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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현재 알제리 해안의 현대식 항구인 히포레기우스는 당시에는 로마의 속주 누미디아에 속해 있었다.
아우구스티노는 거기서 약 72km 떨어진 타가스테(지금의 수크아라스)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가정은 중산층이었다.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말년까지 이교도로 남아 있었다. 어머니 모니카는 열성적이고 경건한 그리스도교도였다. 어린시절 어머니의 교육으로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해 경외심을 품었고 그 영향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유아세례는 받지 않았다. 초·중등학교를 거치면서 아우구스티노가 지적인 재능을 보이자 가족들은 학비를 마련해 공무원을 시키려고 했다.
19세 때 카르타고에서 학생이 된 그는 지금은 유실된 키케로의 글 〈호르텐시우스 Hortensius〉를 읽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그때부터 그는 '철학'에 대한 정열로 가득 찼다. 그것은 단순히 진리를 추구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속적인 야망보다 명상하는 삶을 더 낫게 여겼다는 뜻이다. 그의 눈에 비친 가톨릭 교회의 신앙은 문화인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비철학적이었다. 그래서 어느날 마니교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권위보다 이성에 호소하는 마니교에 쉽게 심취했다.
마니교의 영향
서로마 제국에 퍼져 있던 마니교는 유물론적 이원론이었다.
세상을 빛과 어둠의 투쟁의 산물로 보고 인간의 영을 어둠 속에 있는 빛의 요소로 보았다. 마니교는 스스로 참된 그리스도교라고 주장하며, 그리스도를 옥에 갇힌 자녀들을 탈출시켜 본향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해방자로 보았다. 마니교회에서 '선택된' 고위 성직자들은 철저히 금욕적이고 독신이었다. 육적인 것은 모두 어둠의 세력에 봉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노는 마니교에 9년간 몸담고 있으면서 천한 집안 출신의 여자와 교제하여 아들을 얻었고 그 아들을 몹시 아꼈다. 그러는 동안 '청자'(聽者)라는 낮은 직책을 마니교에서 얻었는데, 그 직책에는 육신의 약함이 인정되어 결혼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이 '계몽의 종교'에 대한 아우구스티노의 열정은 오래 가지 못했다. 마니교 지도자들의 지적 수준이 낮아 아우구스티노의 물음에 대해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점차 환멸을 느낀 그는 꽤 널리 퍼졌던 반(反)영지주의를 수용했다. 그리하여 28세경 그동안 자유교사로 수사학을 가르치던 카르타고를 떠나 더 나은 학생을 찾아 로마로 갔다.
친분관계를 통해 그는 당시 서로마 황제가 머물고 있던 밀라노에서 정식 교수로 일할 수 있었다.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오는 당대에 가장 뛰어난 그리스도교 성직자였다. 아우구스티노는 암브로시오를 소개받았으나 가까이 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는 암브로시오의 설교를 들으러 갔고 거기서 그리스도교 지성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암브로시오의 설교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아우구스티노의 편견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그가 마니교를 버리기는 했지만 그때까지 유물론적 전제들이 남아 있어, 궁극적 실재에 대한 마니교의 교리를 대체할 만한 답을 발견하지 못한 채 회의에 빠져 있었다. 그리하여 설교를 들은 후에도 하느님의 존재, 죄의 본성과 기원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었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신플라톤주의의 저술을 접하면서 그 2가지 문제가 동시에 풀렸다.
아우구스티노는 암브로시오의 설교를 통해 신플라톤주의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해지게 되었다. 3세기의 철학자이자 신비주의자인 플로티노스에게서 비롯된 신플라톤주의는 오직 하나의 실체만 인정하는 영적 일원론이다. 그에 따르면 이 세상은 절대 단일체로부터 일련의 유출과정을 거쳐 이룩되었다고 한다. 초월적인 일자(一者)에게서 자의식을 가진 정신이 나온다.
