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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노가 사망했을 때 히포는 반달족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고, 아프리카의 로마 문명은 막을 내리고 있었다. 수년 후 레랭의 빈켄티우스는 가톨릭 교회의 정통성을 가리켜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있고, 누구나 믿는 것'(Quod ubique quod semper quod ab omnibus creditum est)이라는 유명한 구절로 표현했다. 가톨릭 교회를 그처럼 정의한 데에는 아우구스티노의 학설 가운데 들어 있는 좀더 터무니없는 주장들을 배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렇지만 빈켄티우스는 감히 아우구스티노를 이단적이라고 하지는 못했다. 아무튼 아우구스티노의 학설 속에 끼여 있는 좀 터무니없는 주장들은 그의 권위 때문에 신학적으로 해로운 유산이 되었음은 사실이다. 그런 문제가 있지만 그가 그리스도교 사상에 끼친 엄청난 영향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의 사상은 서방 그리스도교를 하나로 묶어왔고 언젠가는 현재의 분열을 치유할 것이다. 그처럼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원인은 명쾌하고 심오한 그의 지성이나, 신비스럽기까지한 그의 품행이나, 거대한 학문체계보다는 그의 독특한 종교적 천재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캔터베리의 성 안셀모,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B. 파스칼, 자크 베닌 보쉬에, 조지프 버틀러, 자크 마리탱, 라인홀드 니부어, 파울 틸리히 이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아우구스티노에게 큰 영감을 받았다. 그들은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문제의 핵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참된 철학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이다"(Verus philosophus est amator Dei)라는 것이다. 〈신국〉에 들어 있는 이 말을 통해 그는 가장 훌륭한 자기 초상화를 남겼으며, 그의 저술들을 그보다 더 정확하게 평가하는 말도 없을 것이다. 중세 초기부터 그는 교회 학자로 존경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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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아우구스티노의 영향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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