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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52년 군생활을 청산하고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대표로 나서 승리했다. 군인 출신으로 그는 비서관과 내각의 각료들에게 권한을 대폭 위임하고, 행정부처의 구체적인 실무에는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아이젠하워의 국내정책은 세금인하, 균형예산, 경제에 대한 정부통제의 완화, 연방정부 책임의 주정부에의 이양 등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사회보장제도는 확대되었으며, 1953년 봄에는 보건부·교육부·복지부가 신설되었다. 임기 중 매카시의 찬성 아래 미의회에서 공산당을 불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아이젠하워는 외교적으로 평화를 성취하고 공산주의의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 집단방위 협정을 구축하는 데 힘썼지만 개별 분쟁에 대해서는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2번째 임기에서는 수에즈 분쟁이 나자 아이젠하워는 공산주의의 침략에 맞서 지원을 요청하는 모든 중동 국가들에 미군을 파견하겠다는 아이젠하워 독트린의 채택을 강력히 권고했다.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민권법을 제정했다. 소련의 인공위성 발사 후에는 우주개발 연구를 증강하고 과학을 발달시키기 위해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창설되었다. 소련과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흐루시초프를 미국으로 초청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많은 비판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이젠하워는 미국인들에게 놀라울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미국 대통령으로서의 첫 출발
1943년초부터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후보로 거명되었다.
개인적인 인품과 군인으로서의 명성 때문에 그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양쪽으로부터 입후보 제의를 받았다. 1952년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그는 자신이 공화당원임을 천명했고, 뉴욕 주지사 토머스 E.듀이가 지휘하는 공화당의 동부지역 세력들은 아이젠하워에게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지명을 요구하고 나서라고 집요하게 설득작전을 폈다. 여러 주의 예비선거에서 아이젠하워는 같은 공화당의 오하이오 주 상원의원 로버트 A.태프트와 경합했으나 그 결과는 이길 때도 있었고 질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는 공화당 후보지명전에 입후보할 결심을 굳혔다. 1952년 6월 그는 37년간의 군생활을 청산하면서 미국으로 돌아와 적극적인 유세전에 돌입했다. 1952년 7월에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아이젠하워는 태프트 상원의원 지지세력과 치열한 접전 끝에 1차 투표에서 공화당 후보지명을 획득했다. 그의 러닝메이트는 캘리포니아 주 상원의원 리처드 M.닉슨이었다.
민주당은 일리노이 주지사 애들라이 E.스티븐슨을 대통령 후보, 앨라배마 상원의원 존 스파크먼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는 지칠 줄 모르는 유세전을 펼쳤고, 온화하고 성실한 태도로 미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는 정직하고 경제적인 정부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한국전쟁의 종식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겠다고 약속했다.
닉슨을 포함한 많은 공화당 인사들은 트루먼 행정부 내에 친공산주의적인 불순분자들이 있다고 비난하고 이들의 파괴적인 행위를 엄중히 금지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이젠하워-닉슨 팀은 39개 주를 석권하고, 442 대 89의 선거인단 투표득표와 3,300만 표 이상의 직접득표를 얻음으로써 힘들이지 않고 승리했다. 공화당은 박빙(薄氷)의 차로 의회를 장악할 수 있었지만 2년 뒤에는 양원 모두에서 소수당이 되었다.
2명의 전임 민주당 대통령들과는 달리 아이젠하워는 연방정부의 강력한 행정권 발동을 주장하지 않았다.
군 경력과 행정에 대한 제한된 지식 때문에 그는 비서관과 내각의 각료들에게 권한을 대폭 위임하고, 행정부처의 구체적인 실무에는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전 뉴햄프셔 주지사였던 비서실장 셔먼 애덤스는 아이젠하워 행정부 내에서 영향력있는 인물이었다. 애덤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대통령은 나에게 긴급한 업무는 골자만 잘 요약해서 보고하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은 가능한 한 보고하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국내문제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재무장관 조지 M. 험프리도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현대 공화주의'(modern Republicanism)라고 불리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내정책은 세금인하, 균형예산, 경제에 대한 정부통제의 완화, 연방정부 책임의 주정부에의 이양 등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임대차료·임금·물가에 대한 통제정책은 시한이 만료되어 폐지되었고, 1954년에는 소규모의 세제(稅制) 수정이 있었다. 아이젠하워의 재촉을 받아 의회는 간석지의 유전에 대한 소유권을 각 주로 이양했다.
