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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의 임시정부 활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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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申采浩)

한국의 독립운동가

ⓒ Dalgial/wikipedia | Public Domain

1918년 12월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되자, 국외 독립운동지도자 39명의 명의로 발표된 '무오독립선언'에 참여했다.

대한독립선언서

ⓒ Ryuch / Wikipedia | Public Domain

3·1운동이 일어난 뒤 서울의 한성정부, 만주의 대한국민의회와 함께 4월 상하이에서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고, 서울에서 발표된 한성정부에서도 평정관에 선임되었다. 이들 여러 정부를 통합한 상해 임시정부의 제1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이승만의 대통령지명에 대해 그의 위임통치청원 사실을 들어 반대했다. 그해 4월 제2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정식의원으로 선출되고, 7월 제5회 전원위원회에서 위원장을 맡았으나 초기부터 이승만의 외교노선에 반대하면서 위임통치안을 철저히 규명할 것을 주장하다가 관철되지 않자 사퇴했다. 이어 임시정부에서 〈독립신문〉을 발간하자 10월에 임시정부의 외교론과 준비론을 비판하고 무력투쟁을 전제로 한 실천적 독립운동을 주창하며 발간된 〈신대한 新大韓〉의 주필이 되었다. 〈신대한〉이 일제와 임시정부의 방해로 휴간되자 1920년 9월 박용만·신숙 등과 만주의 독립군 단체를 통합하여 효율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하고자 군사통일촉진회를 발기했지만 당시 독립군 활동이 일제의 만주토벌에 따라 침체에 빠져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베이징에서 보합단의 조직에 참여하여 내임장(內任長)에 추대되었다. 1921년 1월 김창숙과 함께 시사논설과 한국사론을 다루는 한문잡지 〈천고 天鼓〉를 발간했다. 그해 4월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인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 사실을 규탄하는 〈성토문〉을 기초하여 김창숙·장건상 등 54명의 서명을 받아 발표한 것을 계기로 상해 임시정부와 완전히 결별하고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해갔다. 1921년 4월 베이징에서 군사통일회의준비회를 열고 임시정부에 이승만의 불신임과 임정의 해체를 주장하는 통첩을 발송했다. 5월 군사통일회의에서 결의된 국민대표회의 결성을 위해서 김정묵(金正默)·박봉래(朴鳳來)와 함께 통일책진회(統一策進會)를 발기했다. 이들의 주장이 여운형·안창호 등의 호응을 받아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었고 그는 창조파로 활약했다.

이승만(李承晩)

대한민국 1,2,3대 대통령이자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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