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요약
18, 19세기에 지금의 가나 남부를 차지했던 서아프리카의 국가.
Asante라고도 씀.
서쪽으로는 코모에 강, 동쪽으로는 토고 산맥에 이르렀으며, 18세기에 활발히 노예무역을 벌였다.
19세기에 들어와 영국에 의해 점령당했다. 아샨티인들은 종주국인 덴키에라 및 이웃의 다른 소(小)국가들과 투쟁을 벌였으나 1670년대 오세이 투투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는 별로 진전을 보지 못했다. 오세이 투투는 여러 차례의 군사 작전을 벌여 반대세력을 분쇄한 뒤 새로운 아샨티 국가의 왕(Asantehene)이 되어 쿠마시에 수도를 정했다. 그는 '황금 옥좌'(sika'dwa)로 자신의 권위를 나타냈고, 그뒤 모든 왕들이 이 옥좌에서 왕위에 올랐다.
18세기초부터 아샨티인들은 해안을 통해 영국과 네덜란드의 무역상들에게 노예를 공급하고, 그 대가로 무기를 받아 영토를 확장하는 데 사용했다(노예무역). 오세이 투투가 1712(또는 1717)년 죽은 뒤 오포쿠 와레(1720경~50 재위)가 왕위에 오르면서 국내의 혼란과 분파 간의 투쟁이 끝났다.
그는 통치기간동안 아샨티의 내정을 완벽할 정도로 정비했다. 이후의 오세이 크와도(1764~77 재위), 오세이 크와메(1777~1801경 재위), 오세이 본수(1801경~24 재위)와 같은 왕들은 능력에 따라 관리로 임명하는 효율적인 관료제와 훌륭한 통신 체계를 가진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확립했다.
1807년 오세이 본수는 케이프코스트의 영국군 사령부를 둘러싸고 있는 고립지대인 판티 남부 지역을 점령했고, 같은 해 영국은 노예 무역을 법으로 금지했다.
영국인들과는 교역량의 감소와 판티 지역에 대한 분쟁으로 그뒤 10년간 마찰을 빚었으며, 1820년대에는 전쟁을 벌였다. 아샨티는 1824년 영국군을 격파했으나 1831년 평화 조약을 맺고 그뒤 30년간 평화를 유지했다. 1863년 크와쿠 두아(1834~67 재위) 시대에 들어와 아샨티는 다시 한번 영국인들에게 도전했고 해안지방을 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1869년 영국군은 아샨티가 영유권을 주장했던 지역인 엘미나를 점령했으며, 1874년에는 가넷 울즐리 경이 이끄는 원정군이 수도 쿠마시까지 진군해 들어왔다. 울즐리는 겨우 하루 동안 수도를 점령했을 뿐이지만, 아샨티인들은 군사력의 열세와 통신체계의 낙후를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영국군의 침입을 틈타 북부 지방에서 분리를 주장하는 폭동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영국인들은 1874년말 옛 남부지방들을 모아 '황금 해안 식민지'를 공식적으로 구성했다. 뒤이어 아샨티의 왕인 코피 카리카리는 퇴위하고 멘사 본수(1874~83 재위)가 권좌에 올랐다.
그는 아샨티의 정부 조직들을 새로운 상황에 적응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군대를 정비하고 유럽인들을 고위 직책에 임명하는 한편 국부를 늘렸다. 그러나 친영파(親英派)들이 분리를 주장하는 북부의 족장들과 정부 반대 세력을 지원했기 때문에, 멘사 본수는 아샨티 제국의 옛 권력을 다시 회복하지는 못했다. 그의 계승자인 프렘페 1세(1888 즉위) 때에도 제국은 쇠퇴를 거듭했고 프렘페 1세의 통치기간중인 1902년 1월 1일 아샨티는 공식적으로 영국의 직할 식민지로 선포되었다.
북부 지방도 같은 날 따로 분리되어 '황금 해안 북부 지역 보호령'을 구성했다. 1930년대에 영국의 통치하에서 아샨티 연방의회가 발족되었으며, 옛 국왕이 명목상의 통치자로서 왕위에 복귀했다.→ 아칸 제국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세계사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