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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새로운 내용과 기법으로 창작된 춤, 또는 1920년대 이후 새롭게 창작된 한국 춤.
신무용이라는 말이 처음 쓰인 것은 1926년 3월경 경성공회당에서 공연된 일본의 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춤을 신무용이라 부른 데서 시작되었다.
원래 이 말은 1904년 〈신악국론 新樂菊論〉을 통해 스보우치 소요[坪內]가 일본춤의 개혁을 주장하면서 전통적인 일본춤을 바탕에 둔 근대적 창작춤 조류를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한국에서 신무용은 일본의 신무용을 수용한 데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춤). 당시 한국에 소개된 일본의 무용가 가운데 신무용가의 범주에 둘 만한 사람은 이시이와 후지마[藤間艇枝]였다. 이시이는 서양춤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춤을 추구했으며, 후지마는 전통춤을 바탕으로 새로운 춤을 추구했다.
일본에서는 이들의 무용을 구별하여 이시이의 춤은 '신흥무용'이라 했고 후지마의 춤은 '신무용'이라 했다. 즉 일본의 신무용에는 2가지 흐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신무용이 받아들여질 당시에는 신무용과 신흥무용에 대한 구분이 없었으며 또 신무용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초기에 신무용은 한국에서 창작된 새로운 춤 전반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8·15해방 이후에는 한국무용·현대무용·발레 등으로 춤의 장르가 구분되면서 한국 현대무용 초기의 형태로 받아들여졌다.
형성과정
신무용은 본래 극장무대에서 관람형태로 진행되는 춤양식으로 수용되었기 때문에 공간적인 면이나 춤사위에서 전통적인 춤 형식과는 다르다.
이런 형식적인 변화 외에도 창작의 근원이 되는 근대적 의식이 도입되면서 춤 내용도 변화되었다.
신무용의 기초는 1921년부터 블라디보스토크의 조선학생음악단 일행의 조국 방문 공연 때 러시아 춤인 '고팍춤'을 선보인 데서 시작되었다. 그후 배구자의 레뷰 공연, 1923년부터 서울의 예술학원에서 주최한 무도음악회, 1924년의 러시아인 음악무도회는 새로운 춤으로써 신문화의 충격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러한 행사에서 공연된 춤은 오락적 속성과 예술적 속성을 뚜렷하게 구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펼쳐졌다.
게다가 음악행사와 함께 공연되었기 때문에 춤의 신문화적 모습을 본격적으로 전달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시이 바쿠의 공연은 이러한 공연과는 완전히 구분되는 것이었고 그후 배구자·최승희·조택원 등이 신무용이 뿌리를 내리는 데 신기원을 열었다 할 수 있다.
배구자는 일본의 악극단에서 탈퇴하고 1928년 4월 독자적인 음악무용회 〈아리랑〉은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신무용의 시도로 간주된다. 또 1929년 개설된 '배구자무용연구소'는 한국에서 민간 무용연구소의 효시였다. 최승희는 1929년 이시이 바쿠와 예술관의 차이로 결별하고 귀국한 뒤 '최승희무용연구소'를 개설하고 1930년 경성공회당에서 '최승희무용연구소 창작무용 제1회 공연회'를 열었다.
이 공연은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독자적인 춤 공연이라는 역사적인 의의와 최승희 개인에게 쏠린 관심으로 관객들의 열기가 높았다. 최승희는 이 공연을 계기로 '조선무용의 재창조'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여러 차례 발표회를 가졌으나 창작여건이 어렵게 되자 1932년 다시 이시이 바쿠에게 돌아갔다. 그 뒤로 한국·일본·만주 등지에서 여러 차례 공연을 가졌으며 8·15해방 때까지 전통춤의 고유성을 살리면서 새롭게 예술화하는 작업을 했다. 그녀는 민족주의와 국제주의를 조화시켜 신무용을 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조택원은 1932년 '조택원무용연구소'를 개설하고 춤 교육자로 활동했고 한국적 서정성을 간직한 춤을 창작했다. 고수였던 한성준은 1930년 '조선음악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배구자·최승희·조택원과는 달리 민속춤의 기법을 정리하여 한국적인 춤의 실체를 보존·보급했다. 1930년대에는 이들 외에도 몇몇 무용가들이 등장했으나 대체로 이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8·15해방 후 무용극의 창출이 신무용의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었고, 현대무용·발레라는 용어와 구별하기 위해 신무용을 창작무용이라 불렀다. 1960년대 이후 한국무용계가 활발해지자 송범·김백봉 등은 민속무용을 예술무용으로 끌어올리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평가
이시이 바쿠의 공연은 한국에 신무용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후 춤에 대한 용어도 무도(舞蹈)보다는 무용·무용시(舞踊詩)·신무용이 주도하게 되었고 사람들의 춤에 대한 개념도 변화했다.
원래 이시이 바쿠는 무용시를 추구했는데 신무용이 태동할 때 한국에서는 이를 예술춤으로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한국의 무용은 신무용의 출발 이후부터 예술춤으로서의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신무용은 춤의 무대화를 지향하면서 그에 필수적인 춤 방법론을 정립하지 못해 전통적인 춤 양식을 수정하는 선에서 머물렀다.
신무용이 기존의 전통적 문화예술을 검증하기보다는 신문화의 충격과 도시화에 따른 새로운 필요성을 수용하는 데서 시작되었고 아울러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상황이 이를 가속화시켰다. 신무용은 기존 양식과 다른 새로운 양식을 지향하고 전문예술인으로서 무용가상과 창작·발표·관람의 양식을 추구한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한국전통춤·서양전통춤·현대춤 등에 대한 이론이 정리되지 않아 근대적인 예술춤에 필수적인 근대의식 및 전위성을 춤과 접목시키는 데 이르지 못했다.
특히 대부분의 신무용이 유미주의적 성향을 짙게 드러낸 사실은 이시이 바쿠의 무용시를 고답적으로 수용하고 근대의식을 개인주의에 국한시킨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와 함께 신무용이 춤의 대명사로 통용되면서 기방춤의 개념으로 격하되었고, 집단 공동체의 생활춤이나 마을춤은 배후로 밀려나 춤의 기능은 극장춤에 국한되었다. 춤과 사회 생활과의 괴리는 신무용시대에 큰 문제였다.→ 한국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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