그러나 전임 민주당 정부로부터 물려받은 정책을 급격히 변경하는 일은 없었다. 인구증가(아이젠하워 재임시 1억 5,500만 명에서 1억 7,900만 명으로 증가)와 해외원조로 인해 미국정부는 아이젠하워 행정부 8년 동안 5년이나 예산 적자를 기록했다. 최저임금은 시간당 1달러로 인상되었고, 사회보장제도는 확대되었으며, 1953년 봄에는 보건부·교육부·복지부가 신설되었다.
아이젠하워의 첫 집권기간 동안 공화당의 우파들은 민주당 집권 때보다 더 빈번히 대통령과의 마찰을 일으켰다.
당의 결속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행정부 내의 공산주의적 영향력을 무책임하게 매도하는 조지프 R.매카시의원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을 피했다. 아이젠하워는 사석에서 매카시 의원을 싫어한다고 얘기했지만 때로는 매카시 지지파들의 맹공을 성원하는 듯 보였다. 수백 명에 달하는 연방정부 공무원들이 매카시의 충성-보안계획(loyalty-security program) 때문에 해고되었다.
매카시의 찬성 아래 미의회에서 공산당을 불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미국 공산당). 1954년 봄 5주에 걸쳐 군인사 및 공무원에 대한 매카시의 친공(親共)인사 매도에 대한 청문회가 전국적으로 텔레비전 중계된 뒤 반공(反共) 열풍이 식어가듯이 매카시의 인기도 퇴조했다.
아이젠하워는 외교문제에 크게 신경을 썼다.
그와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는 평화를 성취하고 공산주의의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 집단방위 협정을 구축하는 데 힘썼다. 아이젠하워는 취임직후 한국을 방문했다. 1953년 3월 요시프 스탈린이 죽자 이를 계기로 아이젠하워는 1953년 7월 6·25전쟁의 휴전 협상을 타결할 수 있었다. 그해 12월 그는 전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국제적 기관의 주도 아래 원자력에 대한 정보와 자료들을 한데 모아 공동이용하자고 제의했다. 이 '원자력의 평화적 사용'(Atoms for Peace) 제의는 1957년 62개 국가가 참여하는 가운데 국제원자력기구(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가 결성됨으로써 결실을 맺었다.
1955년 7월 아이젠하워는 제네바에서 정상회담을 개최하여 영국·프랑스·소련의 정상들을 만났다.
미·소 양국이 군사시설을 끊임없이 감시할 수 있게 하는 '오픈 스카이'(open skies) 제의는 세계 여론의 환영을 받았으나 소련에 의해 거부되었다. 1954년 9월 아이젠하워와 덜레스는 동남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 동남아시아 조약기구(SEATO)를 창설했다. 이 기구의 참가국은 미국·프랑스·영국·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필리핀·타이·파키스탄 등이다.
NATO는 1955년 서독이 가입함으로써 그 위상이 한층 강화되었다.
비판가들은 외교분야에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언동(言動)이 일치되지 않는 경우가 빈번했다고 평했다. 미국은 중국 국민당 지도자인 장제스[蔣介石]에게 미국의 원조 없이 장제스 임의로 행동할 수 있는 '재량권'을 주겠다고 위협했다가 태도를 바꾸어 1954년 12월 장 제스의 중국 침공을 금지시키는 방위조약을 타이완과 체결했다.
덜레스는 공산국가의 포로가 된 인민들을 '해방'시키겠다고 공언했으나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동독(1953)과 헝가리(1956)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났을 때 탄압하는 소련의 행위에 항의하는 정도로 그쳤다. 국무장관 덜레스는 공산주의의 침략에 대하여 '대대적인 보복'을 약속했으나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와 호치민 게릴라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에 대한 지원을 재정적·군사적인 면으로 한정시켰다(인도차이나 전쟁).
