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신무용은 본래 극장무대에서 관람형태로 진행되는 춤양식으로 수용되었기 때문에 공간적인 면이나 춤사위에서 전통적인 춤 형식과는 다르다.
이런 형식적인 변화 외에도 창작의 근원이 되는 근대적 의식이 도입되면서 춤 내용도 변화되었다.
신무용의 기초는 1921년부터 블라디보스토크의 조선학생음악단 일행의 조국 방문 공연 때 러시아 춤인 '고팍춤'을 선보인 데서 시작되었다. 그후 배구자의 레뷰 공연, 1923년부터 서울의 예술학원에서 주최한 무도음악회, 1924년의 러시아인 음악무도회는 새로운 춤으로써 신문화의 충격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러한 행사에서 공연된 춤은 오락적 속성과 예술적 속성을 뚜렷하게 구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펼쳐졌다.
게다가 음악행사와 함께 공연되었기 때문에 춤의 신문화적 모습을 본격적으로 전달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시이 바쿠의 공연은 이러한 공연과는 완전히 구분되는 것이었고 그후 배구자·최승희·조택원 등이 신무용이 뿌리를 내리는 데 신기원을 열었다 할 수 있다.
배구자는 일본의 악극단에서 탈퇴하고 1928년 4월 독자적인 음악무용회 〈아리랑〉은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신무용의 시도로 간주된다. 또 1929년 개설된 '배구자무용연구소'는 한국에서 민간 무용연구소의 효시였다. 최승희는 1929년 이시이 바쿠와 예술관의 차이로 결별하고 귀국한 뒤 '최승희무용연구소'를 개설하고 1930년 경성공회당에서 '최승희무용연구소 창작무용 제1회 공연회'를 열었다.
이 공연은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독자적인 춤 공연이라는 역사적인 의의와 최승희 개인에게 쏠린 관심으로 관객들의 열기가 높았다. 최승희는 이 공연을 계기로 '조선무용의 재창조'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여러 차례 발표회를 가졌으나 창작여건이 어렵게 되자 1932년 다시 이시이 바쿠에게 돌아갔다. 그 뒤로 한국·일본·만주 등지에서 여러 차례 공연을 가졌으며 8·15해방 때까지 전통춤의 고유성을 살리면서 새롭게 예술화하는 작업을 했다. 그녀는 민족주의와 국제주의를 조화시켜 신무용을 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조택원은 1932년 '조택원무용연구소'를 개설하고 춤 교육자로 활동했고 한국적 서정성을 간직한 춤을 창작했다. 고수였던 한성준은 1930년 '조선음악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배구자·최승희·조택원과는 달리 민속춤의 기법을 정리하여 한국적인 춤의 실체를 보존·보급했다. 1930년대에는 이들 외에도 몇몇 무용가들이 등장했으나 대체로 이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8·15해방 후 무용극의 창출이 신무용의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었고, 현대무용·발레라는 용어와 구별하기 위해 신무용을 창작무용이라 불렀다. 1960년대 이후 한국무용계가 활발해지자 송범·김백봉 등은 민속무용을 예술무용으로 끌어올리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외국무용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