그리고 그 정신으로부터 영혼 또는 생명이 나온다. 영혼은 정신과 육감 사이에 있는 매개물이다. 물질은 일자의 가장 낮은, 최후의 산물이다. 한편 일자는 실재이면서 선이기 때문에 악의 잠재성이란 결국 일자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물질이되 무형의 물질과 같은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악이란 모든 사물의 최소한의 가능성이요, 선의 결핍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신플라톤 신비주의에는 내면이 외부보다 우월하다는 원칙이 있었다. 그러므로 선에 이르려면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궁극적 실재에 도달하는 정신은 인간의 가장 깊은 자아의 중심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고백론〉 제7권을 보면 아우구스티노가 그같은 내면화를 거쳐 하느님을 발견한 대목이 나온다.
내재적이며 동시에 초월적인, '변하지 않는 빛'인 하느님은 우리의 직관을 통해 진리와 선을 알려주는 근원이다. 그러한 하느님의 발견은 합리적인 추리의 결론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비적인 체험이요, 환상이며, 왔다가 사라지는 접촉이었다. 하느님의 발견으로 아우구스티노의 오랜 의문이 풀렸다. 하느님은 빛이며 악은 어둠이다. 그것은 마니교에서 말한 바와 같지만 어떤 것도 물질은 아니다. 하느님의 영원한 빛은 순수하게 정신적(영적) 실체이며, 어둠이 실체가 아니라 빛의 결핍이듯이 악은 실체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로 회심
아우구스티노의 신비체험, 하느님에 대한 경험은 순간적인 것으로 쉽게 사라졌다.
그는 자기가 최고가치를 정신(영적인 것)에 두지 않고 아직 육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사실 신플라톤주의는 마니교의 원칙을 더 강화하고 있었는데, 하느님에게 돌아가려면 육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노에게는 우선 성적인 욕망에서 즉각 떠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고백록〉 제8권에 나오는 유명한 회심 이야기는 어떻게 그가 동서의 그리스도교 금욕주의를 시행했는지, 어느 정도 그가 자기의 육체적 연약함 때문에 스스로를 경멸했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의 육체적 저항은 마침내 밀라노의 정원에서 끝났다. '집어 읽으라'(tolle, lege)는 어린아이의 소리에 그는 〈신약성서〉를 펼쳐 바울로의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로마 13:14).
386년 늦여름의 일이었다.
방학이 가까웠으므로 그는 학교를 떠나 그의 제자들, 아들 아데오다투스, 어머니 모니카와 함께 시골로 내려가 친구에게 빌린 집에서 독서회를 가졌다. 거기서 행한 문학수업과 철학토론에서 현존하는 아우구스티노의 최초의 저술들이 나왔다. 그것은 주로 대화들로서 종교적 회심에 대한 강조가 별로 없고 그리스도교적인 주제도 별로 다루지 않고 있다. 그때문에 훨씬 후에 씌어진 〈고백록〉의 정확성에 대한 의문이 학자들 사이에 많이 제기되었다. 성적 본능에 대한 아우구스티노의 투쟁이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결심한 '철학적 삶'의 최종 국면이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387년 봄, 그가 암브로시오에게 세례를 받을 때 이미 그리스도교도였음을 부인할 이유는 없다. 물론 3, 4년 후 〈참된 종교 De Vera religione〉를 쓸 때까지도 그는 그리스도교를 신플라톤 철학으로 푼 것이 사실이다. 〈참된 종교〉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말씀(로고스)은 플로티노스의 정신과 같으며, 인간의 이성을 비추고 인간으로 하여금 초월자 하느님에게 도달하도록 한다.
또 그리스도의 인간적 삶은 육적인 고통과 쾌락을 이겨낸 금욕의 표본으로 그려졌다. 그리스도교의 도덕은 영혼을 맑게 하여 관조의 삶에 이바지한다고 생각했고, 훈련을 위해 교회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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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아우구스티노의 어린시절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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