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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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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개요

소크라테스는 '학문의 파산기'인 페리클레스 시대에 활동했다.

BC 6세기초부터 과감한 우주론적 사변이 성행하면서 서로 갈등하는 사고체계들이 극심한 혼란을 일으켰다. 합리주의자인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는 참된 세계가 감각이 보여주는 세계와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함으로써 학문의 토대를 제거했다. 그의 제자 제논은 수학의 공준(公準)들조차도 서로 모순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유능한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와 고르기아스는 진리가 아니라 인간생활을 성공적으로 영위하는 데로 관심을 바꾸었다.

젊은 소크라테스는 '자연과학'에 열렬한 관심을 보였고 당시의 다양한 이론체계들을 익혔다. 이를테면 지구가 평평하다는 밀레토스 학파의 우주론, 지구가 구형(球形)이라는 이탈리아 학파의 이론, '단위'에 관한 제논의 수학적 수수께끼(연속성의 문제) 등을 공부했다. 그러나 이 이론에는 비판적 방법이 전혀 없었다. 한때 소크라테스는 '정신'(Nous)이 우주 질서의 원천이라고 보는 아낙사고라스의 이론을 중시했다. 아낙사고라스는 "모든 것은 최선의 질서를 갖추고 있다"면서 "우주가 합리적인 목적론적 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 색인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의 철학자, 엘레아 학파).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아낙사고라스를 공부하면서 이 철학자가 그 원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으며, 이론체계의 세부내용이 다른 이론들과 마찬가지로 자의적임을 알게 되었다.

소크라테스의 '가설'

이러한 실망을 겪고 나서 소크라테스는 '사실'이 아니라 논리, 즉 '사실'에 관한 '진술' 또는 '명제'를 고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방법에 따르면 특정한 주제에 관한 만족스러운 '가설' 또는 공준에서 출발해야 하며 그 가설에서 나오는 결과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결과들이 참이며, 무모순적인 것으로 밝혀지면 '가설'은 잠정적으로 확정된다. 진리에 관한 문제는 최초의 '가설'을 더욱 궁극적인 '가설'의 귀결로 연역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

형상(形相)이론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형상이론을 자신의 근본적인 '가설'로 제시한다.

'선함'·'아름다움'·'인간' 등과 같이 분명한 외연을 갖는 모든 명사는 감각지각으로 접근할 수 없고 사고에 의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을 직접 지시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대상을 이데아(Idea) 또는 에이도스(Eidos), 즉 형상(形相 Form)이라고 불렀다. 이에 비해 '아름답다'·'선하다'·'인간적이다' 등의 술어로 수식하는 감각이 가능한 사물들은 2차적이고 파생적인 실재를 지닐 뿐이다. 그것들은 형상을 '분유'(分有)함으로써 일시적으로 이것이나 저것이 '된다'.

흔히 19세기 학자들은 이러한 형상론을 소크라테스가 죽은 뒤 플라톤이 고안한 것으로 본다.

이러한 견해는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 즉 소크라테스는 플라톤과 달리 보편자를 특수자로부터 분리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것은 〈파이돈〉의 이론이 플라톤 이론에서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분리'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이론은 소크라테스가 '항상' 되풀이한 것을 플라톤이 〈파이돈〉에서 낯설지 않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만일 이러한 해석이 옳지 않다면 플라톤이 어떻게 형상이론이 그토록 성공적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었던가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옳다면 플라톤이 〈향연 Symposium〉과 〈국가 Republic〉에서도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재현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저작에서 플라톤은 최고의 형상인 미의 형상 또는 선의 형상이 모든 지적 관조의 목표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를 어떤 형식으로든 완전하게 나눌 수는 없다.

논리적 방법

논리적 측면에서 플라톤과 크세노폰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한 것처럼 소크라테스에게 '귀납논증'과 '보편적 정의'를 확립한 공을 돌린다(논리학). '보편적 정의'는 보편적으로 의미가 있는 술어, 즉 〈파이돈〉에서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정확하게 규정하려는 시도이다(보편자). 이러한 정의는 소크라테스가 실천을 개선하기 위해 도덕적 술어의 의미를 명확하게 하려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적 분할과 정의에 관한 이론을 만들었다. '귀납논증'은 단순하고 두드러진 구체적 사례들을 고찰함으로써 보편적 정의와 같은 정식에 도달하려는 시도이다. 이때 귀납은 증명의 방법이 아니라 제안의 방법으로 여겨진다. 귀납논증은 제안된 '정의'(定義)의 의미를 분명한 형태로 정신 앞에 드러낸다.

