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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직공예

다른 표기 언어 染織工藝

요약 솜이나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 염색을 하고, 날실을 정경하여 베틀에 건 후 씨실을 교차시켜서 직물을 짜는 공예기술의 일종 또는 제작된 공예품의 총칭.

염색과 직조는 섬유를 재료로 하여 함께 발전했기 때문에 염직은 염색이나 직조로 문양을 표현하는 것을 통칭한다. 염직은 의생활과 관련된 필수품으로서 그 기원은 선사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간다. 이때의 염직물은 아주 간단한 구조의 베틀에 날실을 걸고 그 날실 끝에 방추차를 매달아 씨실을 가로로 하여 직물을 짜나가는 평직이 대부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간단한 염직기술은 점차 발달하여 삼한시대에는 염색과 사라능단의 제작이 시작되었다. 특히 삼국시대부터 사회계층의 신분표시와 사회질서의 유지를 위해서 복색제도를 국가에서 철저히 통제했으며, 제작을 담당하는 관청과 제작에 필요한 원료 등 모든 제작여건을 국가가 관리했다.

염색의 종류

천연염색

천연염색은 햇빛 바람 손놀림등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통해 빛갈을 만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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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색은 실이나 직물에 염료를 사용하여 색을 들이는 것으로 염료의 종류에 따라 천연염색과 인조염색으로 나누어진다. 1856년 합성염료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주로 식물에서 채취한 염료로 염색을 했다. 식물성 염료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치자·울금·황벽 등은 식물에서 직접 추출한 것으로 염색을 바로 할 수 있다.

[藍]처럼 물에 녹지 않는 것은 환원제를 써서 물에 용해시켜 염색한 후 공기중에 건조시키면 산소와 결합하여 발색된다. 잇꽃[紅花]·꼭두서니·지치[芝草]·소방목 등은 매염제에 따라 여러 가지 색으로 변화된다. 조선시대에는 매염제로 잿물을 많이 사용했으며 이밖에 오미자·명반·철장 등도 사용했다.

염료의 효율적인 조달을 위해 국가에서는 전국적으로 염료 산지를 조사했으며, 잇꽃과 쪽의 경우에는 재배와 관리를 국가에서 했다.

염색의 역사

염색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면 탈색·퇴색되기 때문에 남아 있는 예가 드물다. BC 5000~4000년경의 모헨조다로 유적에서 발견된 꼭두서니염색, 이집트 지역의 쪽염색, 테베 고분의 미라를 싼 천의 잇꽃염색과 BC 1600년경 페니키아에서는 자색염색이 성행했던 흔적이 보인다. 이러한 유물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사막이므로 건조해 습기의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허난 성과 산시 성 등지의 상대(商代) 유적지에서 홍색·황색·흑색 염색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진한시대에는 실물자료를 통해 문양판을 좌우대칭으로 찍어낸 협힐, 홀치기염법인 교힐, 납방염법인 갈힐 등이 고안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후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한국에서도 일찍부터 염색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삼한시대부터 복색으로 신분의 높고 낮음을 구분했다. 삼국시대에는 염색을 전담하는 관청을 두어 전문적으로 염색을 담당하게 했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에는 염궁·홍전·소방전·찬염전 등의 전문관청에 모(母)라 불리는 장인들이 소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도염서에서 염색을 관장했으며, 〈해동역사〉를 보면 고려는 붉은색과 자색(紫色)의 염색이 특히 뛰어났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상의원과 제용감에 소속되었던 장인들이 하엽록장·청염장·홍염장·초염장 등으로 세분화되었다. 더욱이 세조와 연산군 때에는 염색기술의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염색장인을 중국에 보내 염색기술을 습득해오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염색기술의 향상에 국가적인 관심과 정책적인 배려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자색염색 기술이 뛰어나 중국 황제나 사신들이 생견이나 명주를 자색으로 염색해줄 것을 요청했다.

