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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투스파 논쟁이 끝나기 전부터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서방교회의 전통적인 죄론과 구원론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펠라기우스는 그리스도교의 도덕이 느슨해지는 데 반발하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의 연약함을 이유로 실패에 대해 변명하자 펠라기우스는 하느님이 누구에게나 동일한 자유를 주어 선을 선택하고 완성할 수 있게 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하느님이 금지한 행위, 피할 자유가 있었던 그런 행위를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 죄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만일 그러한 자유가 없다면 하느님의 심판과 보상이 정당하지 않다고 보았다.
이처럼 그리스도교를 냉엄한 도덕주의로 환원했기 때문에 펠라기우스주의는 교회의 평범한 성사나 전례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는 세례를 베풀어 '죄를 씻어왔고', 유아도 아담의 죄를 이어받았다고 하여 세례를 주었다. 바울로의 가르침에 따르면 아담의 범죄가 인류 전체에게 사망을 가져왔다고 했기 때문이다. 원죄의 교리는 아우구스티노 이전에 이미 서방교회의 확고한 교리로 뿌리를 내렸다. 따라서 펠라기우스의 제자 켈레스티우스가 공개적으로 원죄를 부인했을 때, 펠라기우스주의는 이단으로 단죄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가 발을 빼자 교황 조시모(417~418 재위)는 전임자 인노첸시오 1세가 내린 단죄를 번복했다. 그러다가 418년 봄, 아프리카의 주교들이 이단자를 추방하는 칙령을 황제 호노리우스로부터 얻어내자 조시모는 거기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우구스티노는 교회를 위한 투혼으로 가득 찼다.
그는 펠라기우스주의가 단지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반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치명적으로 오해하고 있음을 즉시 알아차렸다. 사람이 자기 노력으로 의로움을 얻는다는 것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그리스도교의 기본 진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논쟁이 있기 전에 아우구스티노는 원죄와 은총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작업을 했다.
물론 합리적 설명을 교회가 완전히 받아들인 적은 없다. 아무튼 그는 원죄를 믿는 교회 전통을 받아들였다. 원죄는 아담이 지은 죄의 결과인데, 아담의 죄란 창조 질서 속에서 인간이 자기 위치를 지키지 않으려 한 것이다. 그결과 인간 자신의 질서마저 혼란하게 되어 육이 영에 대적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노는 주장하기를, 모든 사람이 아담의 죄와 벌에 참여하고 있는데, 그것은 성교를 통해 출생한 점에서 분명하다고 했다.
성적 충동이란 영이 육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노 말년에 에클라눔의 펠라기우스주의자 주교 율리아누스가 치명타를 가한 것이 바로 원죄를 성교와 연결시킨 부분이다. 그는 인간의 피조된 본성에 속하는 본능은 도덕적으로 중립이라는 대담한 주장을 했다. 그는 아우구스티노가 마니교로 되돌아갔다고 공격하면서 싸워 이겨야 할 충동을 아우구스티노가 악으로 만들고 말았다고 했다. 아우구스티노는 사랑의 질서가 파괴된 데서 인간타락의 의미를 찾았다.
하느님의 사랑에서 떠나 인간은 자기사랑을 추구하고 자기보다 낮은 것에 예속되었다. 인간은 자기 행위로 타락했으며 자기의지로는 타락의 결과를 돌이킬 수 없다. 영이 육에 예속되었으므로 인간은 노예이며, 그러한 노예의지는 구원 자체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 필요한 것은 무게중심을 뒤집는 일이다. 밑으로 내려가는 사랑을 위로 올라가는 사랑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은 죄인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것이 강생과 성령 강림의 복음이라는 것이다.
한편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다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보기에 옳다고 생각되는 것을 행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도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 속에서 도덕적인 빛을 필요한 대로 모두 얻었다고 했다. 아우구스티노는 펠라기우스의 주장, 즉 자유를 타고난 것으로 보는 관점이나 환경에 관계없이 선택할 수 있는 절대적 힘으로 보는 관점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도덕적인 행위도 그 행위자의 상황에 따라 많이 좌우됨을 지적하면서, 똑같은 행위를 했어도 주체가 누군지, 어떤 목적으로 했는지, 어떤 감정으로 했는지 따위가 고려되어야 한다고 했다. 게다가 의지의 움직임은 지식뿐 아니라 감정에도 좌우된다고 하면서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옳은 일을 하지 않는다. 무엇이 옳은지 몰라서 그렇기도 하고 옳은 일이 달갑지 않아 그렇기도 하다.
그런데 몰랐던 것은 알게 될 수 있으나 달갑지 않은 것이 달갑게 되지는 않는다. 그렇게 되려면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다"(〈죄의 용서 De peccatorum meritis et remissione〉)
옳은 것을 기뻐하는 마음 없이는 좋은 일을 하는 데 참자유가 없고 노예처럼 율법에 끌려다닌다. 이것이 아우구스티노의 주장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자유이다. 그리스도교도의 삶의 동기가 되는 그 하느님의 사랑은 바울로가 말한 대로 성령의 은총으로 인간 안에 들어간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노는 성령의 선물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완전히 자유로운 것으로 보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은총에 인간의 완전한 자유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인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하느님이 일으킨 것 아니면 사람이 일으킨 것이라는 생각에서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의 선한 행위를 오직 하느님 때문이라고 보게 되었다. 한편 주교 재임 첫해에 아우구스티노는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9~11장을 연구한 결과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도 어떤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영원한 뜻을 바꿀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하느님의 선택은 창조 전에 정해졌다. 성령이 어떤 특별한 상태로 주어질 때 한 개인이 어떻게 응답할지 하느님은 알고 있다. 시간의 흐름과는 별개로 알고 있다. 그래서 오직 선택된 자만이 은총을 받아들인다.
펠라기우스의 도전에 부딪혀서도 아우구스티노는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 논쟁하는 동안에 썼던 걸작 〈신국론〉에서 보이지 않는 두 사회, 곧 선택된 사회와 저주받은 사회의 '처음과 중간과 나중'을 장엄하게 그려냈다.
작품의 구상은 410년 서고트족이 로마를 점령하여 제국을 뒤흔들어놓기 전부터 그의 마음 속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신국론〉은 로마의 재앙이 옛 종교를 버렸기 때문에 받는 벌이라는 이교도들의 주장에 대해 그리스도교를 옹호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두 도시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교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이교도나 세속사회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다. 두 도시는 천사들의 타락 이후 하느님의 창조질서 속에서 서로 경합하고 있는 2개의 영적인 힘을 상징하고 있다. 하나는 신앙이고 하나는 불신이다.
그것은 '자기를 사랑하고 하느님을 미워하느냐, 아니면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미워하느냐'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 2개의 힘 가운데 어떤 것도 이 세상에 순수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는 하늘의 도성과 땅의 도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만일 〈신국론〉에 역사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적인 예정론 철학이 될 것이다.
노년에 아우구스티노는 자기 학설이 몇몇 제자들에게 이해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아우구스티노가 도덕적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들었고, 칭찬이나 비난을 모두 근거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후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마지막 논문에서 예정론을 논리적으로 밀고 나가 잔인한 결론에 도달했다. 마지막으로 손질된 그의 학설이 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가장 예리한 사상가라고 할 수 있는 스콜라 학파의 토마스 아퀴나스나 종교개혁자 칼뱅의 작품에 그대로 재등장했다.
그의 작품은 진실로 이 세상에 얽매인 인간이 하느님의 영원한 눈으로 세상 존재를 관조한, 과감한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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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이단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한 아우구스티노의 투쟁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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