다음으로 그 정의가 정당한지는 그 정의를 채택함으로써 나오는 '귀결들'이 얼마나 만족스러운가에 달려 있다. 소크라테스 자신은 그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영역에서 '정의'를 찾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 소크라테스는 '자연' 일반이 아니라 공적이든 사적이든 '윤리적' 성격과 행위에 관심을 두었다(귀납).

윤리학과 정치학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중심문제를 우주론에서 생활의 규칙을 규정하는 것으로, 즉 '이성을 실천적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옮겨놓았다.

〈변명 Apologia〉과 관련해서 볼 때 신이 부여한 임무는 육체나 '재산'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영혼'을 '배려하고 돌보는 것', 즉 '가능한 한 개인의 영혼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영혼을 신과 같은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는 영혼을 '삶의 호흡'으로 본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육체가 소멸될 때 영혼도 포기해야 하는 것으로 본 호메로스나 이오니아 철학자들의 견해와 날카롭게 대비된다.

또 영혼을 육체 속에 거주하는 일종의 이방인으로서 육체가 활동할 때 잠자고, 육체가 잠잘 때 깨어난다'고 보는 오르페우스교에서 유행하던 견해와도 다르다. 소크라테스가 "영혼에 의해서 우리는 현명하거나 어리석고, 선하거나 악하다"고 이야기했듯이, BC 4세기경에는 영혼이 살아 움직이는 인격, 성격과 지성의 거주지로 여겨졌다. 따라서 영혼 그 자체가 바로 인간이었다(→ 색인 :이오니아 학파, 프시케).

소크라테스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의 행복은 직접적으로 영혼의 선함이나 악함에 의존한다.

참된 선, 즉 참된 행복을 바라지 않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행복을 놓친다. 그들은 실제적인 선 대신에 선하지 않은 대상, 이를테면 무제한의 부나 권력을 선택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잘못된 행위는 의도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참된 선을 '알고' 다른 것과 혼동하지 않아야 하며, 그래야 강함·건강·부·기회를 잘못 '사용'하지 않는다.

예컨대 죄를 저지르는 것이 손해를 보거나 고통을 받거나 죽는 것보다 더 나쁜 것임을 안다면 이에 대한 공포 때문에 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소피스트에 따르면 '선함'은 중립적인 것이기 때문에 선하게 쓰일 수도 악하게 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선에 관한 지식은 나쁘게 쓰일 수 없다. 그 지식을 지닌다는 것은 그 지식이 항상 적절하게 쓰인다는 것을 보증한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의 상대주의에 맞서 아테네인·스파르타인·그리스인의 선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선이 행복이라는 생각에 근거하여 절대적 도덕을 세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치는 정치가가 모든 동료·신민의 영혼을 '돌보고' 그들을 '가능한 한 선하게' 만드는 일이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고대 민주주의의 근본 악은 사회가 참된 통찰과 적합한 전문지식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의 손에 들어간 데서 생겨났다.

그가 보기에 약간의 부문에서 민주주의가 전문가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도덕과 정의의 문제에서 한 시민의 의견과 다른 시민의 의견이 똑같은 가치를 갖는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테미스토클레스나 페리클레스도 참된 정치가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그들은 민중의 기호를 자극했을 뿐, '정치체제를 돌보는 의사'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올바름과 절제', 즉 공동체의 정신적 건강을 증진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만이 정치가로 불릴 만하다고 주장했다.

절대적 선에 관한 지식이 국가의 복지와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임을 이해한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플라톤의 〈국가〉는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확신에 의해 다스려지는 사회생활을 그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소(小)소크라테스 학파로 불리는 집단에 영향을 미쳤다. 이 학파의 주요인물은 아테네의 안티스테네스와 메가라의 에우클레이데스인데, 이들의 사상은 견유학파(犬儒學派)와 메가라 학파로 이어졌다. 소크라테스의 노력이 훗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 계기는 무엇보다 그가 플라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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