직조의 종류

직조는 베틀의 운용으로 직물의 표면에 꼬임이나 조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직조조직은 평직(平織)·능직(綾織)·단직(緞織)·사라직(紗羅織)과 이들 기본조직들을 변형시킨 금(錦)이 있다. 평직은 가장 기초가 되는 조직으로 날실과 씨실을 90°로 교차시킨 것이다.

식물성 섬유에는 삼베포·모시포·무명포가 있고, 동물성 섬유에는 명주·조하주(朝霞紬)·어아주(魚牙紬) 등이 있다. 능직은 날실과 씨실의 교차점이 날실 2올에 씨실 1올이 교차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것이므로 그 교차점이 일정한 사선을 이루므로 사문조직(斜紋組織)이라고도 하며, 소문능(小紋綾)이 대표적인 것이다. 단직은 기본조직 중에서 가장 늦게 발달된 것이며, 날실과 씨실이 각각 5올 단위로 교차되기 때문에 교차점이 많아서 표면이 매끄럽고 광택이 난다.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사용했던 대표적인 직조방법이다. 사라직은 날실과 씨실이 교차하면서 꼬임을 이루므로 직물의 바탕에 구멍이 뚫려서 공기가 잘 통하고, 여름철 직물에 애용된 조직이다. 변화조직인 은 선염한 오색실을 날실과 씨실에 사용해서 문양을 짜는 것인데 날실로 문양을 만들면 경금이라 하고, 씨실로 문양을 만들면 위금(緯錦)이라고 한다. 경금은 직기의 제약을 받는 데 비해 위금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복잡하고 회화적인 문양을 가진 직물을 짤 수 있다.

문헌에 보이는 한국의 대표적인 금에는 문금(紋錦)·운포금(雲布錦)·조하금(朝霞錦)·어아금(魚牙錦)·자지힐문금(紫地纈紋錦) 등이 있다. 이밖에 금빛이 휘황하고 호화로운 직금(織金)은 고려말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왕실용·의례용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직금은 사라능단의 바탕직물에 금박지를 얇은 실처럼 잘라내 문양을 짠 것으로, '금실로 짠 비단'이라는 뜻에서 금선비단(金線緋緞)이라고도 불렸다.

직조의 역사

직조는 연결된 한 가닥의 실을 얽으면서 짜는 편직(編織)에서 발전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갑골문 중에 누에[蠶]·실[絲]·뽕나무[桑]·비단[帛] 등의 상형문자가 보일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진한시대부터 남자는 농사일을 하고 여자는 직조한다(男耕女織)는 것이 보편화되어 그 생산량이 증가했다.

한국에서도 삼한시대부터 양잠과 베짜기가 성행했으며, 삼국시대부터는 제도적인 뒷받침으로 고급직조물의 제작과 생산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직조관청은 섬유원료와 직조방법에 따라 여러 관청으로 세분화되었는데, 마전(麻典)에서는 삼베를, 조하방(朝霞房)에서는 조하주나 조하금을, 기전에서는 능직금(綾織錦)의 일종인 기(綺)를, 금전에서는 각종 금을 짰다. 고려시대가 되면 직조는 잡직서(雜織暑)에서 전담했으며, 방직장·금장·나장(羅匠)·능장(綾匠)과 같이 고급직물을 제작할 수 있는 장인들은 액정서(掖庭暑)에 소속되어 있는 이원화된 체제였다. 조선시대에도 직조기술의 숙련도에 따라 방직장(紡織匠)과 능라장(綾羅匠)으로 구분되었으며 상의원·제용감·내자시·내섬시에 110명의 방직장이 있었고, 상의원에만 105명의 능라장이 있었다. 특히 직조는 직기에 의해 제한을 많이 받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직기의 부속품 중에서도 제작이 까다로웠던 바디를 만드는 성장(筬匠)이 같은 직조관청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것은 곧 고급직물을 제작하기 위해 선결조건인 직기의 국산화가 가능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주목된다. 조선시대의 직조에서 특징적인 것은 고려말 문익점이 들여온 목면의 재배가 18세기에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그결과 이전 시기보다 직조품의 종류와 명칭이 다양해졌다.→ 염료와 염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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