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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81. 6. 9, 잉글랜드 노섬벌랜드 월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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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48. 8. 12, 더비셔 체스터필드 |
국적 | 영국 |
요약 영국의 공학자, 증기기관차 발명가.
그는 뉴캐슬어폰타인의 탄광에서 석탄을 끌어올리는 뉴커먼 대기압 증기기관을 조작하는 기계공의 아들로 태어나 정규 학교교육을 받지 않고 어릴 때부터 일을 했는데, 19세 때는 뉴커먼 기관을 운전했다.
그후 나폴레옹 전쟁 소식으로 호기심이 생긴 그는 야간학교에 등록을 하고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곧 결혼을 했으며 돈을 더 벌기 위해, 후에 윌리엄 페어베언 경이 된 기계공 동료로 하여금 그의 기관차를 시간제로 운전하게 하면서 자신은 구두를 수선하고 시계를 고쳤으며, 광부의 아내들을 대상으로 옷을 수선해주었다.
그러나 증기기관에 대한 천재성으로 인해 그는 곧 킬링워스 탄광의 수석 기계공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의 첫번째 아내는 어린 아들 로버트를 남겨둔 채 사망했으며, 그는 아들에게 수학을 가르치기 위해 뉴캐슬에 있는 학교로 보냈다. 그는 아들이 집에 돌아오는 밤마다 아들과 함께 숙제도 하고 배우기도 했다. 1813년 그는 광산에서 석탄을 밖으로 수송하기 위해 존 블렌킨솝이 제작한 '바퀴 달린 증기 보일러'를 조사할 목적으로 이웃 탄광을 방문했다. 이 무거운 기계가 매끄러운 목재 레일에서 견인될 수 없다고 믿은 블렝킨솝은 톱니가 달린 제3의 레일 위로 달리는 래칫 바퀴를 증기 보일러에 부착시켰지만 자주 고장을 일으켰다.
스티븐슨은 자신이 이것을 개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킬링워스의 실질적인 소유주인 레이븐스워스와 상의한 다음, 30t의 석탄을 1시간에 6㎞ 운반할 수 있고 8개의 무개화차(無蓋火車)를 견인하는 기관차 '블루처'를 제작했다. 이것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해서 그는 기관차의 출력을 향상시키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래서 배기 증기의 방향을 굴뚝 위로 다시 바뀌게 하여 공기를 끌어당김으로써 통풍량을 증대시키는 '증기분사'를 도입했다. 이 새로운 설계방식으로 기관차는 진정한 의미에서 실용적이 되었다.
그뒤 몇 년 동안 킬링워스와 다른 탄광용으로 여러 대의 기관차를 제작했고, 광산용 안전등을 개발해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1821년 그는 풍부한 석탄이 매장된 광맥을 개발하기 위해 스톡턴에서 달링턴까지 역마용 철로가 건설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달링턴에서 그는 이 계획의 책임자인 에드워드 피스를 만났으며, 그에게 강한 인상을 받은 피스는 스티븐슨이 이 선로에 사용될 증기기관차를 제작할 수 있도록 추천했다. 1825년 9월 27일 스티븐슨의 '액티브'(나중에 '로커모션'으로 이름이 바뀜)에 의해 견인되는 대중여객용 열차가 450명의 승객을 태우고 24㎞/h의 속도로 달링턴에서 스톡턴까지 최초로 운행됨으로써 철도수송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리버풀과 맨체스터의 재벌들은 두 도시를 연결하는 64㎞의 철도 건설을 부탁하기 위해 그를 초대했다. 이 구간을 측량·건설하기 위해 그는 다른 많은 것들 가운데서도 철도로 인해 말을 이용한 수송 수단이 밀려나고 귀리 시장이 폐쇄되는 것을 염려하는 농부들과 지주들의 격렬한 항의에 부딪혀야 했다.
리버풀-맨체스터 간의 선로가 거의 완성될 무렵인 1829년 '로켓호'라고 명명된 그의 기관차가 완성되었는데 이 새로운 기관차는 58㎞/h의 속도를 낼 수 있었다.
8대의 기관차가 1830년 9월 15일 개통된 리버풀-맨체스터 구간에서 운행되었는데, 이 기관차들은 모두 그의 뉴캐슬 공장에서 제작되었다. 이때부터 철도 건설은 영국·유럽·북아메리카 전역으로 빠르게 파급되었고, 그는 혁신적인 수송매체의 중요한 철도 건설, 다리 설계, 기관차 제작 등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계속 해결해나갔다.
또한 그는 미국 중부에 다수의 선로를 건설했고, 국내의 많은 철도건설계획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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