영국의 세력권이 설정되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인접한 동부 지역은 프랑스의 세력권이 되고, 미얀마의 테나세림에 인접한 서부지역은 영국의 세력권이 되었다. 또한 누벨헤브리디즈 제도에서 영국인 개척자와 프랑스인 개척자들 사이의 경쟁을 완화하기 위한 대책도 마련되었다.
이 협정에 의해 양국은 사실상 고립상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즉 이 협정체결 이전에 양국은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해 프랑스는 본의 아니게, 영국은 만족스럽게 고립 상태를 유지해왔었다. 다시 말하면 영국의 유일한 동맹국은 일본(1902)이었으나 일본은 유럽 지역에서 전쟁이 발생한다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프랑스 역시 러시아 이외의 동맹국은 없었으며, 러시아는 1904~05년 러일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그 능력은 신용을 잃은 것이었다. 한편 영국-프랑스 화친협정은 독일을 당혹시켰는데, 그것은 독일이 오랫동안 프랑스와 영국 간의 반목에 입각한 정책을 써왔기 때문이었다. 1905년 독일은 모로코에서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프랑스 화친협정을 무산시키려고 시도했지만, 이러한 독일의 시도는 오히려 이 협정을 강화시켰을 뿐이다.
이 사건은 보통 탕헤르 사건 또는 제1차 모로코 위기라고 불린다. 곧이어 프랑스군 참모들과 영국군 참모들 사이에 군사회담이 시작되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유대는 1906년 알헤시라스 회담과 1911년 제2차 모로코 위기에서 재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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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영국-프랑스 화친협정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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