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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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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 콜럼버스가 히스파니올라 섬을 항해하기 이전의 아이티 역사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16세기말 토착 인디언인 아라와크족은 일하다 죽거나 병으로 죽거나 또는 스페인인들에게 몰살당해서 대다수가 멸종한 상태였다. 당시 스페인 정착촌은 대개 섬 동쪽 끝부분에만 드문드문 있었다.

케이맨 제도에 기지를 둔 프랑스 해적들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섬의 서쪽 끝부분을 장악해서 재배농장을 세우기 시작했다(→ 프랑스사). 1644년에는 북서쪽에 포르드페를 세웠으며 곧 프랑스 서인도회사가 나서서 포르드페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1697년 프랑스는 히스파니올라 섬의 서쪽 부분을 생도미니크라고 새로 이름 붙였다. 18세기 동안 이 식민지는 상당한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섬의 해방'노예들이 프랑스의 통치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켰고 1804년 원래 아라와크어인 아이티라는 국호 아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반란군들은 안정된 정권을 수립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장 피에르 보이에가 통치했던 1813∼43년을 제외한 19세기 동안 이 나라는 암살과 혁명으로 얼룩진 정권교체를 계속 경험해야 했다. 보이에 정권이 전복된 이후 쿠데타와 암살이 다시 벌어졌다. 20세기초 미국은 아이티에 대한 광범한 통상 특권을 얻어냈고 1915∼34년까지 해군을 주둔시켰다(→ 미국사) . 이 부대가 철수한 후 아이티는 국내의 정치불안뿐만 아니라 도미니카 공화국의 적대행위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후 1957년 '파파 독'이라 불리던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는 '통통 마쿠테'라는 친위부대를 편성하여 그의 반대자들을 진압하고 종신 대통령직을 고수했다. 경제적 쇠퇴, 계속된 국내 불안, 도미니카 공화국과의 불편한 유대관계 등에도 불구하고 뒤발리에는 1971년 죽을 때까지 독재정치를 했다. 그후 '베이비 독'이라 불리는 그의 아들 장 클로드 뒤발리에가 권력을 계승했다. 장 클로드의 통치기간에도 아이티의 경제적 불균형, 정치적 탄압, 타락한 정치관행 등이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러나 1986년 널리 퍼진 국민의 불안은 반정부 시위로 표출되었고 장 클로드는 축출되었다. 그러나 이어서 일어난 민주적 정치개혁의 실패로 여전히 군부통치하에 있다가 1990년 12월 6일 대통령 선거에서 가톨릭 신부인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가 민간정부를 출범시켰다. 그는 해방신학 신봉자여서 외국자본 도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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