2번째 임기
1955년 9월 심장발작이 일어나고 1956년 6월 회장염(回腸炎) 수술을 받게 되자 아이젠하워가 2번째 임기를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회복되었고 공화당 전당대회에서는 만장일치로 제1차 투표에서 아이젠하워와 닉슨을 정·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민주당은 애들라이 E.스티븐슨을 다시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테네시 주 상원의원 이스테스 키포버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아이젠하워의 높은 인기 때문에 대통령 선거는 공화당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이것은 1936년 이래 가장 큰 득표차를 기록한 압승이었다. 그러나 민주당은 다시 한번 상원과 하원 모두를 장악했고 1958년에도 역시 양원을 장악했다. 아이젠하워는 의회가 연속 3차례에 걸쳐 야당에 의해 장악되는 상황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한 첫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1956년의 대통령 선거전은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를 강제 접수하여 벌어진 중동사태 때문에 더욱 복잡하게 진행되었다.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은 이집트에 공격을 감행했고 소련은 이집트를 지지하고 나섰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아이젠하워는 1957년 1월 의회에 나가 아이젠하워 독트린의 채택을 강력히 권고했다.
이 독트린은 공산주의의 침략에 맞서 지원을 요청하는 모든 중동 국가들에 미군을 파견하겠다는 약속이다.
1954년 5월 17일 미 대법원이 공립학교에서의 흑인차별이 위헌이라고 판결하자 미 전역, 특히 남부지역에서 논쟁과 폭동이 발생했다. 1957년 9월 고등학교에서의 흑백차별을 철폐하라는 연방법원의 지시를 철회하기 위해 오벌 E.포버스 아칸소 주지사가 취한 조치를 중지시키고자 아이젠하워는 아칸소 주의 리틀록에 1,000명의 연방군을 파견했다.
이 조치는 그의 대통령 임기중 가장 심각한 위기 상황이었다. 여러 번에 걸쳐 아이젠하워는 인종차별에 대한 혐오를 표시했지만 내심 인종통합의 과정은 시간이 걸린다고 보았다. 1957년 민권법은 1875년 이래 통과된 최초의 유사(類似) 법안이었다.
1957년 10월 4일 소련은 지구 주위를 도는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했다.
미국인들은 이같은 소련의 위업에 충격을 받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아이젠하워 정부가 군사비를 계속 삭감하여 우주개발계획을 발전시키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우주개발 연구를 증강하고 과학을 발달시키기 위한 기금 형성 조치가 취해졌다. 1958년 7월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창설되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1957년 가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지속된 경기침체로 또 한번 위기를 겪었다.
아이젠하워는 인플레이션의 촉발을 우려하여 경기부양책인 조세삭감이나 연방지출의 증가를 불허했다.
1959년 덜레스의 사망으로 아이젠하워는 미국 외교정책의 수행에 더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되었다. 1959년 12월 유럽·아프리카·아시아를 순방했고 1960년 2월과 3월에는 남아메리카를 순회했다. 소련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니키타 S.흐루시초프를 미국으로 초청했다.
흐루시초프는 1959년 9월 미국 일부 지역을 순회했고 아이젠하워와 개별 면담을 가졌다. 또다른 미·소 정상회담이 계획되었고 개인외교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는 듯했다. 그러나 1960년 5월 미국의 U-2 정찰기가 소련 영공에서 격추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흐루시초프는 정상회담을 취소하고 화가 나서 아이젠하워에게 제의했던 소련방문을 철회했다. 아이젠하워는 정찰비행이 4년간 계속되었음을 시인하고, 시의 적절지 못했던 사태에 대해 대부분의 책임을 졌다. 1961년 1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임기 만료 수주 전에 미국은 2년 동안 피델 카스트로의 지배하에 있던 쿠바와 국교를 단절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많은 비판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이젠하워는 미국인들에게 놀라울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가 대통령직을 물러나자 의회는 그에게 군의 원수 계급을 다시 회복시켜주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주 게티즈버그에 있는 농장으로 은퇴하여 회고록을 집필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1963년에 〈변화를 바라는 국민의 열망 Mandate For Change〉, 1965년에 〈평화의 유지 Waging Peace〉를 발간했다. 이보다 가벼운 내용의 저작으로 〈친구들에게 털어놓고 하는 얘기 At Ease:Stories I Tell to Friends〉가 1967년에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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