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신채호의 망명활동기

다른 표기 언어
신채호(申采浩)

한국의 독립운동가

ⓒ Dalgial/wikipedia | Public Domain

1910년에 들어 일제의 한일합병 정책이 노골화되어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국외의 독립운동기지 구축을 계획한 신민회의 결의에 따라 4월 안창호·이갑 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산둥[山東] 반도의 칭다오[靑島]에서 열린 신민회의 '청도회의'에 참가했다. 회의는 북만주지역에서 토지를 개간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것을 결의했다. 이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해조신문 海潮新聞〉의 후신인 〈대동공보 大東共報〉에 관여한 후 〈청구신문 靑丘新聞〉도 발행했다.

1911년 윤세복(尹世復)·이동휘·이갑 등과 함께 조직한 광복회의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같은 해 12월 권업회의 기관지로서 교민들의 산업진흥과 민족의식의 고양, 그리고 교민 사이의 대립을 해소시키고자 했던 〈권업신문〉이 창간되자 주필이 되었다.

1913년 신규식의 주선으로 상하이[上海]의 교민단체인 동제사에 참여하고 이무렵 신규식·문일평·박은식·정인보·조소앙 등과 함께 한국청년교육을 위한 박달학원을 세웠다. 1914년 대종교 관계자인 윤세용(尹世茸)·윤세복 형제의 초청으로 만주 펑톈 성[奉天省] 화이런 현[懷仁縣]으로 가 동창학교(東昌學校) 교사로 있으면서 〈조선사〉 집필에 착수했다. 그리고 장차 독립군 양성도 꾀할 겸 백두산에 오르고, 남만주 일대의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를 돌아보고 광개토왕릉을 답사하기도 했다.

1915년 3월 이상설·신규식·박은식 등과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에서의 한중합작을 도모하는 한편 효율적인 독립투쟁을 위해서 신한혁명단을 조직해 대규모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했으나 일단의 동지가 검거되고 국제정세가 여의치 않아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1916년 베이징[北京]에서 사담체(史談體)의 자전적 중편소설 〈꿈하늘〉을 집필했다. 그해 8월 대종교 교주인 나철(羅喆)이 죽자 통분하여 〈도제사언문 悼祭四言文〉을 지었다. 1918년경 베이징의 푸퉈옌[普陀庵]에 머무르며 〈조선사〉를 집필하면서 〈중화바오 中華報〉·〈베이징르바오 北京日報〉에 논설을 기고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Daum백과] 신채호의 망명활동기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